타자 인생 3회차! 197화
25. 스타즈의 신성(6)
가볍게 스트레칭을 마친 뒤 박유성은 글러브를 끼고 외야로 나갔다.
그러자 스타즈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냉큼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뭐 하려는 거지?”
“글쎄. 펑고라도 하려는 건가?”
“펑고? 장난해? 박유성이야. 20억 신인이라고.”
“그럼 캐치볼?”
“설마 박유성이 그런 시시한 걸 하겠어?”
기자들은 뒤늦게 마무리 캠프에 합류한 박유성이 뭔가 대단한 걸 보여줄 거라 잔뜩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석률 감독이 펑고 배트를 들고 홈플레이트 앞쪽으로 나오자 다들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진짜 펑고야?”
“내가 말했잖아. 느낌이 딱 펑고였다니까?”
“김석률 감독도 웃겨. 비싼 박유성 불러서 고작 한다는 게 펑고야?”
“박유성을 김석률 감독이 부른 거야?”
“그럼? 전지훈련 전에 재계약 못 하면 전지훈련 불참이 당연하잖아?”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김석률 감독이 체면 세워달라고 부탁했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스타즈 담당 기자라고 해서 모두가 김석률 감독에게 호의적인 건 아니었다.
박유성과 송찬우, 김혜성이 합류했지만 김석률 감독 체제라 내년 시즌도 장담 못 한다는 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기자들의 눈에 갑작스러운 펑고는 신입 감독의 권위 세우기밖에 되지 않았다.
“에잇! 메이저리그 기자들도 많은데 쪽팔리게 뭐 하는 거야.”
“그런데 쟤들은 어떻게 알고 우르르 몰려온 거야?”
“박유성 메이저리그 가는 걸로 한동안 시끄러웠잖아. 얼마나 잘하나 보러 왔나 보지.”
스타즈 기자들은 메이저리그 기자들이 올림픽의 향수에 취해 박유성을 찾은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LA 올림픽이 끝난 지 4개월이 지났고 메이저리그는 아직 월드 시리즈가 진행 중이라 박유성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졌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정작 메이저리그 기자들은 게릿 벌렌더와 크리스 반스를 연달아 침몰시킨 박유성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키가 좀 큰 것 같은데?”
“글쎄. 키는 모르겠는데 체격은 좋아진 것 같아.”
“한국의 아마추어 리그는 8월에 끝났잖아. 그때부터 부지런히 몸을 만들었나 보지.”
“그런데 썬은 뭘 하려는 거지?”
“글러브를 끼고 나온 걸 보면 수비 연습을 하려는 것 같은데?”
그때 따악 하는 파열음과 함께 새하얀 공이 외야로 뻗어 나갔고.
박유성이 가볍게 몸을 움직여 타구를 잡아냈다.
“오호. 펑고 연습이잖아?”
“캠프에 오자마자 바로 훈련인 거야?”
메이저리그 기자들의 얼굴에 흥미가 번지던 그 순간.
다시 따악 하는 파열음이 울리더니 타구가 아까와 정반대로 날아갔다.
“이건 빠졌…… 어?”
타구의 방향만 보고 섣부른 판단을 내렸던 투손 스포츠의 캐빈 랜드가 입을 쩍 벌렸다.
첫 펑고가 우중간으로 향했고 그 타구를 잡기가 무섭게 다시 좌중간으로 타구가 날아갔으니 놓치는 게 당연한데 박유성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글러브를 뻗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캐빈 랜드가 놀란 눈으로 다른 기자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피닉스 투데이의 더그 테일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썬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
“어떻게 알았어?”
“지난 올림픽 때 썬을 봤다면 이 정도로 놀라지 않았을 거야.”
“썬의 수비가 그 정도야?”
“그 정도냐고? 하하. 올림픽 때 썬은 블랙홀이었어. 주변의 모든 타구들을 전부 다 흡수해 버렸다고.”
표현이 다소 거창했지만 주변의 기자들 중 누구도 더그 테일러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썬이 잡아낸 타구 중에 3개만 빠졌더라도 결승전은 미국이 이겼을 거야.”
“최소한 동점은 가능했을걸?”
“승부치기까지 갔다면 미국이 더 유리했을 거야.”
“한국은 결승전 때 총력전을 펼쳤잖아. 그 상황에서 연장으로 접어들면 기세는 미국 쪽으로 무조건 넘어왔어.”
“뭐야? 전부 다 결승전을 직관한 거야?”
마치 하나가 되어 떠들어대는 주변의 기자들을 보며 캐빈 랜드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애리조나 베이스볼의 매트 랜킨이 반문했다.
“애리조나 기자 협회에서 티켓을 나눠 줬잖아? 설마 못 받았어?”
“나 말고 다른 기자가 갔어.”
“이런, 세계 최고의 아마추어 선수를 볼 기회를 놓쳤군.”
“어차피 썬은 메이저리그에 올 건데 뭘.”
“내가 본 썬은 최고의 재능을 가진 루키였어. 하지만 4년 후 썬은 다를 거야. 한국에서 충분히 경험을 쌓았으니까 그때만큼 반짝거리지는 않겠지.”
“썬의 실력이 퇴화할 거라는 거야?”
“썬의 플레이가 올림픽 때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의미야. 우리가 방금 전 캐칭을 보고도 너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야.”
왠지 왕따가 된 듯한 기분에 캐빈 랜드는 입을 다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승전 취재를 하겠냐는 편집장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이는 건데.
뻔한 기사는 쓰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던 게 두고두고 후회가 됐다.
그래서 박유성의 펑고 훈련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와우.”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은 막을 수가 없었다.
한쪽에 서서 박유성의 연습을 지켜보던 스타즈 선수들도 저마다 입을 쩍 벌렸다.
“뭐야? 어떻게 저걸 다 잡아? 감독님이 따로 신호를 주시는 건가?”
“신호를 주긴 무슨 신호를 줘? 감독님도 지금 이 악물고 펑고 치고 있는데.”
“준수 네가 보기에는 어때?”
“유성이요? 뭐…… 올림픽 때랑 비슷한데요?”
“올림픽 때도 저 정도였어?”
“유성이 수비는 이병구 코치님과 이용구 코치님도 노터치였어요. 백호 형하고 정후 형이 유성이한테 맞춰서 움직일 정도였고요.”
“그게 말이 돼?”
“그 말도 안 되는 걸 지금 보여주고 있잖아요.”
박준수는 애써 태연한 척 굴었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입을 쩍 벌리게 했던 박유성의 수비는 언제 봐도 놀라웠지만 다른 선수들 앞에서 호들갑을 떨고 싶지 않았다.
그때 장영호가 박준수에게 다가왔다.
“형, 쟤 뭐예요?”
“뭐가?”
“저거 사람 맞죠? 수비하는 사이보그 같은 거 아니죠?”
“그런데 너, 뭐 알고 말하는 거냐?”
“형. 저 화장실에서 똥 쌀 때도 메이저리그 수비 영상 봐요. 몸이 안 따라줘서 문제지 눈 야구는 누구보다 많이 했습니다.”
비록 우익수 포지션에 적응하지 못하고 핫코너로 자리를 옮기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비를 보는 안목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박흥선 감독과 스타즈 팬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장영호는 수비 잘하는 선수들의 영상을 쉴 새 없이 돌려 봤고 그 덕분에 수비수들의 움직임만 봐도 레벨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래서 네가 보기에는 누가 더 위냐?”
“다니엘하고요?”
“다니엘이 더 나아?”
“흠……. 솔직히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요. 그런데 유성이가 중견수 보면 계속 우익수로 뛰어도 되겠다 싶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유성이는 일단 말이 통하잖아요. 다니엘은 급하면 영어로 씨부리는데 그때마다 확 깨요.”
“왜? 욕인 거 같아서?”
“극장에서 우리나라 공포 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중국어로 소리 질러봐요. 그럼 어떻겠어요?”
“그렇게 말하니까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다니엘 브리토가 들으면 서운해하겠지만 장영호는 다니엘 브리토의 넓은 수비 범위가 마냥 고맙지 않았다.
까다로운 타구를 처리해 주다 못해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시도해 볼 만한 타구까지 전부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3루수로 전향하는 게 어떻겠냐는 김석률 감독의 제안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막상 박유성의 수비를 보니까 외야에서 함께 호흡을 맞춰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그래도 외야수는 포기해. 너 그러다 진짜 무릎 나간다.”
“살이야 빼면 되죠.”
“너 그래 놓고 올해 3㎏ 쪘잖아.”
“살이 찐 게 아니라 근육이 늘어난 겁니다.”
“이번에 병규 좌익수로 전향하는 거 알지? 내가 그 얘기 듣고 말렸거든? 그런데 병규가 그러더라. 자신은 아직 외야에서 뛸 수 있다고.”
“민병규 선배는 호리호리하잖아요.”
“그래. 외야는 유성이나 병규 같은 준족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몸으로 때우자.”
“몸으로요?”
“우리 같은 덩치들이 내야에 왜 필요하겠냐?”
“헐, 몸으로 막으라고요?”
“그래, 인마. 유성이 들어왔으니까 너하고 난 수비 더 열심히 해야 해.”
“그런데 유성이가 그렇게 잘 쳐요?”
“너 크리스 반스 공 쳐봤냐?”
“못 쳐봤죠.”
“안 쳐봤으면 말을 마. 그 괴물 같은 놈한테 안타 빠진 사이클링 히트를 친 게 쟤야.”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수비나 주루와 달리 박유성의 타격 능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야구 전문가는 보다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고 어떤 현장 지도자는 지나친 자신감이 독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LA 올림픽에서 한솥밥을 먹은 국가대표 선수들은 박유성의 타격에 대해 한목소리로 말했다.
“유성이 쟤는…… 그냥 최고야.”
“그 정도예요?”
“너 괜히 유성이 앞에서 선배랍시고 주름 잡지 마라. 너 유성이가 마츠다 유이토 포크볼을 어떻게 쳤는 줄 아냐?”
“어, 저 그거 엄청 궁금했는데 어떻게 친 거예요?”
“글러브 보고 쳤단다.”
“……네?”
“전략분석팀 직원도 모르는 버릇을 찾아냈다고.”
“헐, 진짜요?”
일본과의 4강전에서 승리한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은 호텔로 돌아와 축하 파티를 열었다.
결승전이 코앞이었지만 목표였던 메달 획득과 결승 진출을 동시에 이뤄냈다는 기쁨을 선수들이 주체하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박유성이 미성년자라 주류는 철저하게 제한됐지만.
선수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며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었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박유성이라는 화제에 꽂혔다.
“그런데 유성아. 너 원래 포크볼 좀 쳤니?”
“야구 월드컵에서 몇 번 쳐봤죠.”
“그래? 일본 애들은 아마추어들도 포크볼을 잘 던지냐?”
“에이, 걔들 공은 병규 형이 오른손으로 쳐도 칠걸요?”
“야 인마! 나 원래 스위치 히터가 꿈이었어!”
“그럼 오늘 마츠다 유이토 포크 볼은 어떻게 친 거야?”
“그래. 비결 좀 알려줘라.”
“이거 특급 팁인데…… 마츠다 유이토가 포크 볼 그립을 잡을 땐 글러브가 커져요.”
“……뭐?”
“포크볼을 꽉 껴야 하잖아요. 자연스럽게 손목 부분이 벌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쿠세를 봤다고?”
박준수는 그 순간의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조언을 구했던 송현민과 기정후는 물론이고 박유성이 뭐라고 떠드나 들어보자던 코칭스태프들까지 다들 입을 쩍 벌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박유성은 그냥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감독님. 박유성 선수 말이 맞았습니다.”
“그래?”
“네. 지금 영상 다시 돌려 봤는데 마츠다 유이토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안 던지던 포크볼을 던지려니까 집중력이 떨어졌나 봅니다. 확실히 글러브의 모양이 달랐습니다.”
그때 이후로 대표팀 선수들 중 그 누구도 박유성에게 타격에 대해 조언하지 않았다.
프로 야구 레전드 출신인 강기태 감독과 추신우 수석 코치, 이병구 타격 코치도 마찬가지였다.
꼭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다며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던 세 사람조차 박유성을 슬슬 피해 다녔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장영호는 딴지를 걸었다.
“그냥 우연 아니었을까요?”
“그래. 너같이 생각한 놈이 있었어.”
“누구요?”
“내가 놈이라고 하면 누구겠냐?”
“병규 선배요?”
“그놈이 못 믿겠다면서 크리스 반스에 대한 대비책을 물었거든? 그랬더니 유성이가 뭐라는 줄 아냐?”
“뭐라고 했는데요?”
“몸쪽 공에 자신 있는 투수는 몸쪽 공을 때려서 기를 꺾어놔야 한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 말처럼 첫 타석부터 크리스 반스를 작살냈어.”
비록 포심 패스트 볼 타이밍에 빠져나온 방망이 중심에 커터가 와서 맞아주긴 했지만.
선두타자로 나가 선제 홈런을 때려낸 박유성을 보며 대표팀 타자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 더그아웃 반응이 그랬던 거예요?”
“더그아웃 반응?”
“베팍에 짤 올라왔잖아요. 다들 반 박자 쉬고 축하해 줬다고.”
“솔직히 경기 시작과 동시에 홈런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 그것도 세계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 명이라 불리는 크리스 반스를 상대로 말이야. 나도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을 보면서 잠깐 멍했어. 꿈인가 싶더라고.”
당시의 홈런을 떠올리며 박준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던 다니엘 브리토도 좌중간과 우중간을 뛰어다니며 타구를 처리해 내는 박유성을 보며 웃었다.
“크레이지 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