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186화 (186/412)

타자 인생 3회차! 186화

24. 역대급 신인(7)

2

LA 올림픽 초반에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이 금메달을 쓸어 담으면서 목표였던 10-10(금메달 10개와 종합 순위 10위) 달성이 유력해지자 SBX 예능국에서는 일찌감치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우르르 불러다가 시간 때우는 방송은 트렌드 지났어. 다들 알고 있지?”

“그럼 기존의 프로그램들을 최대한 살려보는 게 어떨까요?”

“기존 예능 프로그램에 나눠서 출연시키자는 거지?”

“물론 날로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기존 시청자들의 반감도 감안해야 합니다. 자신들이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특집 프로그램으로 결방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애꿎은 선수들만 욕을 먹습니다.”

“그래. 정 PD 말이 맞아.”

예능 국장은 화이트보드에 SBX 간판 예능을 전부 나열했다. 그리고 시청률이 떨어지거나 선수들을 섭외하기 애매한 프로그램들을 하나씩 지워 나갔다.

그렇게 해서 살아 남은 건 총 3개.

<더 런닝>과 <미운 우리 새끼들>, <사부열전>이었다.

십 년 넘게 인기를 끌고 있는 <더 런닝>은 말이 필요 없는 SBX 간판 예능이었다.

예능을 꺼리는 배우들조차 신작이 나오면 홍보를 위해 무조건 출연할 정도였다.

“더 런닝은 개인 종목으로 4명 정도가 최선입니다. 그 이상 출연시키면 어지러워요.”

“그런데 미운 우리 새끼들에 출연시켜도 되는 거야?”

“선수들의 사생활을 궁금해하는 시청자들도 많습니다. 게다가 국대 선수들 중에서 혼기 꽉 찬 선수들도 있을 테니까요.”

“국대 선수도 결혼 앞에서는 남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주자는 거지?”

“장담하는데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반응 좋을 겁니다.”

“좋아. 그럼 이렇게 가자고.”

명사를 사부로 초청해 가르침을 받는 <사부열전>에는 이미 여러 스포츠 스타들이 출연한 상황이었다.

“일단 인기 스타들은 더 런닝 쪽으로 밀어 넣어.”

“국장님!”

“김 PD는 욕심 좀 그만 내라. 간판 프로그램이 먼저야. 다른 방송국에서도 선수들 불러다 예능 찍을 건데 시청률 밀려봐. 그럼 내 모가지만 위태로울까?”

예능국장의 경고에 <사부열전> 김정국 PD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대신에 구기 종목에서 메달 나오면 무조건 저희 밀어주십시오.”

“구기 종목? 설마 야구 말하는 거 아니지?”

“축구는 대진운이 좋고 야구도 메이저리그 선수들 전부 합류해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여자 배구도 가능성 있고요.”

“야, 김 PD! 그렇게 다 가져가면 우리는 어쩌라고?”

“그래. 김 PD. 욕심 적당히 부리고 딱 두 종목만 찍어봐. 거기서 메달 나오면 내가 무조건 밀어준다. 어때?”

예능국장이 짓궂게 말했다. 그러자 한참을 고민하던 김정국 PD가 두 종목을 골랐다.

“일단 여자 배구하고…… 축구, 아니, 야구로 하겠습니다.”

“야구? 괜찮겠어?”

“제가 점찍어둔 선수가 있습니다. 잘되면 그 선수 얼굴이나 보려고요.”

“뭐야? 송현민이 팬이었어?”

주변에서는 당연히 송현민일 거라 여겼지만.

김정국 PD가 눈여겨보는 선수는 따로 있었다.

‘다들 현재를 본다면 나는 미래를 타겟으로 잡는 거야. 박유성에 민지혜면 그림도 좋을 테고. 관건은 메달을 따느냐는 건데…… 두 종목 중에 하나만 따도 밀어붙이자.’

<사부열전> 팀으로 돌아온 김정국 PD는 회의 사실을 전했다.

“박유성에 민지혜요? 그건 너무 도박 아닐까요?”

“저는 괜찮은데요?”

“최 작가님. 지금 김 PD님 비위 맞춰줄 때가 아니에요.”

“비위 맞춰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요? 솔직히 지금 메달 딴 선수들 전부 SNS 하잖아요? 사생활까지 오픈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예전만큼 신선하지는 않아요.”

“나도 딱 그렇게 생각했어. 결국 다른 방송국에서도 돌려쓸 텐데 그러다 보면 더 식상해질 테고.”

“국대 선수들이야 예능 출연이 재미있을지 몰라도 시청자들에게는 그것도 공해처럼 느껴질 수 있거든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메달리스트들에게 공해는 좀…….”

“말이 그렇다는 거죠. 지금 제 말꼬리 잡으신 거예요?”

“됐으니까 그만 싸우고. 최 작가는 일단 박유성과 민지혜를 점찍어놓고 그림 좀 그려봐.”

“PD님은 뭐 하시게요?”

“뭐 하긴 뭘 해. 집에 정화수 떠 놓고 메달 따길 빌어야지. 두 종목 중에 한 종목이라도 메달을 따야 해. 아니면 비인기 선수들 데려다 놓고 억지 촬영해야 한다고.”

빈말이 아니었던지 김정국 PD는 사무실 한편에 정화수를 떠놓고 오갈 때마다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여자 배구 대표팀은 조별 예선을 뚫고 8강에 합류했고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도 미국을 2 대 1로 제압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러다 진짜 야구도 메달 따겠는데요?”

“그러게. 나도 설마하니 미국을 잡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박유성이 역전 홈런을 쳐서 말이죠.”

“나 신기 있나?”

“갑자기요?”

“갑자기가 아니라 내가 말했잖아. 대한민국 국대 선수들 프로필을 쭉 보다가 갑자기 박유성에게 꽂혔다고.”

“그럼 만약에 야구가 메달 따고 배구는 못 따면 박유성만 부르실 거예요?”

“민지혜도 같이 불러야지. 뭐든 음양의 조화가 중요한 거야. 청춘 남녀가 나란히 서 있어야 예쁘지.”

“그런데 키는 아마 민지혜가 더 클걸요?”

“그래? 그럼 박유성이 깔창 끼워줘야겠네.”

다음 날 8강전에서 일본을 만난 여자 배구 대표팀은 5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3 대 2로 승리를 따내며 <사부열전> 팀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거의 동 시간대에 진행된 예선 2경기에서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이 도미니카 공화국까지 잡아내자 김정국 PD는 곧장 예능국장을 찾아갔다.

“국장님. 경기 결과 들으셨죠?”

“그래. 듣긴 했는데…….”

“딴소리 마십시오. 박유성하고 민지혜는 저희가 찜했습니다.”

“김 PD. 그러지 말고…….”

“국장님. 진짜 계속 이러시면 저 라인 갈아탑니다?”

“뭐 인마?”

“국장님이 고교 후배라고 정 PD 챙기는 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그래도 국장님이 나름 합리적인 분이라고 생각해서 군말 없이 따라왔는데 약속을 어기시면 저도 더는 못 참죠.”

“못 참으면? 네가 뭘 어쩔 건데?”

“제가 국장님 밑에서만 몇 년인데 설마 국장님 곤란하게 만들 거리 하나 없을까요?”

“……뭐?”

“저야 막말로 국장님 쏘고 독립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국장님은요? 그 연세에 다른 제작사 가서 일하실 수 있으세요?”

“알았다. 알았어. 거참 무슨 말을 못 하게 하네. 대신에 메달 따야 해. 메달 못 따면 어림없어.”

“메달 걱정은 마시고 정 PD한테 적당히 하라고 전해주세요. 막말로 그 프로그램은 아무나 가서 해도 평타는 칩니다.”

예능국장의 악담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대만까지 꺾고 조 1위로 4강전에 진출했다.

4강전 상대는 숙명의 라이벌 일본.

“마츠다 유이토는 반칙 아니냐?”

“그러게요. 치사한 놈들이 같은 투수를 몇 번 돌려쓰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이겼으면 좋겠다.”

“이길 겁니다. 우리 유성이가 해줄 거예요.”

<사부열전>팀이 다 같이 모여 지켜본 4강전은 박유성으로 시작해서 박유성으로 끝이 났다.

선제 3루타로 기선 제압에 성공하더니 마츠다 유이토를 상대로 3루타만 3개를 때려내며 막내 특집의 기대감을 높여주었다.

반면 4강전에서 미국을 만난 대한민국 여자 배구 대표팀은 3 대 1로 패배하고 3, 4위전으로 내려왔다.

4강 상대는 터키.

객관적인 전력상 열세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세터 한소정의 신들린 플레이와 센터와 레프트를 오가며 쉴 새 없이 코트를 누빈 겁 없는 신인 민지혜의 활약 속에 세트 스코어 3 대 1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됐어. 둘 다 메달을 땄으니까 이제 편히 봐도 돼.”

“에이, 그래도 기왕이면 금메달이 좋죠. 이번에 이기면 20년 만의 야구 금메달인데요?”

“맞아요. 금메달 따면 시청률부터 달라질 거예요. 야구 끝나면 보통 9시 넘어가잖아요.”

“중계 보고 넘어오는 야구팬들만 받아먹어도 시청률 7퍼센트는 찍겠지?”

“7퍼센트가 뭐예요? 최소 10퍼 이상 갑니다.”

김정국 PD는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미국 대표팀의 결승전 선발은 크리스 반스.

현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완투수라 불리는 크리스 반스를 상대로 박유성이 북 치고 장구 쳐서 대한민국 대표팀을 20년 만의 올림픽 우승으로 이끌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기왕이면 박유성이 결승타라도 치길 바랐다.

그런데 그 터무니없던 상상이 현실이 됐다.

“김 PD. 잠깐 나 좀 보자.”

“무슨 일인데요?”

“잠깐 얘기 좀 해.”

“하실 말씀 있으면 여기서 하세요. 설마 이제 와서 박유성이 빼가려는 건 아니죠?”

“빼가긴 뭘 빼가? 같이 쓰자는 거지.”

“박유성 선수 섭외는 알아서 하세요.”

“정말?”

“대신에 우리가 먼저입니다. 우리 프로그램에 먼저 나오고 난 다음에 부르세요.”

“야, 김 PD!”

“정 PD님. 여기 보는 눈들 많아요. 시청률에 눈 뒤집혀서 후배 밥상 엎는다고 소문 한번 제대로 내볼까요?”

“너 진짜 이러다 큰코다친다.”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선배 벼르고 있는 사람 많으니까 제발 적당히 좀 하세요.”

박유성 빼돌리기에 실패한 정일도 PD는 예능국장을 찾아갔고.

예능국장은 최대한 빨리 박유성의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내라고 닦달했다.

하지만 김정국 PD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몰래 온 손님 섭외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송현민 선수 인터뷰도 따야 하고요.”

“송현민이 인터뷰?”

“박유성하고 제일 친한 게 송현민이잖아요? 설마 박유성만 달랑 내보낼 줄 아셨습니까?”

“빨리 내보내라니까 괜히 시간 끄는 거 아냐?”

“자요. 여기 보세요. 송현민뿐만 아니라 한국 야구 협회장에 기정후, 감백호까지 전부 다 인터뷰 요청했습니다. 긍정적인 답변 받았고요.”

“이렇게 되면…… 너무 세잖아?”

“참고로 부사장님께 특집 프로그램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뭐? 야 인마. 그걸 왜 부사장님께 말씀드려?”

“그냥 우연히 만나서 우연히 말씀드린 건데 왜요? 설마 이 포맷 그대로 정 PD한테 넘겨주시려고요?”

“이 자식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네? 내가 그럴 놈으로 보이냐?”

“그런 거 아니면 관심 좀 접어주세요. 부담스러워서 일을 못 하겠어요.”

김정국 PD는 이번 특집 방송에 목숨을 걸었다.

이번 방송을 제대로 만들어서 시청률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개편 때마다 압박을 주는 예능국장과 정일도 PD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방송이 한 달 가까이 지연됐다.

“김 PD 저놈은 뭐 하는 거야?”

“그러게요. 얼마나 대단한 특집을 만들겠다고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저 새끼 저거 박유성 주기 싫어서 일부러 시간 끄는 거 아니겠지?”

“설마요. 그리고 지금은 박유성이 아니라 박유성 할아버지가 와도 분위기 못 살립니다. 이미 끝물이라서요.”

예능국장과 정일도 PD는 김정국 PD의 특집 방송이 망할 거라 저주했다.

하지만 늦은 만큼 잘 준비한 특집 방송은 말 그대로 대박이 터졌다.

“PD님! 시청률 나왔습니다!”

“얼마야?”

“18.8퍼센트요! 이대로면 2편은 20퍼센트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본래 계획대로 4주짜리로 간다. 바로 편집 준비해!”

시청률이 저조하다는 지적 속에 최근에는 명사당 2회 분량 이상을 내보내지 않았지만.

김정국 PD는 과감하게 4주 방영이라는 승부수를 띄웠고.

대표팀 선수들과 신성 고등학교 선수들의 인터뷰까지 추가하며 시청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사부열전>은 마지막 회까지 시청률을 끌어올리며 최고 시청률 23.8퍼센트라는 기염을 토해냈고.

덩달아 박유성의 인기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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