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83화
24. 역대급 신인(4)
박유성은 일단 최윤석 타격 코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니까 너희들끼리 훈련을 하겠다는 거지?
“어쩌다 보니 애들이 모여 버려서요.”
-일단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다. 내가 감독님께 전화드려 볼게.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코치님.”
-번거롭기는 무슨.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다.
한국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는 신성 고등학교에 남아 있기로 했지만 최윤석 타격 코치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그렇다 보니 훈련 분위기도 엉망이었다.
재계약을 한 나승균 감독은 대통령배 4강과 박유성을 배출해 낸 것으로 만족하는 분위기고.
배성일 배터리 코치도 자신을 선택해 준 김석률 감독에게 폐가 되지 않겠다며 요즘 메이저리그 트렌드를 공부 중이었다.
신기남 주루 코치와 이민우 투수 코치는 계속 신성 고등학교에 남게 됐지만 그 둘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훈련에 부족함을 느낀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고 하니까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다들 유성이에게 뭐라도 배우고 싶겠지. 나 같아도 그럴 거야.”
코칭은 코치에게 받는 게 원칙이긴 하지만 프로에서도 실력 있는 선수 주변으로 동료들이 모이게 마련이었다.
최윤석 타격 코치는 나승균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박유성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래서? 나더러 학교로 오라고?
“아닙니다. 감독님. 애들이 유성이 온 김에 몸 좀 풀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요.”
-그럼 풀면 되지 뭐가 문제야? 자율 훈련까지 내가 허락해야 해?
“그럼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제가 가 보겠습니다.”
-그래. 최 코치가 가 봐. 나 지금 제주도 내려왔어.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고.
나승균 감독의 승낙을 받은 최윤석 타격 코치는 근처에 사는 배성일 배터리 코치를 끌고 학교로 향했다.
“이 녀석들은 평소에나 잘하지 왜들 이런답니까?”
“솔직히 김 감독님 스타즈 가시고 나서 훈련 대충 했잖아.”
“그야 나 감독님이 유난 떨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감독님 입장하고 애들 입장하고 같아? 막말로 유성이 빼고 5라운드 안에 호명될 만한 선수가 있어?”
“없죠.”
“유성이야 자기가 잘해서 우선 지명받았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달라. 우리가 챙겨주지 않으면 태수 빼고는 전부 떨어질지 모른다고.”
“감독님도 안 계시는데 훈련을 시키자는 말씀은 아니시죠?”
“애들이 다들 모였다잖아. 그럼 최소한 봐주기라도 해야지. 안 그래?”
최윤석 타격 코치와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라이브 배팅이 진행 중이었다.
“마운드에 누구야?”
“던지는 폼이 동화인 거 같은데요?”
“타자는 유성이네.”
“영재에 유진이, 지원이까지 줄 선 거 보니까 내기라도 하는 모양입니다.”
배성일 배터리 코치의 예상대로 박유성이 제안한 훈련 방식은 간단했다.
박유성은 3학년 타자들과 편을 먹고.
나머지 선수들이 한 팀이 되어서 대결을 펼치는 것이었다.
“선우야!”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저만치 보이는 매니저 황선우를 불렀다. 그러자 황선우가 후다닥 달려와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7이닝 동안 7점 이내로 막으면 지원이네 팀이 이긴다는 거지?”
“네. 대신 유성이 팀은 수비 안 하고 공격만 하고요.”
“그럼 지원이네 팀이 너무 불리한 거 같은데?”
3학년 투수들이 돌아가며 공을 던지기로 했다지만 박유성을 비롯한 3학년 타자들 중에 3학년 투수들의 공을 공략하지 못할 선수는 없었다.
게다가 3학년 타자들은 다 해서 6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포수 김산은 수비로 빠져서 여차하면 박유성이 매 이닝 타석에 들어설 수도 있었다.
그러자 황선우가 웃으며 말했다.
“대신에 1, 2학년들 전부 다 수비하러 들어갔습니다.”
“전부 다?”
“네. 외야에 5명 들어가 있고 내야도 포수 빼고 6명입니다. 진욱이하고 경준이는 이미 아웃 됐고요.”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고개를 돌려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어쩐지 눈에 들어오는 선수들이 많다 했더니 1, 2루간과 3유간은 물론이고 좌익선상과 우익선상에도 수비수들이 한 명씩 나가 있었다.
“이러면 또 모르겠는데요?”
“그러게. 이거 누구 아이디어야?”
“유성이요.”
“유성이?”
“네. 1, 2학년들은 일단 수비가 먼저라고 했습니다. 수비를 잘해야 경기에 뛸 수 있다고요. 그리고 3학년 타자들은…….”
“일종의 압박 야구겠지.”
“맞아요. 수비수들이 없는 공간으로 안타를 때려내려면 그만큼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유성이가 우리보다 낫네.”
최윤석 타격 코치는 더그아웃 대신 관중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수들끼리 자발적으로 훈련을 하는데 이제 와서 끼는 건 너무 얌체 짓 같았다.
그때 따악, 하는 타격음과 함께 새하얀 공이 뻗어 나갔다.
“어이구. 이건 빠질 거 같은데?”
좌익선상과 우익선상에 수비수가 들어가서 좌중간의 빈 공간이 거의 없었지만.
박유성이 방망이에 제대로 얹은 타구는 내년 시즌 신성 고등학교의 외야를 책임질 중견수 조성훈과 우익수 우영민의 사이를 정확하게 갈라 버렸다.
“2루로! 빨리!”
뒤늦게 공을 쫓은 우영민이 공을 잡고 2루로 송구했지만.
박유성은 공이 2루 베이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3루를 파고들며 급이 다른 주루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유성이 저 녀석, 안 봐주는데요?”
“조건 자체가 불리한데 봐주면 쓰나?”
“그런데 정말 빠르네요. 더그아웃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관중석에서 보니까 왕년의 기종범 선수 보는 것 같습니다.”
“괜히 별명이 리틀 기종범이겠어? 기정후도 인정했잖아. 자신보다 더 닮았다고.”
현역 시절 기종범은 가장 발이 빠른 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은퇴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주루 플레이의 대명사 하면 기종범이었다.
그만큼 기종범의 역동적인 주루 플레이는 다른 선수들과 느낌부터 달랐다.
투수의 투구폼을 면밀히 분석해 자신만의 타이밍에 치고 나가는 플레이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감탄이 절로 날 정도.
그래서 나이 지긋한 야구팬들이 박유성에게 더 열광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원래 야구 판에서 절대 깨지지 않을 거라는 기록이 두 개 있잖아.”
“기종범 선배의 84도루와 백연천 감독님의 4할 타율이요?”
“그래. 그런데 난 왜 저 녀석이 대형 사고를 칠 것 같지?”
최윤석 타격 코치가 박유성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야구인들이 들었다면 프로가 만만하냐며 코웃음을 쳤겠지만.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을 멱살 잡고 우승시킨 박유성이라면 메이저리그에 가기 전에 두 개의 기록 중에 하나는 경신할 것 같았다.
“저는 개인적으로 4할 타율 경신 예상합니다.”
“4할? 도루가 아니고?”
“유성이가 발 빠른 건 다들 알 거라서요. 도루 안 주려고 엄청 견제할 느낌입니다. 그러다 보면 스타즈에서도 도루를 자제시킬 거 같고요.”
“배터리 코치다운 생각이네.”
“유성이 때문에 멘탈 터진 투수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마츠다 유이토도 넋이 나갔고 크리스 반스도 더그아웃에서 미친 사람처럼 웃었잖습니까?”
“유성이 때문이 아니라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지.”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기사가 났습니다. 이렇게까지 얻어맞은 적이 오랜만이라 갑자기 웃음이 났다고요.”
배성일 배터리 코치는 기종범의 84도루보다 역대 최고 타율 경신 가능성을 높게 봤다.
82년 프로 야구 원년에 백연천이 세운 기록은 0.412.
단순히 4할도 아니고 추가로 1푼2리를 더 쳐야 하는 만큼 넘어서기가 결코 쉽지 않은 기록이었지만 LA 올림픽에서 세계 최고 레벨의 투수들을 상대로 7할이 넘는 타율을 선보인 박유성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4할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유성이가 잘 치는 건 맞지만 프로의 공은 또 다르니까.”
“유성이도 보통의 신인 선수가 아니죠.”
“올림픽에서 잘 친 걸 무조건 적용하면 안 돼. 오히려 올림픽에서 너무 잘해서 집중 견제가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고.”
“하긴. 그렇겠네요.”
“거기에 체력적인 문제와 슬럼프도 고려해야 해. 유성이는 아직 한 시즌을 뛰어본 경험이 없잖아. 4할 타율을 노릴 만한 경쟁력은 있겠지만 달성은 쉽지 않을 거야.”
“그럼 최 코치님은 오히려 도루 쪽이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 거죠?”
“유성이 성격 알잖아? 타격이 안 풀리면 발로 해결하는 거.”
“유성이가 내야를 휘젓고 다니면 투수들도 함부로 거르지 못하겠죠.”
“물론 배 코치 말대로 유성이가 프로 야구에 빨리 적응한다면 4할도 가능할지 모르고.”
3시간 동안 진행된 경기는 박유성 팀의 승리로 끝이 났다.
1회에 박유성의 3루타가 잔루로 남았을 때는 손지원 팀이 무난하게 이길 것 같았지만.
박유성이 타자들에게 원 포인트 레슨을 해준 이후로 상황이 달라졌다.
인코스 제구가 좋지 않은 김동화를 상대로 타자들이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서서 압박을 하자 김산도 어쩔 수 없이 바깥쪽 공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고.
장태수를 비롯한 타자들이 바깥쪽 공을 욕심부리지 않고 밀어 때리면서 박유성 앞에 밥상을 차린 것이다.
2사 만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은 바뀐 투수 이영재의 2구를 잡아당겨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공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경기 분위기를 가져온 박유성 팀은 3학년 투수들을 전부 무너뜨리며 피자 내기 대결에서 승리했다.
“야, 내일 다시 해!”
“공 더 던질 수 있겠어?”
“오늘 40개밖에 안 던졌거든? 암튼 먹고 째지 마라. 내일은 치킨이다.”
“우린 유성이가 있어서 절대 안 지니까 언제든지 시원하게 들어와라.”
손지원과 3학년 투수들은 복수를 다짐하며 사흘 내내 덤볐지만 박유성이 버티는 3학년 타자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색 대결의 성과는 상당했다.
야수들의 밭을 뚫어야 하는 3학년 타자들의 집중력이 몰라보게 좋아졌고.
박유성에게 쉴 새 없이 두들겨 맞은 3학년 투수들도 공 하나하나를 신경 쓰며 던지게 됐다.
“뭐야, 이 녀석들? 다들 뭐 맛있는 거라도 먹었나?”
“이게 다 유성이와 한 게임 덕분입니다.”
“게임?”
자신이 제주도에서 낚시를 즐기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전해 들은 나승균 감독이 껄껄 웃었다. 그러고는 모든 훈련을 박유성 게임으로 대체하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될까요?”
“어차피 모 아니면 도야. 상대 팀에서 유성이한테 줄 점수 주자는 작전으로 나오면 나머지 선수들이 해줘야 한다고.”
지금껏 선수 훈련을 김석률 감독에게 맡겨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승균 감독이 무능력한 지도자인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아집이 없었다.
“자, 오늘부터 박유성 게임을 하루 2번씩 진행한다. 진 팀은 운동장 100바퀴를 나눠 뛰어야 한다.”
“헐, 저희 팀은 지면 1인당 20바퀴씩인데요?”
“너희는 지면 25바퀴야. 유성이는 열외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싫으면 유성이를 빼고 해보든가. 어때?”
“아뇨. 코치님. 지면 유성이 몫까지 저희가 뛰겠습니다. 그러니까 유성이는 저희 팀에 주세요.”
청룡기 예선까지 보름 가까운 기간 동안 신성 고등학교 야구부는 박유성 게임에 몰두했다.
“뭐 하자는 거지?”
“박유성이 제안한 연습 방법이라고 하는데 저게 효과가 있을까?”
“뭘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소용없을걸?”
“고작 저런 방법으로 실력이 늘면 진즉에 다들 했지. 안 그래?”
신성 고등학교를 염탐한 학교들은 하나같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박유성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신인이라 평가받는 선수와 부대끼며 야구를 하다 보면 얻어가는 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