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182화 (182/412)

타자 인생 3회차! 182화

24. 역대급 신인(3)

박명철은 박유성이 조만간 참한 며느릿감을 데려올 거라 생각했지만 1회차 시절은 물론이고 2회차 시절에도 박유성은 독신으로 지냈다.

성적을 내고 싶은 욕심에 여자를 진득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다 3회차 끝나기 전까지 트로피 하나 못 건지겠는데?’

1회차와 2회차 때는 주로 신성 고등학교 동기들이 소개팅을 주선해 줬지만 이번 3회차는 그마저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U-18 야구 월드컵이 끝나기가 무섭게 LA 올림픽에 참가하느라 주말 리그 후반기와 협회장기를 거의 다 빠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대통령배에서 4강에 진출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프로 입시를 장담하기란 쉽지 않았다.

프로야구 12개 구단이 드래프트를 통해 선발하는 신인 선수는 우선 지명을 포함해 최대 132명.

대학 졸업 예정자들까지 고려하면 고작 100명 전후의 고졸 선수들만이 프로의 문턱을 넘게 되는데 올해 신성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만 10명이었다.

10명 모두가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긴 어렵겠지만.

야구만 하느라 좁을 대로 좁아진 인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남은 전국 대회에서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장태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오냐.”

-이사는 잘했어?

“이제 이삿짐 싸는 중이야.”

-짐이 많으면 우리가 가서 도와줄까?

“와서 뭘 깨 먹으려고?”

-깨 먹긴 뭘 깨 먹어? 친구끼리 돕겠다는 건데.

“어차피 포장 이사할 거니까 안 와도 돼.”

-그래? 그럼 너도 딱히 할 거 없겠네?

“전화한 용건이 뭐냐?”

-나와라.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

“어디로 나오라는 거야?”

-어디긴 어디야. 우리 아직 연습 중이니까 학교로 와.

“나 이번 주까지 연습 쉬기로 했는데?”

-비싸게 굴지 말고 나와 인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짜식이 무섭게 왜 이래?”

통화를 마친 박유성은 동기들에게 줄 선물을 챙겼다.

가족들의 선물을 사면서 기념품을 챙길까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의미 있는 선물이 나을 것 같아서 국가대표 선배들의 사인을 받아놓았다.

배트 가방에 선물을 잔뜩 집어넣었더니 꽤나 무거워졌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중에 여소 안 해주기만 해봐.”

박유성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신성 고등학교로 향했다.

본래라면 오전 수업을 끝내고 운동장에서 흙먼지를 마시며 굴러야 했겠지만.

한국 야구 협회에서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라는 공문을 보내준 덕분에 요 며칠 등교도 하지 않고 집에서 쉬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학교 가려니까 어색하네.”

활짝 열린 교문을 지나 야구부 전용 운동장으로 향했다.

연습 중이라는 말처럼 자체 청백전이 진행 중이었는데 뭐랄까.

선수들의 움직임이 영 시원찮았다.

우익수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던 김병욱이 박유성을 발견했다.

“어, 유성이다!”

김병욱의 말에 선수들이 경기를 내던지고 우르르 달려왔고.

박유성은 떨떠름한 얼굴로 오랜만에 동기들과 후배들을 반겨야 했다.

“왜 여기로 와? 경기 안 해?”

“그냥 너 올 때까지 워밍업 했던 거야.”

“그래도 하던 거 마저 하지 왜?”

“이야, 박유성. 넌 올림픽 금메달을 따도 달라진 게 없구나?”

“아니야. 뭔가 좀 더 어른스러워졌어.”

“아닌데? 유성이 원래 저렇게 재수 없는 말 잘하는데?”

“야! 아무리 친구여도 그렇지 대놓고 그런 말 하면 어떻게 해?”

“그래. 맞아. 재수 없는 놈한테 재수 없다고 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냐?”

“다들 1절만 하지?”

여느 때처럼 깐족거리는 장태수와 김병욱을 한 번씩 째려봐 준 뒤 박유성은 엄마 오리처럼 선수들을 뒤로 매달고 야구부실로 들어갔다.

“감독님은?”

“안 계셔. 코치님들도 없고.”

“우리도 너 올 때까지 운동 없어.”

“그런데 너희는 왜 나온 거야?”

“왜 나오긴. 너 보러 나온 거라니까.”

“나 불러내기 전에 다들 모인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냥 너 보려고 모인 거야.”

“근데 유성아. 배트 가방이 묵직해 보인다? 뭐 좋은 거 들었나 봐?”

야구부실에 들어오자 선수들의 시선이 배트 가방에 꽂혔다.

밖에서 봤을 땐 잘 몰랐는데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온 모양새가 범상치 않았다.

“일단 1학년들하고 2학년들부터 한 줄로 서라.”

“네. 선배님.”

박유성의 말에 1학년과 2학년이 나란히 줄을 섰고.

덩달아 동기들도 한쪽으로 모였다.

“내가 다 챙길 수는 없어서 이것밖에 준비 못 했어.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억울하면 다음 생에는 내 친구로 태어나라. 알았지?”

박유성이 1학년들과 2학년들에게 준비한 건 사인볼이었다.

LA 올림픽 공인구에 대표팀 선수들 사인을 전부 받았다.

“투수들은 투수 사인 받은 거 가져가고, 타자들은 타자 사인 받은 거 가져가. 대표팀이 투수 12명에 타자 11명인 거 알지?”

“타자도 12명 아닙니까?”

“프로도 아닌데 내 사인 받아서 뭐 하려고?”

“그래도 해주십시오, 선배님!”

“선배님 사인도 받고 싶습니다!”

“그럼 원하는 사람만 말해. 해줄 테니까.”

아마추어 특례로 올림픽에 참가한 거라 일부러 사진을 뺐지만 신성 고등학교 선수들에게 박유성은 이번 LA 올림픽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저는 사인 받고 싶습니다!”

“저도요!”

“저도 해주십시오, 선배님!”

모든 후배들이 사인을 해달라고 손을 들자 박유성도 어쩔 수 없이 유성팬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빈 공간에 40년간 써왔던 사인을 휘리릭 갈겨 적었다.

“와, 이게 선배님 사인입니까?”

“왜? 촌스럽냐?”

“아뇨. 엄청 멋있는데요?”

“사인들 중에서 제일 멋집니다.”

“진짜? 이리 줘봐.”

“오오, 뭐야 박유성? 언제 또 이런 사인을 만들었대?”

“내가 말했잖아. 아무나 올림픽 MVP를 받는 게 아니라니까?”

고작 사인 하나에 호들갑을 떠는 선수들을 보며 박유성은 웃음을 삼켰다.

‘좀 물려서 새로 바꿀까 생각했는데 사인은 그대로 가져가야겠다.’

그렇게 1학년과 2학년의 사인볼 증정식이 끝이 나고.

자신의 소개팅을 책임질 3학년들의 차례가 왔다.

“미리 말하는데 선물 가지고 싸우지 마라. 후배들도 안 하는 짓거리 하면 전부 다 뺏는다.”

“걱정 마 유성아. 우린 다 큰 지성인이라 절대 그럴 일 없어.”

“김병욱. 네가 제일 문제야.”

“내가 아니라 태수를 말하고 싶은 거지?”

“너희 둘 다 똑같아.”

장태수와 김병욱에게 다시 한번 눈치를 준 뒤 박유성은 송찬우의 글러브를 꺼냈다.

“지원아. 이게 누구 글러브일 거 같아?”

“나 알아. 이거 찬우 선배님 거야.”

“어떻게 알았냐?”

“왼손잡이 글러브에 검정색이잖아. 이거 찬우 선배님이 경기에 쓰던 거 맞지?”

“그래. 내가 찬우 형 잘 때 몰래 훔쳐왔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자랑하다 잃어버리지 말고 잘 보관해. 그 안에 투수들 사인도 들어 있어.”

박유성이 글러브를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손지원은 바로 받지 않았다.

“네 사인도 해 줘.”

“야, 무슨 친구끼리 사인을 받아.”

“그럼 형이라고 부를게.”

“뭐?”

“야구 잘 하면 형이지. 안 그래요 유성이 형?”

“징그러우니까 저리 꺼져 인마.”

송찬우의 사인 옆으로 자신의 사인을 집어 넣자 손지원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글러브를 받아갔다.

“다음은 동화.”

“혹시 제 글러브에도 사인이 가능하시겠습니까. 형님.”

“넌 선물 준다는 얘기 안 했는데?”

“야, 그러지 마라. 진짜. 내가 임찬기 선배님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알면서 그러냐?”

좌완인 김동화의 롤모델은 국대 좌완 에이스 임찬기.

비록 프로 지명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이지만 그 꿈을 응원하기 위해 임찬기에게도 글러브를 받아왔다.

게다가 추후 문화예술계 쪽에서 일을 하게 된 김동화는 장태수 다음으로 소개팅을 많이 시켜줬다.

“찬기 형이 이 글러브 끼고 꼭 프로에서 만나자더라.”

“진짜? 나한테 줄 거라고 말했어?”

“그럼 내가 이걸 팔아먹으려고 받아왔겠냐.”

“와, 대박. 유성아. 진짜 평생 가보로 간직할게.”

“그건 알아서 하고 나중에 여자나 소개해 줘라.”

“뭐? 우리 누나하고 내 동생은 안 돼 인마!”

“야! 나도 너희 누나하고 동생은 싫거든?”

3선발로 고생한 이영재에게는 베어스 박정우가 쓰던 글러브를 선물했다.

“너 베어스 팬이잖아. 그래서 정우 형 거 받아왔어.”

“진짜 고맙다. 유성아. 이 은혜 꼭 갚을게.”

마지막으로 불펜에서 뛰는 홍유진에게 평소 팬이라던 자이언츠의 수호신, 김재신의 글러브를 꺼내자 홍유진은 눈시울을 붉혔다.

“야, 울지 마 인마. 무슨 글러브 하나 가지고 울어?”

“넌 진짜 최고다. 박유성. 빨리 메이저리그도 정복해 버려라.”

투수들의 선물이 끝나자 장태수와 김병욱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우린 방망이지?”

“우리도 글러브야?”

“닥치고 너희 둘은 제일 뒤로 꺼져. 빨리.”

장태수와 김병욱을 제치고 1번이 된 포수 김산이 잔뜩 기대 어린 얼굴로 다가왔다.

“산아. 넌 뭘 받고 싶냐?”

“나? 솔직히 박경호 선배님 미트.”

“그럴 줄 알고 경호 형 거 뺏어왔다. 이게 가격도 가격이지만 경호 형이 길들이느라 엄청 고생한 거래. 물론 전용으로 쓰는 건 아니고 불펜에서 공 받을 때 쓰는 거야.”

“그게 어디야? 진짜 고맙다 유성아. 나도 힘닿는 데까지 여소 해줄게.”

“역시 김산. 넌 내 마음을 이해할 줄 알았다.”

동기들을 위해 준비한 글러브는 김산의 미트까지였다.

나머지 장태수와 김병욱, 오진욱, 김경준에게는 메이저리그 4인방의 실사용 배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병욱이는 정후 형 방망이.”

“오오오!”

“그리고 경준이가 백호 형 방망이.”

“유성아! 사랑해!”

“병욱이 너는 하선이 형 방망이.”

“예스!”

“그리고 장태수 너는…….”

“나는 현민이 형인 거지? 그렇지?”

“그래 인마. 먹고 떨어져라.”

선수들에게 줄 선물 이외에도 감독님과 코치들에게 줄 선물까지 받아왔지만 그건 지금 꺼내기 뭐해서 다시 봉인시켰다.

그렇게 혹시나 박혔을 미운털을 뽑아낸 뒤에 박유성이 장태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보자고 한 거야?”

“왜긴 왜야. 네 얼굴 못 본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니까 부른 거지.”

“그럼 우리 집에 놀러 오든가.”

“야. 나도 학교 끝나면 센터 가서 보충 훈련하거든? 너희 집 갈 시간이 어디 있냐?”

예전에야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선수들을 굴렸지만.

아마추어 선수들의 혹사 방지 규정이 만들어지면서 해가 떨어지고 나면 나머지 훈련은 자율적으로 진행해야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 선수들의 기본기와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말들이 나오는 상황이지만.

1회차와 2회차 모두 프로에 진출했던 장태수는 나름 열심히 하는 모양이었다.

“너희도 센터 다녀?”

박유성이 다른 선수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내 동기가 박유성이라고 말하려면 우리도 열심히 해야지. 안 그래?”

“네. 저희도 박유성 선배님한테 부끄러운 후배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병욱아. 너부터 좀 열심히 하면 안 될까?”

“야, 박유성. 나 예전의 김병욱이 아니야. U-18 야구 월드컵 이후로 나 다시 태어났어. 나 뉴병욱이야.”

“뉴병욱 같은 소리 하네.”

“진짜야. 태수야 뭐라고 말 좀 해주지 않으련?”

“병욱이도 열심히 하고 있어. 그러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오호, 김병욱?”

박유성이 의외라는 얼굴로 김병욱을 바라봤다.

빈말은 하지 않는 장태수에게 인정받을 정도면 보통이 아니라 엄청 열심히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김병욱은 그 정도로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유성아. 네가 우리를 좀 가르쳐 주면 안 될까?”

“뭐?”

“김석률 수석 코치님 스타즈 가셨잖아. 다른 코치님들이 열심히 가르쳐 주고 계시긴 하지만 솔직히 훈련 분위기가 안 나. 내가 잘하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하고.”

“맞아, 유성아. 네가 우리 좀 가르쳐 줘라. 응?”

“선배님! 가르쳐 주세요!”

“저희도 선배님처럼 야구 잘하고 싶습니다아!”

김병욱을 시작으로 야구부원에 모인 모든 선수들이 한목소리로 말하자 박유성은 귀가 먹먹해졌다.

“알았으니까 다들 조용히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