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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175화 (175/412)

타자 인생 3회차! 175화

23. 라이징 스타(7)

순간 기자회견장에 정적이 감돌았다.

누군가는 농담처럼 저 질문을 꺼낼 거라 예상했지만.

오선 스포츠 홍민호 기자가 기자회견 시작과 동시에 날 선 목소리로 포문을 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유성아. 대답하지 마.”

주장 자격으로 옆에 앉아 있던 김하선이 냉큼 박유성의 팔을 잡았다.

논란을 만들기 위한 질문에는 입을 꾹 다물고 웃어넘기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프로에서 40년을 구른 박유성도 언론을 대하는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저 인간 오랜만이네.’

홍민호 기자는 박유성을 직접 본 게 처음이겠지만 박유성은 홍민호 기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스타는 언론이 만드는 거라는 착각 속에 사는 인간이지.’

언론 친화적인 선수가 대중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력까지 포장이 가능한 건 아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과도한 언론 플레이는 대중의 역풍을 맞기 딱 좋았다.

‘첨단 장비로 선수들의 세세한 움직임까지 전부 체크하는데 뭘.’

지나치게 수치화된 데이터는 스포츠의 근본 취지에 어긋난다는 지적에 따라 구단 내부적으로만 사용되고 있지만.

야구팬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부 데이터를 확인하는 게 가능한 마당에 기자랍시고 저러는 게 꼴사납기만 했다.

그래서 박유성은 그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기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박유성 선수. 기자회견이 처음이라 잘 모르는 거 같은데 제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 대답을 해야죠.”

“기자님. 혹시 저희 올림픽 광탈했나요? 분명 우승하고 금메달 목에 걸었던 거 같은데 저 혼자 꿈꾼 건가요?”

“박유성 선수!”

“그러니까 살살 말씀해 주세요. 무슨 취조받는 것 같잖아요.”

박유성이 능청을 떨자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번 물면 어지간해서는 놔주지 않아 불독이라는 별명이 붙은 홍민호 기자를 상대로 박유성이 농담까지 늘어놓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채팅창 반응도 뜨거웠다.

-곽윤정: 뭐야, 우리 유성이 말도 잘 해!

-송민철: ㅋㅋㅋㅋ 야구9단 한 방 먹었네.

-이글스포레버: 진짜 속이 다 시원하네 ㅋㅋㅋ

-한민국: 그런데 아까부터 야구9단이 누구임?

-조인철: 저 기자 계정이 야구9단임. 기자회견 하기 전에 채팅으로 박유성 까다가 딱 들킴

-안시현: 베팍 인기글 검색해 보시면 나옵니다. ㅋㅋㅋ

-죽어도자이언츠: 저 기자도 대단하네. 기왕 들킨 거 막 나가는 건가?

-주영호: 아마 들킨 줄 모르고 있을걸요?

-성인규: 알면서 저러는 거라면 패기 인정. ㅋㅋㅋ

-황승일 보좌관: 박유성 선수 나중에 은퇴하고 정치해도 되겠는데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던지니까 곧바로 스피커를 공격해 버림. ㅋㅋㅋ

-조인철: 저도 지금 같은 생각 했음. ㅋㅋㅋ 우리 야구9단, 박유성 아마추어라고 깔봤다가 큰코다칠 듯.

-송일화: 그런데 채팅창 현장에서 못 보나요?

-김일호: 못 볼 겁니다. 채팅창 반응을 봤다면 저런 질문 못 하죠. ㅋㅋㅋ

요즘은 스포츠 중계에 실시간으로 채팅이 올라올 만큼 쌍방향 소통이 기본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이번 기자회견장에는 채팅 화면을 볼 수 있는 별도의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다수 기자들은 손에 든 핸드폰으로 채팅 분위기를 살폈다.

“헐, 홍 기자님 큰일 났는데요?”

“뭐가?”

“홍 기자님이 아까 채팅으로 박유성 선수 묻으려고 했대요.”

“뭐? 정말?”

“지금 기사까지 났다는데요?”

“홍 기자 뭐야? 박유성 버릇 잡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진짜 사고 친 거야?”

“박 기자님은 절대 이상한 질문 하지 마세요. 지금 커뮤니티 분위기 장난 아니에요.”

“내가 미쳤어? 홍 기자야 오선 스포츠 믿고 저러는 거고. 우리 같은 중소 매체는 철저하게 민심 따라가야지.”

현장의 기자들은 빠르게 채팅창 분위기를 확인했지만 홍민호 기자는 달랐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한테 놀림을 당했다는 생각에 꽂혀서 주변의 반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박유성 선수. 말장난하지 말고 질문에 대답하세요.”

“죄송한데 질문이 뭐였죠?”

“하아, 지금 다들 이번 올림픽 우승은 박유성 선수 덕분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평정심을 잃은 홍민호 기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리자 박유성도 이내 웃음기를 지웠다.

이 정도 감정이 섞여 있다면 미튜브 생방송을 통해 보는 시청자들도 악의적인 의도라는 걸 느꼈을 터.

이제부터는 편하게 대답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일단 저는 제 생각보다 잘했던 것 같습니다. 안타도 많이 쳤고요. MVP도 받았으니까요.”

“그러니까 박유성 선수도 박유성 선수가 잘해서 우승을 한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제가 잘한 건 사실 같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올림픽 조직 위원회에서 아무에게나 MVP를 주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지금 말장난하는 겁니까?”

“제가 잘한 건 맞는데 저 혼자 잘했다고 우승을 했을까요? 저는 투수가 아니라 야수입니다. 찬우 형과 찬기 형, 일웅이 형, 정우 형, 우현이 형, 성찬이 형, 영민이 형, 태규 형, 영준 선배님, 필용 선배님, 재신이 형, 규진이 형까지 이 악물고 던져서 틀어막아 주지 않았다면 전승 우승 못 했을 겁니다.”

박유성이 대표팀에 합류한 투수들을 전부 열거하자 호명당한 선수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표팀 막내이기 이전에 이번 올림픽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박유성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울컥하는 감정이 치민 것이다.

“저도 커뮤니티 글 봤습니다. 제가 막내인데 잘하니까 예쁘게 봐주시는 분들이 과하게 칭찬해 주시는 거 알아요. 그런데 그분들도 이기니까 좋아서 그러시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분들이 설마 야구가 단체 스포츠인 걸 모르실까요?”

“그래서 본인도 커뮤니티 의견에 동감한다는 겁니까?”

“저 지금 누구하고 얘기하나요?”

“박유성 선수!”

“하선이 형. 제 마이크 안 나오는 거 같은데 바꿔주세요.”

박유성이 또다시 능청을 부리자 홍민호 기자가 발끈했다. 하지만 홍민호 기자에게 주어진 질문 시간은 지난 지 오래였다.

“홍 기자님. 박유성 선수가 충분히 대답을 한 것 같으니까 일단 앉아 주시고요. 다른 기자님의 질문을 받겠습니다.”

박유성의 입담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배연석 과장이 냉큼 마이크를 돌렸다.

이대로 더 뒀다간 홍민호 기자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오늘의 야구 김세준 기자입니다. 앞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박유성 선수에게 짧게 두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힘든 상대가 누구였는지와 조영준 선수와 홍필용 선수에게만 선배님이라고 부른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세준 기자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영준과 홍필용이 동조하듯 맞장구를 쳤고.

덩달아 기자회견장에 웃음꽃이 터졌다.

“일단 두 번째 질문부터 대답을 하자면 영준 선배님하고 필용 선배님은 투수조 최고참이시거든요. 그래서 예우 차원에서 선배님이라고 한 거지 절대 별로 안 친해서 선배님이라고 한 거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그런데 김하선 선수에게는 형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요?”

“제가요? 아닐걸요? 저 하선 선배님이라고 했는데요?”

박유성이 모르쇠로 일관하자 기자들은 물론이고 채팅창도 자지러졌다.

-조세영: ㅋㅋㅋ 박유성 뭐임? 쟤 뭔데 재밌어?

-야구8단: 대표팀 선수들이 박유성 예뻐하는 이유가 있었네. ㅋㅋㅋ

-채이: 야구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못하는 게 뭐니?

-야인야사: 진짜 저런 막내면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죠.

-홍덕: 그래도 베어스 팬으로서 홍필용 선수 언급해 준 거 너무 고맙습니다. ㅠ.ㅠ

-와치: 홍필용 선수 등판 못 했나요?

-홍덕: 도미니카전에 잠깐 나왔어요. 아마 나온 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ㅠ.ㅠ

-민잔디: 경기 수에 비해 투수가 많았으니까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박유성이 한 명씩 얘기해 줘서 고맙고 기특하네요.

“김하선 선수에 대한 호칭은 제가 잘못 들은 것으로 하고 가장 어려웠던 상대가 누굽니까?”

“솔직히 단 한 경기도 쉬운 경기가 없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모든 경기가 다 결승전 같았어요.”

“그래도 한 팀만 꼽아주신다면요?”

“아무래도 결승전에서 다시 맞붙은 미국이겠죠? 미국 선수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찬우 형만 하더라고요. 그래서 외야수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하. 가까이서 안 봐서 다행이라는 얘기죠?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미국 상대로 두 개의 홈런을 때려냈잖아요?”

“그건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저는 아직 힘과 기술이 부족해서 형들처럼 마음먹고 홈런을 때리지 못하거든요.”

“그럼 속된 말로 얻어걸린 거다?”

“이 자리를 빌려 정직하게 승부해 준 게릿 벌렌더 선수와 크리스 반스 선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박유성의 재치 있는 대답에 만족한 김세준 기자가 앉고.

야구가 좋다 서예림 기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박유성 선수가 이번에 송현민 선수와 같은 방을 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땠나요?”

핀트에 어긋나는 질문에 몇몇 기자들이 헛웃음을 흘렸지만.

정작 박유성은 이때다 싶어 말을 이어나갔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현민이 형이 따로 야구용품을 협찬해 주시거든요. 그것도 현민이 형 협찬사를 통해서 저한테 맞는 제품으로 보내주세요. 그 덕분에 U-18 야구 월드컵에서도, 이번 올림픽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장비발이다?”

“솔직히 큰 도움이 됩니다. 고사양 게임 할 때 그래픽 카드 사양에 따라 체감이 다른 것처럼요.”

“송현민 선수가 다른 조언 같은 거 많이 해줬나요?”

“현민이 형뿐만 아니라 선배님들이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습니다. 하선이 형은 막내니까 씩씩하게 하라고 조언해 줬고 백호 형하고 정후 형은 제가 숨만 쉬어도 잘한다고 칭찬해 줬습니다. 병규 형하고 준수 형은 프로에 가면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알려줬습니다. 영완이 형하고 종률이 형은 웨이트 쪽으로 많이 알려주셨고요.”

“몇몇 선수가 빠진 것 같은데요?”

“경호 형하고 경석이 형은 투수의 심리 같은 걸 많이 알려주셨어요. 덕분에 안타를 많이 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찬희 형은…… 보셨잖아요? 찬희 형 아니었다면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는 그 장면들이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박찬희가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다른 선수들도 박유성이 호명해 준 것에 흐뭇함을 드러냈다.

“자, 지금 계속 박유성 선수에게만 질문이 몰리고 있는데요. 박유성 선수도 숨을 돌려야 하니까 다른 선수들에게도 질문을 부탁드립니다.”

배연석 과장이 교통정리에 나선 덕분에 박유성도 한참 만에 등받이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그러면서 홍민호 기자 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 앉아 있던 민병규가 자신의 핸드폰을 쓱 하고 내밀었다.

[오선 스포츠 홍민호 기자. 타인 계정으로 박유성 저격하다 들통나.]

‘가지가지 하시네.’

뒤늦게 정황을 알게 된 박유성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앞선 회차 때 거들먹거리는 게 얄미웠는데 이렇게라도 한 방 먹여서 속이 다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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