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172화 (172/412)

타자 인생 3회차! 172화

23. 라이징 스타(4)

2

“박유성이다!”

“나왔다!”

게이트가 열리고 송현민과 박유성이 나란히 나오자 기자들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팬 서비스 좋기로 소문난 송현민조차 미간을 찌푸렸지만 박유성은 씩 웃으며 모든 상황을 즐겼다.

‘크으, 이 맛에 회귀하는 거지.’

1회차와 2회차를 통틀어 귀국 날 이렇게 환대받았던 적이 있던가.

국제 대회에서 항상 고만고만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뜨거운 관심을 받는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송현민은 그런 박유성이 정신을 못 차린다고 여겼다.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알았어요.”

“뒤처리는 삼촌이 해줄 거니까. 내 말 듣고 있는 거지?”

“알았다니까요?”

자신을 애 취급 하는 송현민이 어이없었지만, 박유성은 송현민을 따라 움직였다.

공윤경 기자가 제보한 것처럼 자신을 노리는 에이전트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건네는 말에 웃고 악수하는 사진이 찍혔다간 그걸 빌미로 어떻게든 계약하려 들 터.

‘너무 잘나가도 골치 아프다니까.’

박유성은 우쭐해지려는 감정을 힘겹게 억눌렀다.

그렇게 야구 대표팀을 비롯해 올림픽 선수단 전원이 밖으로 나오자 다시 한번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미리 마련된 기자회견장에서 단체 기자회견이 있을 예정입니다. 언론관계자분들은 그쪽으로 이동해 주세요.”

적당히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한 선수촌 관계자가 장소 이동을 주문했다.

야구 대표팀도 대통령이 참석하는 전체 기자회견 때 잠시 자리를 지켰다가 신성 호텔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브리핑 룸 안에 들어가자 먼저 들어온 선수들로 바글바글했다.

특히나 구기 종목 일정이 후반기에 몰린 탓에 덩치 큰 선수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야 하는 촌극이 펼쳐졌다.

그 와중에도 민병규는 썸을 타는 한소정 쪽으로 다가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저쪽으로 가자니까?”

“형. 적당히 해요. 그러다 진짜 소문난다니까요.”

“어차피 잠깐 있다 가는 거잖아. 너는 몰라도 우리는 바로 시즌 시작이라 만날 시간이 없어.”

“어휴. 진짜. 알았어요. 가요. 가.”

혼자 가기 머쓱했던 민병규는 기어코 박유성을 끌고 갔고.

그런 박유성을 따라 야구 대표팀 선수들이 줄줄이 횡으로 이동했다.

민병규의 꿍꿍이를 알아챈 한소정도 막내인 민지혜를 끌어들였다.

“지혜야, 옆으로.”

“네?”

“옆으로 가라고.”

“네.”

민지혜는 작년 겨울 프로에 입단한 신인 선수였다.

189㎝의 키에 점프가 좋고 몸이 날렵해서 배구 팬들 사이에서는 제2의 강연경이 될 재목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센터와 레프트를 오가며 여자 배구가 동메달을 따는 데 크게 일조했다.

배구 팬들은 야구에 박유성이 있다면 배구에는 민지혜가 있다며 자랑스러워할 정도.

하지만 그런 민지혜도 한소정 앞에서는 까마득한 막내일 뿐이었다.

그렇게 여자 배구 선수들이 자리 잡은 뒷열로 다가가는 데 성공한 민병규는 슬쩍 손을 뻗어 뒷짐을 지고 있던 한소정의 손을 잡았고.

한소정도 티 내지 않고 민병규와 손가락 스킨십을 나누었다.

‘어휴. 저렇게 좋을까?’

그 모습이 한심스러워서 살짝 미간을 찌푸렸는데 저만치 서 있던 기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러다 오해를 사겠다 싶은 박유성이 앞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한소정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한소정 선수. 팬이에요.”

“어머, 정말요? 저도 박유성 선수 팬이에요. 누구와는 달리 야구 정말 잘하던데요?”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끝나고 사인 한 장만 해주실래요?”

“사인이요? 좋죠.”

“실은 제 여동생도 배구를 시작해서요. 한소정 선수하고 여기 민지혜 선수 사인을 받아 가면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말을 하면서 박유성은 구석 쪽으로 눈을 찡긋거렸고.

그쪽에 선 기자들의 시선을 느낀 한소정도 냉큼 손을 풀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빠도 박유성 선수 사인받아 오라고 난리였는데 그럼 우리 조금 이따가 만나서 사인 교환할까요?”

“기왕이면 유니폼 교환이 낫겠죠?”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지혜 너도 좋지?”

“네? 아, 네.”

“그럼 조금 이따가 병규 형하고 넷이서 봐요. 병규 형이 한소정 선수가 이상형이래요.”

박유성의 말에 한소정이 당황한 척 민병규를 바라봤고.

한소정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 민병규도 입이 찢어졌다.

그 모습에 몇몇 기자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그래. 기왕 걸릴 거 이 스토리로 가자. 그래야 나중에 욕을 안 먹지.’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당초 목표를 초과 달성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이후 20년 만이고 도쿄 올림픽 이후 7년 만의 야구 종목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만.

애석하게도 민병규의 올림픽 성적은 썩 좋지 않았다.

민병규뿐만 아니라 야구 대표팀 선수들 중에 3할 타율을 넘긴 건 박유성과 송현민, 단 두 명뿐이었다.

기정후와 감백호, 김하선은 말 그대로 집중 견제를 받았고.

믿었던 거포 듀오 박준수와 민병규도 삼진만 당하다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민병규와 한소정이 올림픽 전부터 썸을 타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민병규는 물론 한소정까지 같이 욕을 들어먹을 터.

“야.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기자들이 바보예요? 소정이 누나 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 다들 봤는데?”

“그래도 인마 이건 아니지. 우리가 얼마나 오래됐는데?”

“됐으니까 오늘부터 썸탄 걸로 해요.”

“싫어 인마.”

“싫으면 야구를 잘하든가요. 그 성적에 이러고 싶어요?”

“…….”

박유성의 따끔한 한마디에 민병규는 순간 황당해했다.

설마하니 새파란 동생에게 야구 잘하라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 쪽을 힐끔거리는 기자들을 보며 민병규도 이내 정신을 차렸다.

“너 내년에 두고 보자.”

“내년에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인마. 너 그땐 내가 제대로 굴려줄 거야.”

다음번 국가대표 소집 때는 선배 노릇을 제대로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민병규를 향해 박유성이 또다시 팩폭을 날렸다.

“형. 뽑히고 나서나 말해요.”

“뭐 인마?”

“그리고 다음 대회 때 저는 안 뽑힐 건데요?”

이번 올림픽은 세대교체 바람으로 박준수와 민병규를 동시에 선발했지만 내년 초에 있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민병규가 빠지게 될지도 몰랐다.

발목이 안 좋은 감백호가 합류하게 되면 지명타순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고.

김하선도 1루수로 기용하며 체력을 관리해 줄 시점이 왔기 때문이다.

민병규의 좌익수 기용이 가능하다면 또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난 이상 대타 말고는 쓰임새가 애매한 민병규를 굳이 뽑을 이유가 없었다.

‘나도 입단만 했으니까 절대 안 뽑을 테고.’

살짝 삐친 민병규의 엉덩이를 툭툭 때리며 박유성은 표정 관리를 시켰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앙탈을 부리던 민병규도 대통령이 공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냉큼 자세를 바로잡았다.

잠시 후.

“대통령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열린 문을 통해 김한국 대통령이 들어왔다.

“어이구, 우리 선수들. 고생 많았습니다.”

기자회견장을 가득 채운 기자들을 쑥 둘러본 뒤 김한국 대통령은 앞줄에 선 선수들부터 차례차례 악수를 권했다.

박유성은 내심 앞줄만 하고 끝내길 바랐지만.

김한국 대통령은 지그재그로 선수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기어코 박유성의 앞에 섰다.

“야구 대표팀 박유성 선…….”

“알아요. 알아. 대한민국에서 박유성 선수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선수들을 소개하던 문체부 직원의 말을 자르며 김한국 대통령이 박유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박유성입니다.”

“그래요. 야구 잘 봤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체구가 작네요?”

김한국 대통령이 박유성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TV 중계를 통해 봤을 때는 그 어떤 선수들보다도 커 보였는데 실제로는 좌우에 선 민병규나 박준수는 물론이고 바로 앞에 선 여자 배구 선수들보다 작게 느껴졌다.

“우리 박유성 선수. 내가 보약 한 첩 해줘야겠어요.”

“네. 문체부에서 따로 챙기겠습니다.”

생색내듯 내뱉은 김한국 대통령의 말에 문체부 직원이 냉큼 고개를 숙였다.

보통은 ‘감사합니다’라는 대답을 하고 끝냈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박유성은 달랐다.

가뜩이나 대통령이 자신을 보러 온 거라는 말들이 나도는 상황에서 혼자 보약을 챙겨 먹었다간 괜한 구설수에 오를 터.

“대통령님.”

“나한테 할 말 있어요?”

“메달을 떠나 여기 있는 모든 선수들이 이번 올림픽을 위해 죽어라 노력했습니다. 오히려 저는 운 좋게 합류한 케이스라서요. 저만 보약 챙겨주시는 거라면 못 받을 것 같습니다.”

“박유성 선수!”

박유성의 되바라진 말에 문체부 직원이 눈치를 줬고.

그런 문체부 직원을 말리며 김한국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유성 선수가 나보다 낫네요. 내가 큰 실수를 할 뻔했어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불쾌는 무슨. 잘했어요. 그럼 내가 이번 올림픽에 출전한 모든 선수들에게 보약을 선물하면 박유성 선수도 받아줄 거죠?”

“모든 스태프들까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부 받는 거라면 저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하고 약속 한 겁니다?”

“넵. 대통령님.”

김한국 대통령이 옆쪽으로 지나가자 숨을 참고 있던 민병규가 박유성을 보며 말했다.

“야, 너 장난 아니다?”

“뭐가요?”

“어떻게 대통령한테 그렇게 말하냐?”

“내가 틀린 말 했어요?”

“아니, 틀린 말은 아닌데……. 암튼 대단해 박유성. 인정한다.”

김한국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을 하는 박유성의 모습에 민병규도 서운한 감정을 털어냈다.

야구 종목에서 20년 만에 금메달을 땄지만 김한국 대통령이 따로 말을 건네며 관심을 가진 건 박유성뿐이었다.

본래 이번 올림픽이 끝나고 한소정과의 연애 사실을 공개하려 했던 민병규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연애하느라 올림픽 죽 쒔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르니까…….’

뒤늦게 박유성이 자신을 생각해 줬다는 걸 깨달은 민병규가 박유성의 엉덩이를 꽉 움켜 쥐었고.

박유성도 자연스럽게 팔꿈치를 휘둘러 민병규의 늑간을 마사지해 주었다.

선수단 전체와 인사를 마친 김한국 대통령은 고생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한 번 쳐달라는 말을 남기고 쿨하게 퇴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전체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기자회견이 이어졌다.

“참고로 야구 대표팀과 배구 대표팀, 축구 대표팀은 별도의 기자회견이 마련되어 있으니까 선수들 개별 질문은 그때 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수촌 관계자의 말에 기자들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저기서 금메달 딴 거 야구밖에 없지 않아?”

“그러게. 나머지 선수들한테 무슨 질문을 하라고?”

이번 LA 올림픽은 1차와 2차, 3차로 나누어 귀국 일정이 잡혔다.

예전에는 메달을 딴 선수들이 올림픽 끝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난 올림픽부터 메달 획득 여부와 상관없이 일정이 끝난 선수들은 순차적으로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야구를 제외한 금메달리스트들은 전부 입국한 상태였다.

마땅히 질문거리가 없었던 기자들은 선심 쓰듯 각 종목의 대표 선수들에게 하나씩 질문을 던졌고.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도 눈치껏 짧고 간략하게 답을 하면서 전체 기자회견은 두 시간 만에 끝이 났다.

“자, 이제 신성 호텔로 이동하겠습니다.”

야구 대표팀 관계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송현민이 다시 박유성을 낚아챘다.

“어디 갔었어? 내 옆에 있으라고 했잖아.”

“병규 형한테 끌려갔어요.”

“아무튼 민병규 진짜.”

이맛살을 찌푸리던 송현민은 삼촌이자 에이전트인 송광철에게 다가갔다.

“삼촌. 유성이 짐도 챙겼죠?”

“그래. 따로 차에 실어놨다.”

“나중에 유성이한테 보관료 받아요.”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고. 유성이 너 이번에 포상금 엄청나게 나오겠더라?”

송광철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포상금을 받는 거야 다 똑같지만 박유성은 거기에 추가로 한국 야구 협회 포상금까지 받게 됐다.

하지만 박유성은 송광철의 고마움을 보관료 따위로 퉁 치고 싶지 않았다.

“계약하면 보관료 안 내도 되는 거죠?”

“……뭐?”

“현민이 형이 그러던데요? 광철 아저씨 잔소리 심한 거 빼고는 완벽하다고. 그러니까 제 에이전트도 맡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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