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65화
22. 어메이징 썬(9)
“후우…….”
홈플레이트 뒤쪽 관중석을 올려다보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던 크리스 반스가 이내 에릭 지터 감독에게 공을 내밀었다.
그러자 경기장을 가득 메운 6만 관중들이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쳐주었다.
비록 추가 실점은 했지만 6회 1사까지 9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대한민국 타선을 꽁꽁 틀어막았던 크리스 반스의 호투를 인정한 것이다.
-미국 대표팀의 에이스, 크리스 반스 선수가 마운드를 내려갑니다.
-아직 투구수는 많지 않았는데요. 에릭 지터 감독이 적절한 시점에 교체 카드를 꺼내 든 것 같습니다.
-오늘 5와 1/3이닝 동안 총 20명의 타자를 상대하면서 절반에 가까운 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웠는데요.
-평소 크리스 반스 선수의 레퍼토리와는 달랐지만 크리스 반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피칭이었습니다.
-지금 불펜에서 크리스 윈터 선수와 아담 로블스 선수가 몸을 풀고 있는데요. 누가 나올까요?
-다음 타자가 좌타자인 박준수 선수지만 그다음 타자가 좌투수에게 강한 김하선 선수 아니겠습니까? 김하선 선수 타석까지 고려한다면 아마 아담 로블스 선수가 나올 것 같습니다.
잠시 후.
불펜 문이 열리고 이선철 해설위원의 예상대로 아담 로블스가 나왔다.
“준수야!”
크리스 윈터를 예상했던 이병구 타격 코치가 다급히 박준수를 불러 전략을 수정했다.
그사이 박유성은 이온 음료로 목을 축이며 강기태 감독 쪽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박유성의 속내를 눈치챈 이병구 타격 코치가 강기태 감독에게 다가왔다.
“감독님. 경석이하고 종률이 내보내실 겁니까?”
“이제 겨우 2 대 0인데 걔들을 어떻게 내보내?”
“유성이가 혹시 교체당할까 봐 눈치 보고 있습니다.”
“유성이가?”
강기태 감독이 옆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자 박유성이 냉큼 그라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은 별걱정을 다 해. 유성이 빼면 수비를 어떻게 하라고?”
“병규 좌익수 넣고 정후 중견으로 돌리면 가능이야 하죠.”
“그러다 점수 내주면 이 코치가 대신 욕먹을 거야?”
“에이. 선수 교체에 대한 책임은 감독님이 지시는 거죠.”
히죽 웃는 이병구 코치를 보며 강기태 감독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영완이 내보낸 것 때문에 그래?”
“그럴 리가요.”
“정말 다른 뜻 없었어. 번트 작전은 영완이가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강기태 감독은 사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많은 득점 루트를 두고 스퀴즈 플레이를 강행했다는 것 자체가 사심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유성이 덕분에 한시름 놓았으니까 마지막 타석은 챙겨주시죠.”
“교체 안 한다니까?”
“그리고 지금 유성이, 안타 빠진 사이클링 히트입니다.”
“뭐?”
“안타 하나만 치면 사이클링 히트라고요.”
강기태 감독이 다급히 기록지를 살폈다.
1회에 솔로 홈런을 시작으로.
3회 2사 이후 2루타를 때렸고.
6회 선두타자로 나와 3루타를 쳤다.
히트 포 더 사이클에서 남은 건 가장 쉬운 안타뿐.
“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뻔했네.”
“유성이 교체하실 생각이셨다고요?”
“그게 아니라 감독이 되어서 이런 것도 못 챙기고 있었다고.”
“아까 작전은 실패했지만 유성이가 사이클링 히트 달성하면 언론들이 좋아할 겁니다.”
“이 친구가? 내가 뭐 언론 때문에 이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기태 감독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는 올림픽 대표팀의 경기력 논란에 두통약을 달고 살았다.
선수로서 15년을 뛰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트윈스와 타이거즈 감독을 거치며 독이 든 성배도 잔뜩 마셔봤지만 국가대표팀 감독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언론에서는 올림픽 은메달을 확정 지은 만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장기 계약을 할 거라고 떠들어대고 있지만.
정작 강기태 감독은 귀국하는 즉시 사임을 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강기태 감독의 속앓이를 누구보다 잘 알다 보니 이병구 타격 코치도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선이 타석 끝나면 종률이 투입하시죠. 수비 보강이니까 그 정도는 다들 이해해 줄 겁니다. 그리고 경석이는 마지막 이닝 때 바꾸시죠. 지금 분위기상으로는 재신이나 규진이가 마무리를 지어야 할 테니까 미리 불펜으로 보내서 몸을 풀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올림픽 24인 엔트리 중에 타자는 12명.
벤치 선수 3명 중에서 백영완을 투입했으니 이종률과 나경석만 투입하면 모든 타자들이 결승전을 경험하게 된다.
“나쁘진 않은데…… 규진이는 랜더스잖아?”
“그럼 규진이를 먼저 내고 9회를 재신이에게 맡기시죠. 재신이가 영완이와 같은 자이언츠니까 재신이가 잘 막아주면 영완이도 면피를 하게 될 겁니다.”
“흠…….”
강기태 감독이 고민하던 그때.
따악, 하는 파열음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아아, 큽니다! 이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건 넘어간 것 같은데요?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우익수가…… 타구를 포기합니다. 홈런! 대한민국의 4번 타자 박준수 선수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진가를 발휘해 냅니다!
이번 대회 내내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던 박준수가 투런 홈런을 작렬하자 강기태 감독과 이병구 타격 코치는 서로 만세를 부르며 부둥켜안았고,
“유성아아아!”
국가의 또 다른 부름을 받기 직전에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 백영완은 박유성을 끌어안았다.
“고맙다. 진짜 고맙다.”
“알았으니까 좀 놓아주세요.”
“유성아, 이 자식! 형이 다음에 아들 낳으면 무조건 네 이름으로 짓는다. 정말이야!”
“알았다니까요.”
1 대 0이었던 팽팽한 점수 차이가 단숨에 4점으로 벌어지자 에릭 지터 감독도 반쯤 경기를 포기했다.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역대 최강이라는 선수들을 데리고 고작 은메달에 만족해야 한다는 게 씁쓸했지만.
올림픽을 이벤트 경기쯤으로 생각하고 참가한 선수들에게 헌신적인 플레이를 요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 에릭 지터 감독은 대한민국 대표팀과 보폭을 맞췄다.
-미국 대표팀에서 또다시 투수를 교체합니다. 크리스 윈터 선수가 내려가고 앤드류 커프 선수가 나옵니다.
-미국 대표팀도 이대로 경기를 내줄 수는 없을 테니까요. 뒤늦게 총력전을 펼치는 분위기입니다.
강기태 감독은 임찬기에 이어 6회에 김일웅, 7회에 신우현, 8회에 정규진을 등판시켰고.
이에 질세라 에릭 지터 감독도 6회에 아담 로블스와 크리스 윈터를 투입한 뒤에 7회에 아메리칸 리그 타이거즈에서 뛰고 있는 앤드류 커프를 내세워 삼자범퇴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어진 8회 말.
대한민국의 마지막 공격이 될 수도 있는 이닝에 박유성이 선두 타자로 나오자 에릭 지터 감독은 다시 한번 마운드를 방문했다.
-에릭 지터 감독이 나왔는데요. 이번에도 투수 교체일까요?
-지금 불펜에 캐빈 거스 선수와 제이슨 힐 선수가 몸을 풀고 있는데요. 두 선수 중에 누가 나올지 궁금해지네요.
캐빈 거스는 내셔널리그 자이언츠에서 셋업 맨으로 뛰고 있는 우완투수.
최고 구속 98mile/h(≒157.7㎞/h)의 빠른 공으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스타일이었다.
반면 아메리칸 리그 트윈스 소속 제이슨 힐은 다양한 변화구를 던지는 좌완투수였다.
박유성은 내심 캐빈 거스가 나오기를 바랐다.
1997년생으로 서른하나인 캐빈 거스는 전성기의 끝자락에 있는 투수였다.
포스팅으로 최대한 빨리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 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다.
반면 2004년생인 제이슨 힐은 5년 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도 미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기왕이면 캐빈 거스를 상대로 히트 포 더 사이클을 완성시키는 게 낫겠지.’
하지만 에릭 지터 감독은 지고 있는 경기에 미국 대표팀의 마무리 투수나 다름없는 캐빈 거스를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제이슨을 올려요.”
더그아웃을 나서기 전 에릭 지터 감독은 마크 코헤인 수석 코치에게 교체 선수를 통보했다.
그리고 제이슨 힐을 기다리며 앤드류 커프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크 코헤인 수석 코치가 마운드 쪽으로 다가왔다.
“감독님. 캐빈이 나가겠다고 합니다.”
“캐빈이요?”
“무조건 썬을 상대해야겠다는데 어떻게 하죠?”
순간 에릭 지터 감독은 웃음이 터졌다.
실책으로 한 점을 더 내준 이후로 마운드에 올라오는 투수들마다 똥 씹은 얼굴이었는데 미국 대표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캐빈 거스가 의욕적으로 나설 줄은 미처 몰랐다.
“캐빈으로 갑시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잠시 후 불펜 문이 열리고 캐빈 거스가 나오자 조용하던 다저스 파크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뭐야? 캐빈이잖아?”
“캐빈이 왜 나오는 거야? 지고 있잖아!”
“에릭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경기 결과에 화가 난 관중들과 자이언츠 팬들은 느닷없는 캐빈 거스의 등판에 짜증을 냈지만.
대다수의 관중들은 캐빈 거스를 반겼다.
에릭 지터 감독이 경기장을 찾아 준 야구팬들을 위해 팬서비스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중계진도 캐빈 거스의 등판에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을 대비해 몸을 풀고 있었던 캐빈 거스가 마운드를 물려받습니다.
-만약에 9회에서 역전을 시키지 못하면 오늘 경기는 이대로 끝이니까요. 추가 실점을 막기 위해 캐빈 거스가 올라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썬과의 승부가 기대되는데요. 썬은 오늘 안타가 빠진 히트 포 더 사이클을 기록 중입니다.
-캐빈 거스를 상대로 안타를 친다면 썬이 이번 올림픽의 MVP를 받는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겁니다.
-설사 안타를 치지 못한다 해도 MVP가 유력하죠. 썬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오늘 경기에서 한국이 4 대 0의 리드를 가져가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박유성을 올림픽 MVP라 추켜세우면서도 미국 중계진은 캐빈 거스가 박유성을 잡아 줄 거라 믿었다.
크리스 반스는 이상하리만치 박유성에게 약했지만.
내셔널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인 캐빈 거스라면 박유성을 여유롭게 잡아내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단순히 경력만 따지자면 박유성이 캐빈 거스보다 한참 더 길었다.
‘캐빈 거스가 메이저리그 8년 차쯤 됐나?’
방망이를 어깨에 걸치며 박유성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캐빈 거스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몸쪽으로 포심 패스트 볼을 붙였다.
-97mile/h(≒156.1㎞/h)의 빠른 공이 들어왔습니다. 원 볼.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난 공이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잘 골라냈습니다.
-캐빈 거스 선수가 곧바로 2구를 준비합니다. 또다시 몸쪽! 이번에는 95mile/h(≒152.9㎞/h)이 찍혔습니다.
-이번 공은 투심 패스트 볼이었는데요. 스트라이크 존에 걸친 것처럼 보이는데 구심이 잡아주질 않았습니다.
“후우…….”
구심의 판정 덕분에 볼카운트가 유리해진 박유성은 길게 숨을 골랐다.
원 스트라이크 원 볼이라면 유인구까지 머릿속에 그려야겠지만.
투 볼 상황에서 캐빈 거스쯤 되는 투수가 또다시 볼을 던지지는 않을 터.
몸쪽으로 들어오는 공은 가볍게 때려내고 바깥쪽 공은 흘려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후앗!
캐빈 거스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또다시 몸쪽으로 날아들었다.
‘빠른 공!’
직감적으로 포심 패스트 볼이라는 걸 알아챈 박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고.
따악!
경쾌한 파열음을 내며 방망이에 부딪친 공은 깊숙이 수비를 하고 있던 2루수 브룩 로우의 옆공간을 꿰뚫고 내야를 빠져나갔다.
-안타입니다! 박유성 선수가 올림픽 결승 무대에서 히트 포 더 사이클을 달성합니다!
-박유성 선수 정말 대단하네요. 이러니 칭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후속타 불발로 추가 득점은 나오지 않았지만.
박유성이 마지막까지 분위기를 끌고 다닌 덕분에 7년 만에 열린 야구 올림픽 결승은 대한민국 대표팀의 4 대 0 완승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박유성은 올림픽 야구 MVP와 함께 야구 인생에 없었던 첫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