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63화
22. 어메이징 썬(7)
그 시각.
신성 그룹 신상욱 회장도 흐뭇한 얼굴로 TV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오늘도 박유성이가 한 건 할 거라고 했잖아!”
신상욱 회장의 큰소리에 박원호 과장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금메달을 다투는 결승전이고 박유성에 대한 전략 분석이 이루어진 만큼 앞선 경기들처럼 활약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 전망했는데 그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이번에는 점수 뽑겠지?”
“무사 3루 상황이니까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까 기정후도 도루를 해야 했어. 쓸데없이 희생 번트를 대게 하니까 점수가 안 나잖아.”
앞선 5회 말.
선두타자 기정후가 크리스 반스의 초구를 밀어 쳐 3유간으로 빠지는 안타를 때려냈다.
사실상 먹힌 타구였지만 코스가 좋았고.
기정후가 전력 질주를 해서 1루를 밟으며 오늘 경기 처음으로 선두타자가 출루하게 됐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은 그 기회를 살려내지 못했다.
7번 타자 민병규의 희생 번트로 기정후를 2루까지 보내는 데 성공했지만 8번 타자 박경호와 9번 타자 박찬희가 연속 삼진을 당하면서 안타를 부르짖던 신상욱 회장을 기운 빠지게 만들었다.
“그래도 6회에 바로 불펜을 가동하는 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박원호 과장이 강기태 감독을 두둔하듯 말했다.
그 역시도 강기태 감독의 희생번트 작전이 아쉬웠지만.
미국 대표팀에게 분위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 타이밍 빠르게 투수를 교체한 건 칭찬해 주고 싶었다.
“아무튼 이번에는 꼭 점수를 내야 해. 한 점 차이는 언제 뒤집힐지 몰라.”
“회장님. 진정하시고 편하게 보십시오.”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이러다 막판에 뒤집혀 봐. 그럼 그 불똥이 어디로 튈 것 같아?”
“트레이드가 무산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협회 놈들 몸 사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정식으로 발표하기 전까지는 절대 마음 놓아서는 안 돼. 그러니까 오늘 경기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한용준 비서실장은 프로 야구 협회에서 이미 합의된 사안을 번복하지는 않을 거라 여겼지만 박원호 과장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저도 갑자기 불안해집니다.”
“박 과장.”
“회장님 비위 맞춰 드리려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실장님. 오늘도 세대교체가 성급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는데 여기서 경기 뒤집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언론에서 금메달을 코앞에서 놓쳤다고 난리를 칠 겁니다.”
“이미 양 구단에 트레이드 승인 통보가 가지 않았습니까?”
“승인했다가 여론의 눈치를 보고 취소한 사례도 있습니다. 스타즈에서 박유성 선수를 우선 지명하면 트레이드는 무산되어도 크게 상관없다고 판단할지도 모르고요.”
“그거 봐. 내 말이 맞잖아. 그러니까 한 실장도 간절히 기도해. 여기서 꼭 한 점 내야 한다고.”
그때였다.
-아, 강기태 감독이 지금 더그아웃 밖으로 나오는데요. 아무래도 대타 카드를 꺼내려는 것 같습니다.
장호영 캐스터의 목소리가 TV를 타고 흘러나왔다.
“대타라니? 감백호 차례 아냐?”
신상욱 회장이 깜짝 놀라 박원호 과장을 바라봤다. 그러자 박원호 과장이 자신의 생각을 쥐어짜 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스퀴즈 플레이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스퀴즈? 그냥 플라이만 쳐도 한 점인데 스퀴즈?”
“겸사겸사 수비 강화까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백영완 선수가 우익수로 들어가고 기정후 선수를 좌익수로 돌리면 박유성 선수의 수비 부담감도 줄어들 테고요.”
하지만 프로 야구 원년부터 야구장을 다녔던 신상욱 회장이 그런 뻔한 말에 넘어갈 리 없었다.
“말 같은 소리를 해. 대놓고 번트 대겠다고 타자를 바꾸면 미국 애들이 당해주겠어?”
“그래도 감백호 선수보다는 백영완 선수가 번트를 잘 대지 않을까요?”
“백영완이가 클린업으로 간 지가 언제인데? 자이언츠에서 백영완이 번트 시키는 거 봤어?”
“그게…….”
“아무튼 이럴 때 보면 순 엉터리라니까. 지금 이때다 싶어서 욕먹고 있는 선수 챙기는 거잖아!”
“…….”
신상욱 회장의 날카로운 질책에 박원호 과장도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도 이번 교체는 앞서 나온 희생 번트보다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록 박유성에게 연속 3안타를 얻어맞긴 했지만.
크리스 반스는 5회까지 8개의 탈삼진을 솎아내며 대한민국 타자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나마 크리스 반스의 공에 반응하는 건 감백호와 송현민, 기정후뿐.
나머지 타자들은 공을 맞혀내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이선철 해설위원이 박유성과 더불어 키포인트로 꼽은 김하선 역시 두 타석 연속 삼진으로 물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안타를 칠 가능성이 있는 감백호를 빼고 벤치에 앉아 있던 백영완을 넣었으니 검찰에서 계좌 조사를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백영완이 타석에 들어서자 미국 대표팀 내야수들이 잔디 안쪽으로 들어왔다.
“저거 봐. 저거. 저러는데 무슨 수로 번트를 대?”
“회장님. 조금 진정하시고 상황을 지켜보시죠. 스퀴즈 작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더 문제야. 어떻게든 박유성이 불러들이겠다고 대타까지 썼는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번트를 대야지! 어물쩍거리다 볼카운트 나빠지면 아웃 카운트 하나 버리는 거라고.”
박원호 과장은 속으로 백영완이 어떻게든 스퀴즈를 성공시키길 바랐다.
벤치에 앉아 크리스 반스의 공에 감탄만 하고 있었을 백영완에게 안타를 기대하는 건 욕심이었다.
그저 강기태 감독의 바람대로 1루 쪽이나 3루 쪽에 안전하게 번트를 대서 박유성이 홈으로 뛰어들 시간만 벌게 해줘도 다행이라 여겼는데 신상욱 회장의 말대로 되어버렸다.
-아! 초구 스트라이크. 백영완 선수가 미처 방망이를 가져다 대지 못했습니다.
-감백호 선수를 대신해 백영완 선수를 내보낸 건 작전 수행 능력이 낫다고 판단해서였을 텐데요. 초구를 너무 허무하게 보내 버렸습니다.
-노 볼 원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크리스 반스 선수가 2구를 준비합니다.
-백영완 선수. 번트를 댈 거면 미리 준비를 하는 게 좋습니다. 벤치에서 보던 것보다 크리스 반스 선수의 공이 더 빠르게 날아올 겁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크리스 반스 선수가 공을 던집니다. 이번에는 몸쪽! 백영완 선수가 방망이를 내밀어 봤습니다만 파울이 됐습니다.
-조금 더 일찍 준비를 해야 한다고 얘기를 했었는데요. 이렇게 되면 스퀴즈 작전은 실패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초구에 바깥쪽으로 꺾여 들어가는 슬라이더를 놓친 백영완은 2구째 몸쪽 빠른 공에 방망이를 가져다 댔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뻗어오는 공을 제대로 맞히지 못했고.
방망이 밑동에 걸린 공은 그대로 포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갔다.
“아이고.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어.”
신상욱 회장이 혀를 차댔다.
그래도 내심 작전이 성공하길 바랐는데 번트는 대보지도 못하고 끝나 버렸으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결국 백영완은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슬라이더를 헛치고 더그아웃으로 몸을 돌려야 했다.
-헛스윙 삼진 아웃! 크리스 반스가 오늘 경기 9개째 탈삼진을 잡아냅니다.
-강기태 감독이 해줄 거라고 믿고 내보냈던 건데요. 백영완 선수의 대처가 너무나 아쉽습니다.
“이러면 분위기 이상해지는데.”
3루 베이스로 돌아온 박유성이 쓰게 웃었다.
강기태 감독도 생각이 있어서 대타 카드를 쓴 것이겠지만 그랬다면 일찍부터 백영완을 준비시켜 놓아야 했다.
1 대 0, 한 점 차 살얼음판 리드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타격도 아니고 스퀴즈 플레이를 주문해 버리면 어지간한 베테랑도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현민이 형이 하나 해줘야 하는데…….”
첫 번째 아웃 카운트가 올라갔으니 아직 두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투아웃이 되면 안타나 실책이 나오지 않는 이상 홈을 밟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번 송현민의 타석에서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야 했다.
“손 코치님.”
박유성이 고개를 돌려 3루 베이스 코치로 나온 손시현 수비 코치를 불렀다. 그러자 벤치 쪽을 바라보고 있던 손시현 수비 코치가 냉큼 다가왔다.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현민이 형이 공을 맞히기만 하면 제가 어떻게든 홈을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안 될까요?”
“흠…….”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손시현 수비 코치가 타임을 부르고 더그아웃 쪽으로 다가갔다.
만약 이제 막 성인 대표팀에 합류한 막내가 이런 요구를 했다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엉덩이를 때렸겠지만.
대표팀의 팔방미인 박유성의 부탁이다 보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감독님. 이번에는 유성이한테 맡겨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성이한테 맡기자니?”
“마츠다 유이토가 폭투 던졌던 거 기억하십니까?”
“그때처럼 하자고?”
“크리스 반스는 좌완이라 유성이의 움직임을 전부 체크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현민이가 내야로 타구를 굴려주기만 한다면…….”
박유성을 대신해 손시현 수비 코치가 작전을 제안했고.
앞선 스퀴즈 작전 실패로 난처했던 강기태 감독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해. 크리스 반스가 좌타자들 상대로 바깥쪽 슬라이더를 잘 던지니까 그걸 노리자고. 유성이가 스타트를 빨리 끊으면 타구가 3루 정면으로 가도 해볼 만할 테고. 어때?”
“좋은 생각입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그래. 우리 한 점만 더 따자. 나 이러다 정신병 생길 거 같아.”
강기태 감독의 주문은 다시 이병구 타격 코치를 통해 송현민에게 전해졌다.
“할 수 있지?”
“그럼요. 홈런 치라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맞혀서 내야에 굴리는 건 쉽죠.”
“타구가 뜨면 안 돼. 알지?”
“만약에 잘못되면 다 제가 책임 지겠습니다.”
“욕먹을 생각 말고 찬사받을 생각을 해. 여기서 한 점만 더 따내면 진짜 안정권이다.”
“넵. 코치님.”
타석으로 돌아온 송현민이 3루 베이스 쪽을 바라봤다.
마치 지금 상황에 지치기라도 한 것처럼 박유성은 3루 베이스에 꼭 붙어 있었다.
“짜식. 연기 좋네.”
송현민은 애써 치미는 웃음을 되삼켰다. 그러고는 애써 진지한 얼굴로 크리스 반스를 바라봤다.
“후우…….”
1사 3루에서 송현민을 만나게 된 크리스 반스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타로 나온 백영완이 삼진을 당해준 덕분에 조금 숨통이 트였지만 위기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금만 삐끗해도 3루 주자 박유성이 홈을 파고들 터.
‘여기서 더 점수를 내줄 수는 없어.’
크리스 반스가 단단히 공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바깥쪽 슬라이더 사인이 나오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바깥쪽 승부가 많아졌지만 일단 효과는 좋았다.
언제 날아들지 모를 몸쪽 공의 두려움 때문에 대한민국 타자들이 좀처럼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스트라이크를 잡고 시작하자.’
다시 한번 길게 숨을 내쉬며 크리스 반스는 곁눈질로 박유성의 위치를 체크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베이스에 붙어 있던 박유성이 잠깐 사이에 제법 리드를 가져갔다.
잠깐 견제를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크리스 반스는 이내 송현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날 흔들려는 수작이야. 당해주는 게 바보짓이야.’
제아무리 박유성의 발이 빠르다 해도 이 상황에서 홈스틸을 시도하지는 못할 터.
결국 타자만 잘 막아내면 박유성을 3루에 붙잡아둘 수 있었다.
조금 더 뜸을 들이던 크리스 반스는 박유성을 무시한 채 투구판을 박차고 나갔다.
그 순간.
타다다다다닥!
박유성이 미친 듯이 홈을 향해 내달렸고.
따악!
송현민이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공을 가볍게 건드려 3유간으로 굴렸다.
“젠장할!”
느리게 굴러오는 타구를 향해 유격수 케빈 모랄이 빠르게 달려들었지만 맨손으로 공을 집어 들었을 때는 이미 박유성이 홈을 파고든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