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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162화 (162/412)

타자 인생 3회차! 162화

22. 어메이징 썬(6)

2

재계 서열로만 따졌을 때 신성 그룹과 태산 그룹의 격차는 컸다.

신성 그룹은 대한민국 10대 그룹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반면 태산 그룹은 순위가 점점 밀려 30대 그룹 끝자락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태산 그룹 경영진은 사업 구조상 태산 그룹이 신성 그룹의 위에 서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땅 파서 철근 세우고 공장 돌려 물건 만드는 시대는 지나도 한참 지났기 때문이다.

태산 그룹의 황태자라 불리는 황진우 부회장이 태산 그룹의 모태인 태산 건설이나 캐시 카우라 불리는 태산 유통,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태산 바이오가 아닌 태산 E&C를 총괄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문화 사업을 선도해 종국에는 대한민국의 문화계를 지배하는 것.

그것이 태산 그룹의 목표였다.

이미 영화 산업 쪽은 태산 그룹이 꽉 움켜쥐고 있었다.

HC(Hwang’s Choice) 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 회사를 만들어 제작에 참여하고.

그렇게 만든 작품을 TS 무비(배급사)를 통해 전국 200여 개의 TS 시네마(멀티플렉스 상영관)에 뿌리면서 시장 점유율을 키우다가 이제는 HC 픽쳐(제작사)와 빅마운틴 크리에이티브(연예 기획사)까지 설립해 전방위적인 몸집 키우기에 나서고 있었다.

오죽하면 영화인들이 태산 그룹의 영화 산업 잠식에 우려를 표명할 정도였다.

하지만 황진우 부회장은 영화인들이 뭐라건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영화 산업은 문화 제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에 불과했다.

이미 영화판의 인지도를 발판 삼아 드라마와 게임 업계 쪽으로 발을 뻗은 상태.

“이제 스포츠 쪽 차례인데…….”

황진우 부회장은 어제 올라온 스포츠 스타 관련 보고서를 살폈다.

전략기획실에서는 이번 LA 올림픽을 통해 이미지가 소비되지 않은 뉴페이스들이 대거 등장할 거라 내다봤지만 아직 눈에 띄는 선수는 보이지 않았다.

태권도와 양궁, 펜싱 등 기존에 잘해왔던 종목들만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태산 E&C에서도 사격 최연소 국가 대표인 곽예림을 차세대 스포츠 스타로 키우려 했지만 목표였던 메달 획득은커녕 최악의 성적으로 올림픽을 조기 마감해 버렸다.

“동메달만 땄어도 됐을 텐데…….”

덕분에 곽예림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와 슈팅 게임을 만들자는 기획안이 휴지통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디 마땅한 선수가 없나.”

황진우 부회장이 소파로 자리를 옮겨 TV를 켰다.

그때 화면으로 LA 올림픽 야구 중계방송이 나왔다.

평소 황진우 부회장은 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본래 야구보다는 축구를 좋아했지만 5년 전 11번째 구단 창단 때 신성 그룹의 페이스 메이커 취급을 받은 이후로 가끔 보던 야구 중계 방송도 끊어버렸다.

그래서 곧바로 채널을 넘기려고 했는데.

“1 대 0?”

구석에 적힌 점수가 리모컨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황진우 부회장은 핸드폰을 꺼내 스포츠 담당 본부장이자 사촌 동생인 황석진에게 깨톡을 보냈다.

[황진우 부회장 – 내 방으로.]

잠시 후.

“또 무슨 일인데?”

황석진 본부장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짜증을 냈다.

“회사다.”

“또 무슨 일로 부르셨는데요?”

“난 부회장이고 넌 이사야. 격식 차려.”

“이만큼 차렸음 됐지 회의석상도 아닌데 뭘 더 차리래? 그런데 갑자기 웬 야구? 형 야구 끊었다며?”

황석진 본부장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다 점수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기고 있네?”

“몰랐어?”

“당연히 몰랐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한 트럭인데.”

“그러게 업무 시간에 일을 하라니까 왜 맨날 야근을 하는 거야?”

“낮에는 일하기가 싫은 걸 어떻게 해? 그래서? 지금 야구 같이 보자고 부른 거야?”

“한국이 왜 이기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불렀다.”

“농담이지?”

“진담인데?”

“하아……. 진짜 형이라 때릴 수도 없고 참.”

황석진 본부장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촌지간이긴 하지만 황진우 부회장과는 함께 유학을 다녀왔을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태산 그룹의 후계자 전쟁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황진우 부회장의 옆에 섰을 정도.

하지만 가끔 이런 식으로 불러대는 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이 왜 이기고 있냐고? 한국이 점수를 냈으니까 이기고 있겠지.”

“내가 설마 그걸 모를까?”

“그럼?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 거야?”

“기사를 보니까 성급한 세대교체에 대한 비판 여론이 상당하던데 어떻게 미국을 이기고 있냐는 거야.”

“그야…….”

“미국이 점수를 내줬기 때문이라는 소리 했다간 앞으로 정시 출근이다.”

“부회장님. 치사하게 이러지 마시죠.”

야행성인 황석진 본부장의 출근 시간은 통상 오후 1시 전후.

남들 다 퇴근하고 조용해진 사무실에서 혼자 일하는 걸 즐기는 데다가 새벽녘에 홀로 부엌에서 유명 셰프들의 요리를 따라 만드는 고상한 취미까지 있어서 아침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황석진 본부장에게 정시 출근이란 사표 쓰란 소리나 다름없었다.

“일단 언론에서 떠드는 건 한 귀로 흘려도 좋아.”

“이유는?”

“어떤 회사가 있어. 젊은 인재들로 새 부서를 만들어서 일을 맡겼는데 개개인의 능력은 기대에 못 미쳐.”

“그럼 갈아엎어야지.”

“그런데 이상하게 실적은 나와.”

“그게 가능해?”

“가능하잖아. 형이 지금 그걸 보고 있다고.”

“흠…….”

황석진 본부장이 나름 적절한 비유를 들었지만 황진우 부회장은 쓰게 웃고 말았다.

소설이나 영화도 아니고 개개인의 능력이 떨어지는데 실적이 나온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황석진 본부장이 리모컨을 잡아 들었다.

“어, 박유성이다.”

“누구?”

“박유성 몰라? 요즘 제일 핫한 야구선수.”

“……?”

“와, 형 진짜 야구 안 보는구나?”

“내가 내 입으로 내뱉은 말 안 지킨 적 있냐?”

“대단하다 진짜. 존경스러워.”

“그래서? 박유성이 누구인데?”

“아까 말했잖아. 요즘 제일 핫한 야구선수라고. 어쩌면 저 한 점도 박유성이 만든 건지도 몰라.”

황석진 본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막으로 박유성의 기록이 나왔다.

[홈런(1점) 2루타]

“맞네. 박유성이 홈런 쳤네.”

“홈런?”

“아까 형이 말했잖아. 개인 능력이 떨어지는데 실적이 나오는 게 가능하냐고. 불가능하지. 그런데 특출난 한 명이 있으면 가능해지더라.”

“특출난 한 명?”

“그게 바로 저 녀석이야.”

5년 전 11번째 구단 창단 때 황태산 회장이 공개적으로 물을 먹은 이후 태산 그룹 일원들은 일부러 야구를 멀리했다.

괜히 꼬투리를 잡혔다가 경영권에서 밀려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석진 본부장은 달랐다.

황진우 부회장 밑에서 일하는 지금의 삶에 더없이 만족하다 보니 딱히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쟤가 고등학생이거든? 올림픽 전에 18세 이하 야구 월드컵에 출전했는데 거기서 타격 8관왕을 달성했어.”

“예전에 임대호가 했던 거?”

“그땐 7관왕이었어. 타율에 최다 안타, 타점, 득점, 홈런, 장타율, 출루율까지. 하나 빠진 게 도루인데 박유성이 쟤는 발도 빨라. 도루도 잘해.”

“그래서 도루까지 1위를 했다는 거야?”

“대단하지? 그런데 더 대단한 게 뭐냐면 타율이 10할이야.”

“10할이면…….”

“모든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냈다는 거지. 작년까지만 해도 백업 선수에 불과했는데 어디서 뭐 이상한 걸 먹은 건지 갑자기 미쳐 날뛰는 중이야.”

다른 직원이 비슷한 말을 했다면 정말 도핑을 의심했겠지만.

황석진 본부장의 평소 화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황진우 부회장은 극찬 정도로 받아들였다.

“암튼 이번 타석만 보자.”

황석진 본부장이 다시 리모컨으로 볼륨을 높였다. 그러자 웅얼웅얼 들리던 중계진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크리스 반스 선수가 3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도 볼. 박유성 선수가 꿈쩍을 하지 않습니다.

-슬라이더였는데요. 다음 공을 위해 바깥쪽으로 하나 보여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여기서 안타를 때려낸다면 무사에 주자가 나가게 되는데요.

-아마 그래서 더 신중하게 투구를 하는 것 같습니다.

-투포수의 사인 교환이 길어지고 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타임을 부르고 타석을 빠져나갑니다.

-하하. 정말 영리한 타자입니다. 상대가 시간을 끌 때는 굳이 기다려 줄 필요가 없습니다.

-본인의 리듬은 본인이 지켜야죠.

-그렇습니다. 시간을 끄는 것 자체가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기 위해서인데 거기에 말려들 필요가 없겠죠.

-박유성 선수가 다시 타석으로 들어옵니다. 오늘 대한민국이 때려낸 3개의 안타 중에 2개가 바로 이 박유성 선수의 방망이에서 나왔습니다. 앞선 1회 초에는 선제 솔로 홈런을 날렸고 3회에는 2사 이후에 2루타를 때려낸 바 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크리스 반스가 이내 투구 자세를 잡았고.

뒤이어 투구판을 박차듯 몸을 던졌다.

황진우 부회장의 두 눈이 크리스 반스의 손을 빠져나간 새하얀 공을 좇았다.

그런데 포수의 미트 속에 파묻히기 직전.

따악!

그 공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쳤습니다! 이 타구가 좌중간을 완전히 갈랐습니다!

-3루까지 들어갈 것 같은데요?

-박유성 1루를 돌아 2루로! 2루에서 곧장 3루로! 공 3루로 연결됩니다만 박유성 선수의 발이 더 빠릅니다!

-정말이지 폭풍 질주가 따로 없습니다. 전성기 시절 기종범 선수를 보는 것 같아요.

“어때? 죽이지?”

팝업 슬라이딩으로 멋들어지게 3루를 선점한 박유성을 보며 황석진 본부장이 감탄을 터뜨렸다.

그러자 황진우 부회장이 커진 눈으로 물었다.

“잘하는 거야?”

“누구? 박유성? 쟤가 잘하는 거냐고? 당연하지. 크리스 반스잖아.”

“크리스 반스?”

“작년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 상 투수. 그러니까……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라고. 그런데 3루타를 때려냈잖아. 그럼 엄청 잘하는 거지.”

“그래?”

“아마 올림픽 끝나면 박유성을 광고 모델로 쓰려고 다들 난리일걸? 다른 종목들 전부 다 죽 쒔잖아. 그런데 국내 최고 스포츠인 야구에서 금메달을 따봐. 그걸 어떻게 이겨?”

“금메달?”

“와, 이 형 진짜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이거 결승전이야. 여기서 이기면 금메달이라고!”

“그래?”

“원래는 4강 진출도 힘들다고 했는데 박유성이 혼자서 대한민국 대표팀을 멱살 잡고 끌고 가고 있는 거야. 형이 봤다는 기사들 있지? 그게 다 박유성 때문에 나온 거라니까? 박유성이 대표팀 막내인데 혼자 다 하거든. 그러니까 기자들이 이때다 싶어 물어뜯는 거야.”

리플레이 화면이 나오자 황석진 본부장은 다시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감탄을 쏟아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황진우 부회장은 전략기획실에 메시지를 보냈다.

[황진우 부회장 – 박유성에 대한 정보 1시간 안으로 준비해요.]

가능하면 야구 쪽은 손을 대지 않으려 했지만.

황석진 본부장의 반응을 보니까 이대로 박유성을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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