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161화 (161/412)

타자 인생 3회차! 161화

22. 어메이징 썬(5)

“기가 막히군. 기가 막혀. 어떻게 저 공을 친 거지?”

방금 크리스 반스가 던진 바깥쪽 커터는 회심의 일구였다.

1회 초에 홈런을 얻어맞은 이후 봉인해 놓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꺼내 든 것이다.

풀카운트에 몰린 타자라면 당연히 빠른 공이라 여기고 덤벼들 수밖에 없을 터.

그런데 그 공을 헛치기는커녕 3루 베이스라인 쪽으로 밀어 때려 2루타를 만들어냈다.

“확실히 집중력이 좋은 타자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밸런스가 무너졌지만 공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밸런스가 무너졌다기보다는 일부러 무너뜨렸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스윙으로는 공을 맞히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VIP 룸에 걸린 대형 TV를 통해 같은 장면을 봤지만 레이 케네디 보좌역과 알렉스 노먼 보좌역이 짚은 포인트가 달랐다.

레드삭스에 끈기 있는 타자들을 영입해야 한다고 역설해 온 레이 케네디 보좌역은 박유성의 집요함에 높은 점수를 줬고.

지나친 장타 경쟁이 팀 타선을 망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알렉스 노먼 보좌역은 박유성의 상황 대처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은 같았다.

“그러니까 결론은…… 엄청 잘한다는 거잖아. 그렇지?”

“마운드 위에 서 있는 투수는 크리스 반스입니다. 저희 팀 선수라서가 아니라 크리스 반스를 저렇게 괴롭히는 타자는 처음 봅니다.”

“양키즈의 마크 스테리가 있잖아?”

“마크 스테리도 저 정도는 아닙니다. 선구안이 좋아서 나쁜 공을 건드리지 않지만 크리스 반스를 저렇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는 못할 겁니다.”

“그럼 로비는?”

애런 스와슨 단장이 레드삭스의 3번 타자인 로비 마르티네즈를 소환했다. 마크 스테리의 그림자에 가려지긴 했지만 로비 마르티네즈도 아메리칸 리그 MVP 경쟁을 할 수 있는 타자였다.

그러자 레이 케네디 보좌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비도 아닙니다. 로비는 지나치게 공격적입니다. 요즘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조금 더 인내심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도 타격 스타일만 놓고 보자면 로비 쪽에 가깝지 않아?”

“그렇게 따지면 타석에서의 인내심은 마크 스테리를 닮았습니다.”

“정확하게는 마크 스테리와 로비 마르티네즈의 장점을 두루 갖췄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크 스테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강타자였다.

통산 타율이 무려 3할 3푼에 달했고 연평균 40개 이상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겨 버리는 파워에 시즌당 100개 가까이 볼넷을 골라내는 선구안까지.

큰 덩치 때문에 느릴 수밖에 없는 주력을 제외하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반면 레드삭스의 간판타자 로비 마르티네즈는 시즌 볼넷이 마크 스테리의 4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치고 나가는 걸 선호하는 타자라 볼넷은 적지만 대신 안타 수는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단순히 타격 스타일만 놓고 보자면 박유성은 로비 마르티네즈에 가까웠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힘이 아니라 스윙 스피드로 장타를 만들어내는 게 피부색만 다른 로비 마르티네즈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심 영입하고 싶은 의사를 담아 말을 꺼냈던 건데 마크 스테리의 장점까지 갖췄다고 하니까 더 욕심이 났다.

“그럼 두 사람 다 썬을 영입하는 데 찬성하는 거지?”

“저는 찬성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이 케네디 보좌역과 알렉스 노먼 보좌역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경기를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박유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좌타자를 가장 잘 상대하는 투수로 꼽히는 크리스 반스를 상대로 홈런에 2루타를 때려내는 타자라면 일단은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혀놓고 봐야 했다.

그때 다시 중계 화면이 소란스러워졌다.

-썬이 위대한 질주를 해냈습니다!

-지금 초구에 3루를 훔쳐냈는데요. 조이 패런트가 송구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느린 화면으로 다시 보시죠. 크리스 반스가 키킹을 하기가 무섭게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크리스 반스의 와일드한 투구폼의 허점을 제대로 노렸습니다.

-크리스 반스는 공을 던진 다음에야 썬이 3루로 내달렸다는 사실을 알았는데요. 견제에 완벽하게 실패했다고 봐야 합니다.

-설마하니 2사 이후에 3루 도루를 감행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네요.

중계 화면으로 박유성의 3루 도루 장면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어깨가 좋기로 유명한 조이 패런트를 상대로 단독 도루를, 그것도 3루를 훔쳐냈다는 게 놀라웠는데.

화면을 반복해서 보다 보니까 박유성이 그만큼 확신을 가지고 뛰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크리스가 2루 견제를 했다면 썬을 잡을 수 있었을까?”

“글쎄요. 잠깐 썬의 발을 2루 베이스 쪽에 묶어둘 수는 있겠지만 저 질주는 막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도루를 잘하려면 일단 스타트를 잘 끊어야 하는데 썬의 스타트는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가 딜리버리 타임이 긴 편인가?”

“투구폼이 와일드해서요. 평균보다 조금 더 걸립니다.”

“크리스의 문제가 아니라면 조이의 문제인가?”

흔히들 도루하는 주자를 잡으려면 포수의 팝 타임이 짧아야 한다고 말한다.

팝 타임이란 포수가 포구한 공이 2루 베이스에 도착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의미하는데 이 팝 타임이 2초를 넘어가면 어깨가 약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미국 대표팀의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조이 패런트의 평균 팝타임은 1.88초.

어깨가 좋은 메이저리그 포수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으로 분류됐다.

게다가 3루는 2루보다 직선거리가 짧은 만큼 느린 변화구가 들어오더라도 일단 송구까지는 이루어져야 정상인데.

정작 조이 패런트는 공을 미트에서 제대로 뽑아내지도 못했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고요.”

“복합적?”

“일단 크리스는 썬이 뛸 거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조이 패런트도 딱히 썬을 신경 쓰지 않았고 썬이 리드를 넓히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썬이 발이 빠르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2번 타자가 캄이었습니다.”

“인디언스에서 뛰고 있는 캄을 말하는 거지? 확실히 캄은 까다로운 타자야. 게다가 좌투수의 공도 잘 치잖아?”

“실제로 올해 클리블랜드 원정에서 크리스 반스가 캄에게 적시타를 얻어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경기를 끝낸 게 캄이었어?”

“말씀하신 것처럼 캄은 찬스에 강한 타자입니다. 크리스 반스 입장에서는 주자보다 타자가 더 신경이 쓰였을 겁니다.”

“그래서 타자에게 집중하고 공을 던졌는데 그 공이 하필이면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였습니다.”

“만약에 바깥쪽으로 빠른 공이 들어왔다면 조이 패런트가 어떻게든 3루로 공을 던져 썬을 잡으려 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잡을 수 있었을까?”

애런 스와슨 단장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레이 케네디 보좌역과 알렉스 노먼 보좌역이 이번에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그래도 세이프 판정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썬은 과감하게 리드를 벌렸고 별도의 스킵 동작 없이 곧바로 3루를 향해 내달렸습니다. 3루로 공이 와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거죠. 여기서부터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재밌군, 재밌어.”

애런 스와슨 단장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앞서 보여준 환상적인 타격 쇼에 홀딱 넘어갔는데 수준급 주루 플레이까지 선보이고 나니까 도저히 포기가 되지 않았다.

“어때? 썬이 우리 팀에 온다면 피터의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레드삭스의 1번 타순은 몇 년째 한 명의 타자가 독식하고 있었다.

바로 피터 그렉.

로비 마르티네즈보다 먼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건너온 선수로 투고타저 시대에서 3할이 넘는 통산 타율과 7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최고의 톱타자라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레드삭스의 테이블 세터는 아메리칸 리그 평균 이하로 평가받았다.

피터 그렉과 짝을 이루는 타자들마다 성적이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2번 타자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테스트받은 타자만 열두 명.

비공식적인 테스트를 포함하면 무려 50명이 넘었다.

마이너리그 유망주 랭킹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타자들부터 시작해 다른 팀에서 데려온 타자들까지 가능성이 있다 싶으면 전부 테스트를 했지만.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피터 그렉 다음 타석에 들어서기만 하면 기를 펴지 못했다.

그나마 작년 중반기부터 이적생 제이크 던스가 피터 그렉의 파트너로 뛰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이 체제는 오래 끌고 가기 어려웠다.

제이크 던스가 피터 그렉보다 7살이 많기 때문이었다.

97년생인 제이크 던스는 올해로 서른하나.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제이크 던스의 세부 지표는 작년에 비해 조금씩 떨어져 있었다.

0.266에 10홈런이라는 작년 성적도 커트 라인을 겨우 넘긴 수준인데 올해는 그것보다 못하고 있으니 계속 테이블 세터로 기용하기가 고민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제이크 던스의 완벽한 대체 자원이 나타났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썬이 미국으로 오면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올리실 생각이십니까?”

“2년 정도는 마이너리그에서 뛰게 해야지. 그럼 딱 맞지 않겠어?”

애런 스와슨 단장의 계획에 동의하듯 레이 케네디 보좌역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유성이 프로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 선수 신분이라는 게 걱정이었지만 마이너리그에서 일정 기간 담금질한다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알렉스 노먼 보좌역의 생각은 달랐다.

“제이크 던스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어쩌면 올 시즌이 끝나고 난 다음에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될지도 모르죠.”

“그럼 중간에 다른 대체 선수를 찾으면 되잖아?”

“그러다 그 선수가 잘해 버리면요? 썬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어?”

만약에 제이크 던스가 올해를 끝으로 팀을 떠나고.

새로운 대체 자원이 제이크 던스의 빈자리를 잘 채워 버리면 2년 안에 박유성을 메이저리그로 올리겠다는 애런 스와슨 단장의 구상은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박유성이 경험을 쌓을 동안만 임시로 자리를 맡아줄 선수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

결국 때를 잘 맞춰야 하는데 여차했다간 계약금은 계약금대로 주고 제대로 써먹어보지도 못한 채 다른 구단에 헐값에 팔아넘겨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몰랐다.

“언론에서는 썬의 계약금으로 400만 달러 이상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나 올랐어?”

“그것도 결승전 전에 나왔던 얘기입니다. 결승전이 이대로 한국의 승리로 끝이 난다면 썬의 주가는 더 높아질 겁니다.”

올 시즌 레드삭스의 국제 아마추어 선수 계약 한도는 550만 달러.

400만 달러면 전체의 73퍼센트에 달했다.

여느 때처럼 추가로 보너스 풀을 트레이드해 온다고 해도 최대 800만 달러였다.

그중 절반을 주고 데려온 선수를 마이너리그에서 계속 썩혀둔다면 언론과 팬들이 들고일어날 게 뻔했다.

“썬이 에이전트가 있던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형 에이전시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거야?”

“아직 대회 중인 데다가 썬이 아마추어 신분이라서요. 메이저리그 진출 의사가 있다면 조만간에 에이전트를 선임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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