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60화
22. 어메이징 썬(4)
크리스 반스는 메이저리그에 막 올라왔을 때 언론이 떠들어대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101mile/h(≒162.5㎞/h)의 파이어볼러.
지옥에서 온 사나이.
레드삭스 팬들은 마이너리그를 초토화시키고 올라온 슈퍼 루키를 열렬히 환호했고.
지역 언론도 한목소리로 메이저리그를 깜짝 놀라게 만들 거라 예언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크리스 반스는 혹독한 신고식을 겪어야 했다.
믿었던 빠른 공이 통타당하며 채 5이닝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이후 3경기 연속 조기 강판을 당하자 지역 언론에서 당장 마이너리그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떠들어댔고.
5경기 연속 패배 행진을 이어간 이후로는 조금 더 시간을 줘야 한다던 레드삭스 팬들마저 돌아섰다.
그나마 투수 코치의 조언으로 슬라이더의 비중을 높이면서 7경기 만에 첫 승을 따냈지만.
모두가 열광하던 크리스 반스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첫해 7승 11패에 평균 자책점 3.99라는, 루키다운 성적을 거둔 크리스 반스는 이듬해에도 평범한 피칭을 이어나갔다.
시즌 중반에 5선발에서 4선발로 승격되긴 했지만 평균 자책점은 여전히 높았고(3.75) 빠른 공으로 타자를 압도하지 못했다.
그러다 지금의 투수 코치에게서 커터를 배우면서 크리스 반스의 투수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
2025시즌 불완전한 커터로 14승 8패에 평균자책점 3.15를 찍은 뒤 2026시즌 16승 8패 평균자책점 2.88로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 투표 2위를 기록했으며 지난해에는 17승 5패 2.12라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경쟁자들을 제치고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투수 반열에 올라섰다.
그저 공만 빠르던 루키가 몇 년만에 리그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있었던 건 메이저리그 최고 레벨의 커터를 장착하면서 포심 패스트볼의 회전축을 함께 교정했기 때문이었다.
포심 패스트 볼의 회전이 살면서 타자들과의 힘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고.
육안으로는 포심 패스트볼과 구분하기 힘든 커터의 비율을 높이면서 타자들이 감히 빠른 공을 노리고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 레퍼토리가 다른 타자도 아닌 박유성에게 깨져 버렸다.
첫 타석 때는 커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쳐서 담장 밖으로 날려 버리더니 이번에는 몸쪽 꽉 찬 코스의 빠른 공에 곧바로 방망이가 튀어나왔다.
30경기 이상 등판하는 시즌 중의 한 경기였다면 맞을 걸 각오하고 다시 한번 빠른 공을 던졌겠지만.
전 세계 야구팬들이 지켜보는 올림픽 결승전이다 보니 맞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빠른 공은 안 돼.’
조이 패런트가 바깥쪽 빠른 공 사인을 내자 크리스 반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뒤이어 몸쪽 커터 사인도 마찬가지.
앞서 그 공을 던져 홈런을 얻어맞았는데 다시 던질 수는 없었다.
잠시 고심하던 조이 패런트가 몸 쪽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 사인을 내자 크리스 반스는 투구판에서 발을 빼버렸다.
정면 승부는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박유성을 볼넷으로 내보낼 마음은 없었다.
2사 이후라고는 해도 박유성은 발이 빠른 타자였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4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대니 존슨과 함께 도루 전체 1위를 달리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저 녀석을 속일 만한 사인을 달라고!’
크리스 반스의 속내가 전해졌던지 조이 패런트가 바깥쪽을 파고드는 슬라이더를 주문했다.
‘그래. 이 공이라면.’
앞서 98mile/h(≒157.7㎞/h)의 빠른 공을 보여줬으니 92mile/h(≒148.1㎞/h) 전후의 슬라이더가 바깥쪽으로 날아든다면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 않을 터.
후앗!
박유성이 치지 않기를 바라며 크리스 반스가 힘껏 공을 내던졌지만.
따악!
박유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도망치는 공을 때려냈다.
-이번에도 파울! 볼카운트는 여전히 쓰리 볼 투 스트라이크입니다.
-바깥쪽 슬라이더를 던졌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가볍게 걷어냈습니다.
-헛스윙을 유도할 생각이었다면 조금 더 공이 빠져나갔어야 했을 텐데요.
-박유성 선수를 출루시키기는 부담스러우니까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듯 던진 거 같은데 좋은 판단 같지는 않습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 박유성 선수에게 공 6개를 던졌고 이제 7구째를 던집니다. 이번에는 몸쪽! 어깨높이로 날아든 슬라이더를 박유성 선수가 다시 한번 쳐냅니다!
“저 녀석은 진짜 정체가 뭘까?”
타석 밖으로 한 발 물러나 숨을 고르는 박유성을 보며 민병규가 혀를 내둘렀다.
박유성이 요즘 들어 박준수와 어울려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살짝 거리를 둘까 했는데.
저 대단한 크리스 반스를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니까 도저히 관심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박준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
“뭐긴 뭐야. 스타즈의 예비 슈퍼스타지.”
“아직 입단한 거 아니거든?”
“이미 게임 끝났으니까 포기해. 스타즈에서 절대 포기 안 한다니까 그러네.”
“랜더스는 아직 시작도 안 했거든?”
“시작을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라니까.”
“어우, 짜증 나. 너 저쪽으로 가. 왜 자꾸 내 옆으로 오는 건데?”
“뭐라는 거야. 내가 여기 앉아 있었거든?”
민병규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박준수를 째려보던 그 순간.
따악!
또다시 날카로운 파열음이 났다.
“4연속 파울이라.”
박유성이 몸쪽을 파고드는 슬라이더를 걷어내자 이병구 타격 코치가 이용구 주루 코치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용구 주루 코치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알겠다며 피식 웃었다.
“유성이가 저보다 훨씬 낫습니다. 저는 크리스 반스 공을 걷어낼 자신이 없어요.”
“그래도 한창때는 스무 개씩 파울을 치고 했잖아?”
“파울을 어떻게 스무 개나 칩니까? 제일 많이 던지게 한 게 스무 개였을 겁니다.”
“그게 그거지. 이 코치한테 당한 투수들은 5년 일찍 은퇴한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잖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현역 시절의 이용구는 투수를 괴롭히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작은 체구의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방망이를 짧게 잡고 좁은 스트라이크 존 주변으로 들어오는 공을 전부 걷어내며 투수들의 진을 빼놓았다.
오죽하면 용구 놀이라는 표현까지 생겼을 정도.
일부러 파울을 낸다는 비난을 사기도 했지만.
이용구는 단지 삼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방망이를 휘두른 것뿐이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달랐다.
3-1 이후 나온 네 개의 파울 모두 가져다 맞힌 게 아니라 자신만의 스윙으로 정확하게 때려냈다.
타격에 일가견이 있는 이병구 타격 코치도 박유성이 신기하기만 했다.
“유성이는 확실히 타고났어. 그렇지?”
“엄마 배 속에서부터 야구를 했어도 저렇게 잘하지는 못할 겁니다.”
“권위자가 보기에도 그래?”
“저거 용구 놀이 따라 하는 거 아닙니다. 원래 걷어내는 데 정신이 팔리면 제 스윙을 못 합니다. 그러다 빠른 공이 들어오면 헛스윙이 나고요.”
“알지. 리듬감이 깨지잖아.”
보통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는 스트라이크 존을 최대한 넓게 보며 유동적으로 대응하라고 주문하지만 그게 가능한 타자는 손에 꼽혔다.
타자는 보통 자신만의 리듬으로 타격을 펼친다.
당연하게도 빠른 공이 들어올 때와 느린 공이 들어올 때의 리듬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유성이 투 스트라이크에 몰렸을 때 이병구 타격 코치는 이번 타석은 힘들 거라 예상했다.
제아무리 박유성이라 해도 스트라이크 존을 상하좌우로 넓게 쓰는 크리스 반스의 공에 전부 대처하지는 못할 터.
박경호와 박찬희를 대신해 투구 수를 늘린 것으로 만족해야겠다고 여겼는데.
따악!
5연속 파울 타구를 만들어냈다.
-이번에도 파울! 크리스 반스 선수의 투구수가 점점 늘어갑니다.
-몸 쪽 슬라이더에 이어 바깥쪽 빠른 공이 들어왔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놓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가 지금 이번 타석에서만 10개의 공을 던지고 있는데요.
-크리스 반스 선수도 답답할 겁니다. 스트라이크 존 주변으로 들어오는 모든 공을 전부 얻어맞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볼을 던지면 볼넷으로 출루를 하게 되는 상황인데요.
-지금 커터와 커브를 제외하고 크리스 반스 선수가 던질 수 있는 구종이 다 나왔는데요. 이제부터는 커터를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커브를 던지는 건 위험 부담이 크겠죠?
-장타를 염두에 두고 큰 스윙을 하는 타자에게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박유성 선수를 상대로는 쉽지 않을 겁니다. 박유성 선수의 스윙은 정확도가 높으니까요.
-앞선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내면서 올림픽 타율이 0.727까지 올라갔습니다. 이미 이번 올림픽 타격 1위는 확정이 된 상황에서 크리스 반스 선수가 11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도 파울! 두 선수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하마터면 당할 뻔했네.”
몸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가까스로 걷어낸 박유성이 혀를 내둘렀다.
연달아 들어오는 슬라이더와 포심 패스트 볼에 정신이 팔려서 타이밍이 살짝 빨랐지만.
다행히 방망이 끝에 공이 걸려주었다.
“후우…….”
타석 밖에서 길게 숨을 고르며 박유성은 크리스 반스를 바라봤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욕을 엄청 하고 있을 거라 여겼는데.
“퍽 유.”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크리스 반스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짜식. 귀엽네.”
나이는 분명 크리스 반스가 더 많았지만.
제 뜻대로 되지 않아서 씩씩거리는 모습을 보니까 괜히 웃음이 났다.
하지만 크리스 반스의 눈에는 그 웃음이 다른 의미로 읽혔다.
“언제까지 도망칠 거냐고? 그래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붙어주마.”
씩씩거리며 마운드 위로 올라간 크리스 반스는 조이 패런트가 바깥쪽 슬라이더를 요구하자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커터를 던지겠다는 사인을 냈다.
‘좋아. 그렇게 나와야 크리스 반스지.’
조이 패런트는 크리스 반스의 분노를 반겼다.
앞서 홈런을 얻어맞은 공이라 일부러 주문하지 않고 있었지만.
빠른 공과 슬라이더 투 피치로는 이 건방진 애송이의 콧대를 꺾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대신 코스는 바깥쪽으로 하자.’
조이 패런트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보통 좌타자를 상대로 프론트 도어 커터를 주로 던졌으니 한복판을 가로질러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공이라면 박유성의 방망이가 딸려 나올 것 같았다.
‘설사 치지 않더라도 프레이밍으로 밀어 넣을 수 있어.’
프레이밍을 잘하기로 정평이 난 조이 패런트가 미트를 팡팡 두드렸고.
박유성은 경험적으로 승부가 들어올 거라 직감했다.
‘빠른 공으로 저렇게 호들갑을 떨진 않을 테고…… 커터인가? 설마 또 몸쪽? 아니면 바깥쪽?’
박유성은 첫 타석 때 때려냈던 커터의 궤적을 떠올렸다.
엉겁결에 친 거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몸쪽으로 들어온다면 아까처럼 포심 패스트 볼 타이밍에 방망이를 휘두르면 될 것 같았다.
‘만약에 바깥쪽이라면…… 욕심부리지 말고 밀어내자.’
박유성이 가볍게 어깨에서 방망이를 뗐다. 그 순간 크리스 반스가 마운드를 박차고 나왔고.
후앗!
비산하는 로진 가루 속을 빠져나온 공이 한복판을 지나 바깥쪽으로 움직였다.
‘어딜!’
공이 히팅 존 끝에 걸치듯 들어오자 박유성은 요령껏 팔을 쭉 뻗어 공을 맞혔다.
따악!
뭔가 먹히는 듯한 타격음을 따라 고개를 돌린 크리스 반스는 3루수 키를 넘기는 타구를 보며 다시 한번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다저스 스타디움 VIP 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드삭스의 애런 스와슨 단장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