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59화
22. 어메이징 썬(3)
첫 타석의 홈런은 확실히 운이 좋았다.
크리스 반스의 빠른 공을 제대로 지켜보기 위해 반 발자국 정도 물러나서 타격 위치를 잡았는데 하필이면 커터가 날아왔고.
타이밍을 한번 맞춰보자는 생각으로 휘두른 방망이 중심에 정확하게 찍혀 버렸다.
물론 공을 맞히기까지의 과정은 40년간의 경험이 뒷받침된 거지만.
마음을 비우고 휘두른 방망이에 공이 와서 맞아주는 게 또 야구의 묘미였다.
‘무심 타법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니까.’
어쨌거나 크리스 반스의 커터를 노리고 타석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또다시 담장 밖으로 넘길 자신은 없었다.
메이저리그에서 뛰면서 크리스 반스의 공에 익숙해진 다음이라면 몰라도 회차를 통틀어 처음 상대하는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투수의 공을 뻥뻥 때려내는 건 만화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크리스 반스쯤 되는 투수가 저러니까 기분은 좋네.’
크리스 반스에 맞춰 박유성도 타석 밖으로 한 발 물러났다. 그러고는 가랑이 사이에 배트를 세운 뒤에 장갑을 고쳐 끼었다.
투수가 숨을 고르면 타자도 여유를 부릴 줄 알아야 하는 법.
먼저 타석에 들어가서 크리스 반스가 공을 던져주길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개의 아웃 카운트가 올라갔는데요. 갑자기 경기가 멈춰 버렸습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가 투구판에서 발을 빼니까 박유성 선수도 다시 한번 장구류를 체크하고 있는데요. 능청스럽게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저 모습만 보면 프로 10년 차 베테랑 타자 같은데요.
-사실 박유성 선수가 야구를 잘했으니 망정이지 저희 때 저랬으면 혼이 났을 겁니다. 신인은 좀 빠릿빠릿해야 했거든요.
-현역 시절 얘기를 하시면서 깨알 칭찬을 잊지 않으셨는데요. 박유성 선수를 칭찬하는 스킬이 나날이 느시는 것 같습니다.
-박유성 선수를 대놓고 칭찬했더니 저한테 혼이 났던 선수들이 서운하다고 메시지를 보내서요. 저도 좀 자중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이제 크리스 반스 선수가 다시 투구판 위로 올라왔습니다. 앞선 첫 타석에서는 박유성 선수가 기선제압을 하는 솔로 홈런을 때려낸 바 있는데요. 이번 타석은 어떻게 될지 지켜보겠습니다.
“후우…….”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힌 뒤 크리스 반스가 홈플레이트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조이 패런트가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크리스 반스와 어울리지 않는 사인이었지만.
그런 크리스 반스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겨 버린 타자에게 무작정 정면 승부를 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크리스 반스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오른쪽 무릎 밖으로 완전히 빠진 조이 패런트의 미트를 향해 빠르게 공을 내던졌다.
후앗!
크리스 반스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한복판을 지나 바깥쪽으로 향하자 박유성은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크리스 반스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지만.
저렇게 키가 크고 팔이 긴 투수가 던지는 공이 10미터 지점부터 바깥쪽으로 향한다면 볼이 될 가능성이 컸다.
아니나 다를까.
점점 꺾여 나가기 시작한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완전히 벗어나 조이 패런트의 미트에 붙잡혔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확실한 볼이라 조이 패런트는 프레이밍조차 하지 않았고.
그렇게 첫 번째 볼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초구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볼입니다.
-슬라이더죠. 투 스트라이크 이후 저 공에 송현민 선수와 박준수 선수, 민병규 선수까지 전부 삼진을 당했는데요. 박유성 선수는 꿈쩍을 하지 않았습니다.
-공이 빠질 거라고 예상한 걸까요, 아니면 초구니까 하나 지켜본 걸까요?
-글쎄요. 사실 박유성 선수가 공격적인 스타일이라서 타석에서 오래 공을 지켜보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는데요.
-이번 대회에 볼넷을 하나 골라내긴 했습니다만 그건 고의4구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번 대회에서 가장 잘 치고 있는 타자의 선구안을 의심하는 것도 넌센스이지 않을까요?
-확실히 박유성 선수가 베드볼 히터는 아니니까요.
-베드볼 히터였다면 방금 공에 무조건 방망이가 나갔을 겁니다. 한복판을 걸쳐 들어오는 공이었으니까요.
-말씀드리는 순간 크리스 반스 선수가 2구를 준비합니다. 이번에도 바깥쪽. 157㎞/h의 빠른 공이 높게 꽂혔습니다.
-슬라이더 다음에 빠른 공으로 박유성 선수의 스윙을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 같은데 박유성 선수가 이번에도 참아냈습니다.
공을 쥐고 한참 동안 버텼던 조이 패런트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이저리그였다면 스트라이크 판정이 나올 법했지만.
캐나다 구심은 볼이라고 확신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 반스에게 공을 돌려준 뒤 조이 패런트는 박유성을 힐끔 바라봤다.
초구에 슬라이더로 시선을 잡아 끌었으니 2구째 빠른 공에 반응을 해야 정상인데 박유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너무 빨라서 반응을 못 한 건가? 아니지. 이 녀석. 아까 홈런을 쳤지?’
불현듯 떠오른 터무니없는 생각을 지우며 조이 패런트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몸쪽 공을 노리고 있는 거 같은데 좋아. 하나 던져주지.’
조이 패런트의 사인을 확인한 크리스 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오른쪽 무릎 아래쪽으로 내려온 조이 패런트의 미트를 향해 있는 힘껏 팔을 내던졌다.
후앗!
크리스 반스의 손가락을 빠져 나온 공이 스트라이크 존으로 날아왔지만 박유성은 속지 않았다.
‘이건 빠지지.’
구속으로 봐서 체인지업 계열일 텐데 이 공이 끝까지 살아서 들어온다면 마구나 다름없었다.
그 예상대로 피칭 터널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공이 가라앉기 시작했고.
퍼억!
신경질적으로 조이 패런트의 미트 속에 파묻혔다.
-박유성 선수가 이 공까지 골라냅니다!
-몸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확실히 공을 잘 봅니다.
-방금 공은 체인지업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빠르게 들어왔는데요.
-스플리터 그립을 잡고 던져서 미국 현지에서는 스플리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크리스 반스 선수는 체인지업의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 공은 오늘 경기에서 처음 보여주는 것 같은데요.
-제가 크리스 반스 선수의 등판 경기를 전부 챙겨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데이터상으로는 구사 비율이 3퍼센트 정도니까요. 경기당 많아야 두세 개 정도 던진다고 봐야겠죠.
-그런 공을 꺼내 들었다는 건 그만큼 박유성 선수와의 승부에 부담을 느낀다는 방증 아닐까요?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1회 초 공격 이후로 미국 대표팀 타자들도 안타를 때려내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비록 2사 이후이긴 하지만 여기서 박유성 선수에게 안타를 얻어맞아서는 안 된다는 부담이 큰 것 같은데요. 볼카운트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에서 크리스 반스 선수가 4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는 스트라이크! 바깥쪽 꽉 찬 코스로 빠른 공이 꽂혔습니다!
“이걸 잡아주네.”
구심의 스트라이크 콜을 확인한 박유성이 쓰게 웃었다.
궤적상 빠졌다고 생각해서 건드리지 않았는데 공 두 개쯤 빠졌을 코스에 구심의 팔이 들렸다.
“이봐. 썬. 들어왔다고.”
박유성이 스트라이크 존에 불만을 갖는다고 생각한 조이 패런트가 이때다 싶어 입을 놀렸다.
하지만 박유성은 조이 패런트의 트레시 토크에 넘어가지 않았다. 크리스 반스의 공을 분석하기도 바쁜데 씨부렁거리는 영어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스윙 한 번 못 해보고 걸어 나가는 것보다는 나은데 칠 만한 공을 안 주네. 걷어내면서 버텨볼까?’
잠시 고민하던 박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투아웃이니까.”
1 대 0.
한 점 차 박빙의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
처음부터 주전 멤버로 뽑힌 것도 아니고 대체 선수로 들어와서 이만큼 했으니 한 번쯤은 욕심을 부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좋아. 누가 이기나 해보자.”
박유성은 평소보다 앞쪽으로 오른발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빠르게 루틴을 끝낸 뒤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 들었다.
박유성의 기세가 달라지자 조이 패런트는 다시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하지만 박유성을 이대로 볼넷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던 크리스 반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리스 반스 선수가 투구판에서 발을 뺐습니다.
-사인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유인구 사인이 나온 것 같습니다.
-여기서 볼이 빠지면 볼넷인데요. 2사 이후라도 박유성 선수를 루상에 내보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박유성 선수는 자력으로 스코어링 포지션에 나갈 수 있는 선수입니다. 게다가 다음 타자가 감백호 선수 아니겠습니까?
-지금 중계 카메라도 감백호 선수를 한 번 비췄는데요. 과연 감백호 선수 차례까지 이어질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기 타석에 선 감백호는 박유성이 고마웠다.
박경호와 박찬희처럼 초구에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견한데 볼카운트 싸움까지 유리하게 끌고 가고 있으니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성아. 욕심부리지 말고 골라 나가자. 그럼 형이 어떻게든 해볼게.’
감백호는 이대로 크리스 반스의 공이 빠지길 바랐다.
하지만 크리스 반스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은 총알처럼 몸쪽을 향해 날아갔고.
따악!
박유성이 그 공을 건드리면서 볼 카운트를 꽉 채웠다.
-이번에는 파울. 박유성 선수가 친 타구가 1루 쪽 안전 그물망을 때립니다.
-빠른 공을 노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타이밍이 조금 빨랐습니다.
-박유성 선수도 아쉽다는 표정인데요.
-모처럼 칠 만한 코스로 공이 들어와서 서둘렀던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저렇게 공을 때려내야 크리스 반스 선수도 함부로 승부를 걸지 못합니다.
메이저리그 팬들이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을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크리스 반스는 지난해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 상을 수상한 투수.
팬들이 극성맞기로 유명한 레드삭스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는 선수였다.
비록 올 시즌은 승운이 따르지 않아서 올림픽 브레이크 전까지 9승에 그치고 있지만.
2.11의 평균 자책점은 아메리칸 리그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1위였다.
하지만 커리어를 떠나 크리스 반스는 박유성과의 승부가 불편하기만 했다.
박유성의 노림수가 짐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 초반 장타를 때려낸 타자는 다시 한번 손맛을 보고 싶은 마음에 스윙이 커지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크리스 반스는 일부러 유인구 위주로 승부를 걸었다.
다른 대한민국 타자들이 슬라이더에 헛방망이질을 했던 것처럼 박유성도 휘둘러 주길 바랐던 건데 정작 박유성은 그걸 전부 골라내 버렸다.
특별히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을 제외하고 3볼까지 몰린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다행히도 4구째 조이 패런트의 프레이밍으로 첫 스트라이크를 잡고.
조금 전에 몸쪽에 빠른 공을 붙여 두 번째 스트라이크를 잡아 풀카운트까지 끌고 오는 데 성공했지만.
크리스 반스는 좀처럼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공에 대한 고민만 커졌다.
‘빠른 공을 계속 때려내고 있어. 내 공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패스트 볼 킬러인 게 분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