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56화
21. 우유천!(12)
메이저리그에서 유행하던 수비 시프트에 규제가 걸리면서 짤로 돌아다니던 극단적인 수비 배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일단 내야수들은 진흙으로 된 공간에서 수비를 시작하며 2루를 기준으로 좌우에 2명씩 자리를 잡아야 했고.
외야도 센터를 중심으로 양쪽 모두 수비수가 자리를 잡아야 했다.
내야 수비 시프트는 수비 효율성 측면에서 거의 사라졌지만.
외야 수비 시프트는 규정에 맞춰 종종 펼쳐지는데 루이스 넬슨처럼 극단적으로 잡아당기는 풀히터가 타석에 등장하면 좌익수나 우익수가 한 면을 지키고 중견수가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내셔널리그 팀들이 자신을 상대로 펼치는 시프트를 이겨내 왔던 루이스 넬슨에게 대한민국 대표팀의 소극적인 시프트는 아무런 감흥조차 없었다.
“어설픈 시프트를 쓴 걸 후회하게 해주지.”
타석에 들어선 루이스 넬슨은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 들었다.
그러다 2구째 바깥쪽 낮은 코스로 슬라이더가 날아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루이스 넬슨이 억지로 잡아당긴 타구가 내야를 넘어가자 에릭 지터 감독은 펜스 난간을 두드리며 좋아했다.
기대했던 장타는 아니지만 1사 만루의 기회에서 선취점을 뽑아냈으니 오늘 경기도 쉽게 풀릴 것 같았다.
1루 주자 코리 베츠와 2루 주자 마크 스테리도 안타를 확신하고 다음 베이스를 향해 반쯤 내달렸다.
하지만 3루 주자 케빈 모랄은 3루 베이스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좌중간으로 자리를 옮긴 박유성이 떨어지는 타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백호나 기정후였다면 무시하고 일단 홈으로 내달렸겠지만.
지난 예선전 때 지금과 똑같은 상황에서 타구를 건져 올린 걸 두 눈으로 지켜본 케빈 모랄은 태그 업을 준비했다.
“코치! 썬이 공을 잡으면 말해요.”
“걱정하지 마.”
3루 베이스 코치도 뒤쪽으로 물러나 시야를 확보했다. 그러고는 박유성이 미끄러지듯 공을 낚아채자 곧바로 케빈 모랄에게 소리쳤다.
“뛰어!”
포구 지점이 멀지 않았지만 케빈 모랄은 이를 악물고 홈으로 내달렸다.
제아무리 박유성이라 해도 엉덩이로 슬라이딩을 한 상황에서 정확하게 송구를 하긴 쉽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정작 송구는 홈이 아니라 3루로 날아왔다.
“안타! 3루!”
유격수 박찬희가 다가오자 박유성은 사이드 토스로 공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 말을 용케도 알아들은 박찬희가 홈 대신 3루로 빠르게 공을 던졌다.
“2루!”
때마침 3루 베이스에 붙어 있던 김하선은 뒤이어 들려오는 소리에 2루를 향해 공을 던졌고.
2루수 송현민이 베이스 커버와 함께 포구를 잡아내면서 환상적인 더블 플레이가 완성됐다.
-아, 지금 무슨 상황인 거죠?
-하하. 박유성 선수가 공을 놓쳤나 봅니다.
-네?
-아, 정확하게는 포구를 했는데 바운드가 됐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박찬희 선수가 곧바로 3루로 송구했고요.
-그러니까 태그 아웃 상황이 아니라 포스 아웃 상황이라는 말씀이신 거죠?
-그렇습니다. 자세한 건 리플레이 화면이 나와봐야 알겠습니다만 박유성 선수가 또 한 번 영리한 수비를 했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이 감탄을 터뜨리는 사이 결승전을 맡은 캐나다 구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잡은 게 아니었어?”
“잘 안 보였습니다. 타이밍은 아웃인데 바운드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썬이 타구를 잡는 걸 제대로 본 사람?”
“없을 겁니다. 썬이 슬라이딩을 하면서 포구 장면이 가려졌으니까요.”
“그럼 비디오 판독을 해야 하나?”
“이건 심판 직권으로 비디오 판독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도요.”
구심이 만장일치로 챌린지를 요청하자 에릭 지터 감독이 발끈해 더그아웃 밖으로 뛰쳐나왔다.
“뭡니까? 뭘 보겠다는 겁니까?”
“방금 전 타구의 안타 여부를 확인할 겁니다.”
“잡았잖아요. 다 같이 본 거 아니었습니까?”
“바운드가 됐을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 선수들은 안타라고 확신하고 플레이를 했고요.”
“그럼 홈은요? 득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것도 함께 체크해 보겠습니다.”
“방금 득점 인정했잖아요?”
“태그 업 플레이에 대한 판단이었습니다. 안타라면 어느 쪽이 먼저인지 따져야 합니다.”
“젠장할!”
에릭 지터 감독이 씩씩거리며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마크 코헤인 수석 코치가 달래듯 말했다.
“아웃일 겁니다. 조아스도 지켜봤으니까요.”
“그래, 맞아. 조아스! 조아스를 불러요.”
마크 코헤인 수석 코치가 벤치를 바라보고 있는 조아스 베일리 수비 코치에세 손짓을 했다. 그러자 조아스 베일리 수비 코치가 서둘러 3루 쪽 더그아웃으로 다가왔다.
“조아스. 방금 타구 제대로 봤지? 그렇지?”
에릭 지터 감독은 조아스 베일리 수비 코치가 확답을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조아스 베일리 수비 코치도 애매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게…… 슬라이딩을 하면서 글러브가 가려졌습니다.”
“가려졌다니? 설마 못 본 거야?”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늦게 태그 업을 지시했고요.”
“하아, 미치겠군. 정말 안타인 거야?”
에릭 지터 감독이 고개를 돌려 박유성을 찾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이 박유성 주변에 몰려 있어서 박유성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너 진짜 대단하다. 그러니까 안타인데 아웃인 척 연기한 거야?”
“연기는 아니구요. 3루 주자가 뜬금없이 태그 업을 준비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래서 뭐? 너 설마? 일부러 놓친 거야?”
“타구가 좀 빠듯하더라고요.”
“와, 미친! 하선이 형. 이 자식 말하는 거 들었어요?”
박찬희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김하선을 바라봤고.
김하선은 대답 대신 박유성에게 다가와 뒤통수를 한 번 쓰다듬었다.
“유성아. 잘했다. 정말 잘했어.”
“그런데 홈 득점은 어떻게 된 거예요?”
박유성이 다시 송현민을 바라봤다. 그러자 송현민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더 빨랐어.”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그런데 백업 빨리 들어갔네요?”
“찬희 형이 3루로 송구하는 거 보고 알았지. 이 형이 안타는 못 쳐도 수비에서 실수하는 형이 아니거든.”
“야 인마. 가끔 안타도 치거든?”
“그보다 형은 또 어떻게 바로 공을 처리한 거예요?”
“그거? 경기 들어오기 전에 유성이하고 약속했거든. 유격수 뒷공간으로 떨어지는 타구는 유성이가 처리하고 송구는 내가 하는 걸로. 그래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지.”
박찬희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비록 박유성의 트릭 플레이에서 시작된 더블 플레이였지만 박찬희가 조금만 머뭇거리거나 홈으로 던졌다면 모든 게 꼬일 수 있었다.
“그런데 홈으로 던지긴 늦었죠?”
“왜? 내가 잘못 판단했을까 봐 그래?”
“아뇨. 혹시라도 코치님께 한 소리 들을까 봐서요.”
박준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비디오 판독상 더블 플레이가 인정되고 득점이 취소된다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득점이 유지된다면 홈 송구 여부를 두고 말이 나올지 몰랐다.
하지만 박찬희도 괜히 3루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홈으로 던지면 장담 못 했어. 경호가 홈플레이트를 비우고 있었거든.”
“경호 형이요?”
“괜히 길을 막다가 주루 방해 판정 나올 수도 있으니까 왼쪽으로 빠져 있었는데 태그까지 가면 글쎄다. 반반? 그래서 하선이 형한테 던진 거야. 하선이 형이 알아서 하라고.”
“어쩐지. 송구에 감정이 실렸다 했다.”
자신에게 결정을 떠넘겼다는 박찬희의 고백이 얄미웠지만 김하선은 그 플레이를 탓하지 않았다.
박찬희의 말대로 외야 잔디 근처에서 홈으로 정확하게 송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 던지던 거리가 있다 보니 과하게 힘을 주다가 송구가 빗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박유성에게 공을 건네받은 위치에서 3루까지는 평소 송구하던 거리와 거의 비슷했다.
“아웃이라니까 그러네. 다들 걱정 말고 편하게 있어요. 편하게.”
2루 베이스로 들어오면서 케빈 모랄의 홈 대시를 지켜봤던 송현민이 선수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잠시 후.
판독 센터에서 결과가 들어왔다.
-아! 안타입니다. 박유성 선수가 타구를 한 번에 잡아내지 못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되면 득점은 무효가 되겠죠?
-지금 다시 좌우 분할 영상이 나오고 있는데요. 송현민 선수의 글러브에 공이 들어오고 나서 케빈 모랄 선수가 홈플레이트를 밟았습니다.
-케빈 모랄 선수. 아마 나중에 이 영상을 본다면 슬라이딩을 하지 않은 걸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습니다.
1 대 0이던 전광판 스코어가 0 대 0으로 정정되자 베이스볼 파크가 난리 났다.
└진짜 대박이다. ㅋㅋㅋㅋ
└살다살다 이런 야구는 처음 봄.
└저도요. 메이저리그 미튜브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봤던 트릭 플레이를 우리 선수들이 써먹을 줄은 몰랐어요.
└저런 플레이 흔합니다. 미튜브 찾아보면 엄청 많아요.
└방구석 추신우 어서 오시고~
└이 사람은 박유성 글마다 딴소리하네. 진짜 길 가다가 박유성한테 뺨이라도 맞았나?
└스타즈 팬으로서 이해합니다. 앞으로도 스타즈 박유성 선수 많이 사랑해 주세요~
└파이터즈도 아직 한 발 남았거든요?
└잠깐 밥 먹고 오느라 영상 놓쳤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득점이 왜 취소된 거죠?
└1사 만루에서 박유성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급 연기 펼침. 안타인데 아웃인 척해서 대환장파티 만듦. ㅋㅋ
└박유성 선수가 타구를 잡은 줄 알고 3루 주자가 태그업을 하고 1루 주자와 2루 주자는 귀루했거든요. 그런데 타구를 원바운드로 잡았어요. 잔디에 공 튀기는 거 나옴.
└그걸 미국 대표팀은 못 본 건가요?
└못 봤어요. 박유성이 슬라이딩하면서 가려짐. ㅋㅋ
└난 박유성 수비도 수비지만 곧바로 3루로 던진 박찬희도 대박이라고 생각함.
└우리 찬희. 드디어 한 건 했구나! ㅠ.ㅠ
└저기 트윈스 팬이신 거 같은데 3루로 던지라고 박유성 선수가 말한 거예요.
└이미 화면으로 3루라고 하는 거 다 잡힘요. ㅋㅋ
└그래도 우리 현민이가 2루 베이스 커버 들어간 건 인정해 주시는 거죠?
└네. 레인저스의 송현민 잘하더라고요.
└역시 메이저리그 클라스. ㅋㅋㅋ
└전 트윈스라고 해주세요 ㅠ.ㅠ
임찬기가 지나친 자신감으로 연속 안타를 얻어맞을 때만 해도 함부로 숨쉬기조차 눈치가 보였지만.
박유성의 호수비에 1사 만루 위기를 잔루로 만들어버리자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이번 타석 박유성 기대되는 사람 손!
└저요!
└저도요. 원래 호수비 펼친 타자들은 안타 치잖아요.
└위기 끝에 기회라는 말은 들어봤는데 호수비 하면 안타 치나요?
└호수비하면 텐션 업입니다. 아마 타석에서 공이 수박처럼 보일걸요?
└크리스 반스가 던지는 수박이라. 어마어마하겠군요. ㅋㅋ
└생각해 보니까 좋은 게 아닌데? ㅋㅋㅋ
└유성이는 1회 실점 막아준 걸로 할 거 다 했습니다. 안타 못 쳐도 욕하지 맙시다.
└진짜 박유성 덕분에 결승전 왔는데 욕하면 사람이 아니죠.
└없는 자리에서는 나라님도 욕할 수 있지만 박유성은 안 됨.
└어제 어떤 분이 그러던데요? 박유성은 베팍 20년 까방권 줘야 한다고요.
그때.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타구가 하늘 위로 솟구쳤고.
잠시 후 베이스볼 파크가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크아아아아!!!!!!
└유성아!
└진짜 미쳤다. 미쳤어!
└와, ㅅㅂ 야구를 이렇게 잘한다고?
└진짜 박유성 정체가 뭐임?
└우리는 박유성 같은 선수를 천재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그래. 진짜 박유성쯤 되어야 천재지. 천재 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