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55화
21. 우유천!(11)
4강전에서 대한민국과 일본이 맞붙는다고 했을 때.
에릭 지터 감독은 결승전 파트너로 일본을 예상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거의 불참했던 지난 아시안게임을 제외하고 일본이 한국에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의 선발은 마츠다 유이토였다.
양키즈의 레전드로서 양키즈 경기는 빼먹지 않고 챙겨 보는 입장에서 마츠다 유이토는 쉽게 공략하기 어려운 투수였다.
미국 대표팀의 원투 펀치인 게릿 벌렌더나 크리스 반스처럼 강인한 느낌은 아니지만 연타를 잘 허용하지 않으며 다양한 구종을 구사한다는 점이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에게 상극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결과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승리로 끝났다.
자신의 예상대로 마츠다 유이토는 영리하게 대한민국 타자들을 요리했지만 단 한 명을 막지 못해 패배의 멍에를 써야 했다.
“첫 타석 때 쉽게 승부를 한 게 문제였어. 그때부터 경기가 꼬인 거야.”
마츠다 유이토가 박유성의 플레이에 말렸다고 판단한 에릭 지터 감독은 당초 규정대로 선공을 받아들였다.
오늘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발은 임찬기.
크리스 반스처럼 빠른 공을 던지는 좌투수지만 예선전에서 상대했던 송찬우보다는 공략하기 쉬운 상대였다.
“대니! 시원하게 하나 치라고!”
지난 베네수엘라전에서 3안타 경기를 치른 1번 타자 대니 존슨을 향해 에릭 지터 감독이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대니 존슨이 뒤를 돌아보고는 씩 웃으며 윙크를 날렸다.
-이제 미국 대표팀의 1회 초 공격이 시작됩니다. 선두타자는 1번 타자 대니 존슨. 이번 대회 타율이 무려 0.438입니다.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리드 오프라 평가받는 타자입니다.
-경기 수가 적긴 하지만 국제 대회에서 4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요. 이 선수보다 타율이 더 높은 선수가 다름 아닌 대한민국 대표팀에 있습니다.
-박유성 선수죠.
-이선철 해설위원께서 바로 정답을 알려주셨는데 박유성 선수가 이번 대회에서 7할의 타율을 기록 중입니다
-10타수 7안타였죠?
-네. 그렇습니다. 현재 박유성 선수가 7할의 타율로 타격 전체 1위이고 그다음이 바로 대니 존슨 선수입니다.
-제가 듣기로 대니 존슨 선수가 이번 올림픽 타격왕에 도전했다고 하던데요.
-대회 전 기자회견에서 타격 타이틀에 욕심이 난다고 밝힌 바 있는데요. 애석하게도 박유성 선수를 이기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박유성 선수가 오늘 경기에서 4타수 무안타에 그쳐도 5할 타율을 유지하는 반면 대니 존슨 선수는 4타수 4안타를 쳐야 5할을 넘길 수 있거든요.
-그래도 끝까지 지켜봐야 하는 게 지난 베네수엘라전에서 3안타를 몰아쳤습니다.
-지금 채팅창으로 억지 긴장감을 조성한다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는데요. 사실 박유성 선수가 안타 하나만 때려도 타격왕 경쟁은 그대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박유성 선수가 규정 타석을 충족했나요?
-타자 부문 타이틀 중에서 규정 타석이 적용되는 건 타율 하나뿐인데요. 리그 중간에 대회를 치르는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10타석 이상으로 기준치를 낮췄습니다. 박유성 선수는 이전 경기까지 총 11타석에 들어왔고요.
-그렇다면 정말 첫 타석이 중요하겠는데요?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중계 카메라가 타석을 비췄다.
중계 화면으로 타격 준비를 마친 대니 존슨의 비장한 표정이 잡혔다.
대한민국과의 첫 경기에서 부진하긴 했지만 대니 존슨은 이후 세 경기 연속 멀티 히트 쇼를 펼치며 미국 대표팀의 공격을 주도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박유성을 이번 올림픽 야구의 슈퍼스타로 만들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박유성의 활약상에만 초점을 맞췄다.
괜찮은 선수가 나타날 때마다 언론에서 호들갑을 떠는 건 연례행사였지만 지난 일본과의 4강전 이후로는 그 정도가 심해졌다.
조만간 메이저리그에 올지도 모를 한국의 슈퍼 루키가 몸값 비싼 선수들에 비해 얼마나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댔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비롯한 미국 대표팀 선수들은 원치 않는 비교를 당해야 했다.
‘내가 저 녀석보다 못하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저만치 보이는 박유성을 한 번 노려본 뒤 대니 존슨이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 들었다.
에릭 지터 감독의 주문이 아니더라도 대니 존슨은 오늘 경기에서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대니 존슨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박경호는 초구에 바깥쪽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보나 마나 몸쪽 공을 노리겠지.’
대니 존슨은 메이저리그에서 스프레이 히터로 평가받지만 그건 대체적으로 풀히터인 메이저리그 타자들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퍼엉!
임찬기의 각도 큰 슬라이더가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자 대니 존슨의 표정이 굳어졌다.
“젠장. 칠 걸 그랬나?”
다시 타석에 들어선 대니 존슨은 바깥쪽을 빠르게 파고드는 공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총알처럼 3루 쪽 관중석으로 사라지자 박유성이 수비 위치를 뒤로 물렸다.
“누가 메이저리그 아니랄까 봐 파울도 날카롭네.”
타이거즈의 좌완 에이스 계보를 잇는 임찬기의 주무기는 최고 구속 156㎞/h까지 나오는 포심 패스트 볼과 국내 좌완 투수들 중에서 최고라는 슬라이더였다.
언론에서는 알려줘도 못 치는 슬라이더라며 호들갑을 떨지만 박유성이 생각하는 임찬기의 진짜 무기는 타자 무릎 높이로 찍히는 포심 패스트 볼이었다.
쓰리 쿼터보다 조금 높은 릴리스 포인트에서 내리찍듯 던지는 빠른 공이 무릎 앞쪽을 파고들면 좌타자 입장에서는 꼼짝 못 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이번에는 그 공이 바깥쪽 낮게 들어갔지만.
155㎞/h짜리 포심 패스트 볼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응하는 걸로 봐서 조금 더 깊숙이 수비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박유성의 움직임을 체크한 박경호는 곧바로 바깥쪽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공 2개를 연달아 바깥쪽으로 던졌으니 몸쪽으로 하나 보여줄 차례였지만.
출루시키면 골치 아픈 타자에게 원하는 코스의 공을 던져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난 아시안게임 때부터 박경호와 호흡을 맞췄던 임찬기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후앗!
볼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공을 내던졌다.
하지만 투 스트라이크에 몰린 대니 존슨은 스트라이크 존을 가로지르는 공을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다.
따악!
방망이 끝에 걸린 타구가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좌중간으로 뻗어 나가자 임찬기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만에 하나 이대로 공이 빠지면 최소 2루타였다.
하지만 미국 관중들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기 직전, 박유성이 재빨리 달려와 타구를 건져 올렸다.
-이 타구를 박유성 선수가 잡아냅니다!
-쉽지 않은 타구였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침착하게 잘 처리했습니다.
관중석 곳곳에서 탄식이 쏟아졌지만 대한민국 중계석의 반응은 비교적 담담했다.
박유성의 호수비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보니 이 정도의 러닝 캐치로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반면 미국 중계진은 이때다 싶어 칭찬을 쏟아냈다.
-라이너성 타구였는데요. 썬이 잘 쫓아갔습니다.
-리플레이 화면이 나오는데요. 수비 위치를 깊게 잡았습니다. 그 덕분에 타구를 측면에서 쫓을 수 있었죠.
-그런데 썬이 언제 저 위치로 옮겼죠? 분명 초반에는 키와 같은 위치에 서 있었는데요.
-앞서 파울 타구를 보고 타구가 뻗을 거라 예상하고 자리를 옮기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만약에 지금보다 앞쪽에서 수비를 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글쎄요. 썬이 이번 올림픽에서 보여준 환상적인 수비라면 어떻게든 쫓아가서 잡았겠지만 아까처럼 편하게 잡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공을 사선으로 쫓아야 했을 테니까요.
-가다가 타구가 낮고 빠르게 뻗어 나갔습니다. 저런 타구는 예상보다 더 빨리 날아오니까요. 조금만 늦게 반응해도 공이 빠졌을 겁니다.
마운드에 선 임찬기도 중견수 쪽을 향해 엄지를 높이 추켜들었다.
“유성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앞으로 26개만 더 잡아라. 알았지?”
박유성 덕분에 까다로운 타자를 잡아낸 임찬기는 평소보다 신을 냈다.
외야로 뻗어 나가는 타구는 박유성이 전부 다 처리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2번 타자 케빈 모랄을 상대로 바깥쪽 빠른 공으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고.
2구째 커터처럼 꺾여 들어가는 슬라이더로 다시 한번 구심의 스트라이크 콜을 얻어낼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는데.
따악!
3구째 몸쪽에 빠른 공을 붙이다 좌익수 앞 안타를 얻어맞고 말았다.
박경호는 완전히 빠지는 볼을 요구했는데 임찬기가 치기 좋은 코스로 던져 버린 것이다.
“좋아, 좋아!”
1루로 나간 케빈 모랄에게 박수를 쳐준 뒤 에릭 지터 감독이 전광판을 바라봤다.
앞서 대니 존슨의 타구가 빠졌다면 계획대로 선취점을 뽑고 시작했을 텐데.
그 타구를 지워 버린 박유성이 얄밉기만 했다.
하지만 박유성의 호수비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따악!
3번 타자 마크 스테리가 초구를 잡아당겨 우중간 펜스를 직격하는 타구를 때려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 깔끔한 펜스 플레이로 득점을 막았다.
-1루 주자 케빈 모랄이 3루에서 멈춥니다.
-다행입니다. 케빈 모랄 선수도 메이저리그에서 20개 전후의 도루를 성공시킬 만큼 발이 빠른 선수인데요. 박유성 선수의 깔끔한 펜스 플레이가 실점을 막았습니다.
-말씀하신 깔끔한 플레이가 느린 화면으로 나오고 있는데요. 펜스 상단에 맞고 튕겨 나온 공을 박유성 선수가 한 번에 잡아 송현민 선수에게 정확하게 송구했습니다.
-보통 저럴 때는 마음이 급해서 글러브 대신에 맨손으로 잡는 경우가 종종 많은데요. 박유성 선수의 플레이가 정석입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글러브로 포구하고 공을 완전히 잡아놓은 다음에 제대로 그립을 쥐고 던져야 지금처럼 중계하는 수비수에게 정확하게 공을 던질 수 있습니다.
-펜스에 공이 부딪칠 때까지만 해도 팔을 돌렸던 3루 베이스 코치가 송구를 보고는 다급히 케빈 모랄 선수를 멈춰 세웠는데요.
-저기서 돌렸다면 죽었을 겁니다. 송현민 선수도 본래 외야에서 뛰었을 만큼 송구가 좋으니까요.
박유성의 호수비 덕분에 실점의 위기를 다시 한번 넘긴 대한민국 벤치는 박경호에게 고의4구를 지시했다.
1사 2, 3루 상황에서 내셔널리그 MVP 출신인 코리 베츠를 상대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코리 베츠 선수가 1루를 채우면서 이제 1사 만루가 됐습니다.
-임찬기 선수. 어깨에 힘을 좀 빼야 합니다. 대니 존슨 선수 타석 이후로 공이 몰리는 느낌이에요.
-이제 오른쪽 타석으로 5번 타자 루이스 넬슨 선수가 들어옵니다. 이번 올림픽 성적은 0.250으로 다소 아쉽습니다만 홈런을 2개 때려낸 바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팀 입장에서는 땅볼을 유도하는 게 최선인데요. 그게 어렵다면 중견수 쪽으로 뜬 공을 유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박유성 선수의 어깨라면 미국 대표팀도 무리해서 뛰지 못할 거라는 말씀이시네요.
-일단 박유성 선수가 미국전에서 보여준 호수비가 여러 번이니까요. 미국 대표팀 입장에서도 쉽게 움직이기 어렵겠죠.
박유성도 잡아당기는 루이스 넬슨의 스타일에 맞춰 수비 위치를 좌익수 쪽으로 옮겼다.
그러자 감백호가 좌익수 라인 쪽으로 붙었고.
기정후는 좌중간 쪽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이스 넬슨은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식의 시프트는 통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