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54화
21. 우유천!(10)
6
자체 청백전을 마치고 신성 고등학교 학생들은 최윤석 타격 코치의 부모가 운영하는 대패삼겹살집으로 이동했다.
본래라면 야구부실에 모여 결승전을 보려 했지만.
엉겁결에 스타즈 감독 자리를 승낙해버린 김석률 수석 코치가 한턱 쏘기로 하면서 장소가 바뀌었다.
“김 코치. 그동안 고생 많았어.”
“아직 확정된 거 아닙니다. 감독님.”
“만약에 엎어지면 다시 돌아와. 나야 김 코치가 있으면 든든하지.”
“김 단장님께 잘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잘 말해주긴. 그런 거 없어. 난 그냥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야.”
김석률 수석 코치는 나승균 감독의 호의가 고마웠다.
외부에서는 김석률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이 아니냐는 말까지 할 정도로 나승균 감독의 역할까지 일부 도맡아 해왔기 때문에 나승균 감독이 일부러 좋은 말을 해준 거라 여겼다.
하지만 나승균 감독은 오래전부터 김석률 수석 코치가 아마추어 야구판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 여겼다.
“암튼 가서 잘해. 나한테 배운 건 없겠지만 탈 없이 선수단을 이끄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배운 게 없긴요. 감독님 반만큼이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 데려갈 사람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데려가.”
“네?”
“자네도 어찌 보면 내 라인이나 다름없는데 혈혈단신으로 나가려고? 그래도 보좌해 줄 사람은 있어야지.”
“감독님…….”
“최윤석이 데려가. 그래도 프로에서 코치 생활을 했으니까 꿇리진 않을 거야. 배성일이도 데려가고.”
코치들 중에서 김석률 수석 코치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최윤석 타격 코치는 베어스에서 3년간 2군 코치 생활을 한 경력이 있었다.
그보다 한 살 어린 배성일 배터리 코치도 마찬가지.
랜더스에서 2군 배터리 코치로 4년을 보냈다.
두 사람 다 아마추어 지도자로 썩기엔 아까운 인물들이었지만 나승균 감독과 인연이 닿아 신성 고등학교에 모여 있었다.
그래서 김석률 수석 코치도 내심 둘 중 한 명은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승균 감독이 먼저 말을 꺼내주니 마음이 편했다.
“둘이 빠지면 내년 시즌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별걱정을 다 한다. 나 나승균이야. 내가 자네만큼 잘 가르치지는 못해도 인맥은 훨씬 넓을걸?”
“감독님 인품이야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하하. 그렇지. 자네는 지장이고 나는 덕장이지. 덕장. 암튼 그런 걱정은 마. 알잖아? 신성은 연봉 쎄서 오고 싶어 하는 코치들 많은 거. 유성이 덕분에 내년 지원금도 늘어날 예정이라고 하니까 내 걱정은 말고 김 코치 앞가림부터 해.”
“감사합니다. 감독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보답할 거면 나한테 하지 말고 유성이한테 해. 그 녀석 덕분에 우리 모두 팔자 핀 거니까.”
박유성이 올림픽 대표팀으로 차출된 직후.
나승균 감독은 신성 재단 체육위원회로부터 재계약 제안을 받았다.
계약 기간 5년에 연봉은 현 고교야구 최고 수준인 1억 2천만 원.
체육위원회는 대통령배 4강 진출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지만 나승균 감독은 이 모든 게 박유성 덕분임을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추가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한 감독 임기를 보장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혹시나 추후 있을 신산전에서 패배하더라도 예전처럼 목이 잘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희소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체육위원회 규정상 드래프트 우선 지명 선수와 1차 지명 선수가 나올 경우 전년도 대비 20퍼센트의 추가 지원금을 5년간, 2차 지명과 3차 지명 선수의 경우에는 10퍼센트의 추가 지원금을 3년간 지급하기로 명시가 되어 있었다.
언론에서 떠들어대기로 박유성은 최소 1라운드 지명이 확정적이니 임기가 끝날 때까지 야구단 운영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감독님께서 스타즈 감독으로 가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됐어. 난 말이야. 신성 감독이 딱이야. 손주 같은 녀석들 커가는 거 보는 게 좋아. 프로 감독 할 만큼 열정적이지도 않고. 암튼 괜히 나한테 미안해하지 말고 미리 주변 정리해 둬. 갑자기 떠나면 서운해할 사람들 많을 테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감독님.”
“자, 그런 의미에서 한잔 들자고.”
나승균 감독에게 소주 세 잔을 연달아 받아 마신 김석률 수석 코치는 빨개진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
고마운 마음을 떠나 나승균 감독의 주량은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뭐야? 김 코치 어디 갔어?”
“감독님. 저희하고 마시시죠.”
“김 코치님 이미 취하셨습니다.”
김석률 수석 코치를 대신해 젊은 피인 신기남 주루 코치와 이민우 투수 코치가 나승균 감독을 상대하는 사이.
최윤석 타격 코치와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슬그머니 김석률 수석 코치 옆으로 모였다.
“코치님. 설마 저희 두고 혼자 가시는 거 아니죠?”
“2군이라도 좋으니까 저희도 데려가 주세요. 저희야말로 김석률 사단 아닙니까?”
“김석률 사단은 무슨. 나 감독님 들으시면 서운해하시겠다.”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승균 사단에서 독립해서 김석률 사단으로 들어가라고.”
“감독님이?”
“저래 보여도 우리 감독님, 뒤에서 사람 챙기는 거 하나는 국가대표급이잖습니까.”
“암튼 저하고 최 코치님은 이미 김 코치님 따라가기로 마음 정했습니다. 그러니까 혼자 가시려거든 저희를 밟고 가십시오!”
“그래? 어딜 밟아줄까?”
“코치니이임~”
“그러지 말고 데려가 주세요. 네? 네?”
마흔을 바라보는 코치들이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떨자 김석률 수석 코치도 이내 웃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본래라면 자신이 정중하게 코치 자리를 제안해야 하는데 먼저 함께하겠다고 말해주니 든든하기만 했다.
“아직 확정된 건 하나도 없어. 알지? 언론에서 떠들어도 구단에서 공식 발표할 때까지는 유보적인 거.”
“알죠. 저희도 한때 프로 밥 먹었잖아요.”
“구단에서 발표 나면 두 사람 자리는 내가 만들어 볼 테니까 걱정 마. 그 정도 재량권은 주겠지.”
“역시 김 코치님! 믿고 있었습니다!”
“제가 감히 아버지라 불러도 될까요?”
“아버지는 무슨. 자네하고 나하고 몇 살 차이 난다고?”
“에이, 그래도 앞자리가 다른데요?”
“최 코치. 아는 배터리 코치 없어?”
“제가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그렇게 잠시 웃고 떠드는 사이 결승전 중계방송이 시작됐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캐스터 장호영입니다. 오늘은 LA 올림픽 야구 결승전을 중계해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오늘도 제 옆에는 이선철 해설위원께서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이선철입니다.
-LA 올림픽 폐막도 이제 나흘 앞으로 다가왔는데요. 올림픽 야구는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처음 중계 일정을 받았을 때는 너무 길지 않나 생각했었는데 막상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결승전 중계를 하게 됐습니다.
-일단 어제 있었던 3, 4위전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일본이 베네수엘라에게 역전승을 거두며 동메달을 차지했습니다.
-니키타 쇼우 선수가 경기 초반에 무너지면서 베네수엘라가 주도권을 잡았습니다만 일본 특유의 끈기 있는 야구에 결국 승패가 뒤바뀌었습니다.
-경기만 놓고 보자면 명승부였다는 평이 많았는데요. 하지만 일본 국민들은 동메달이라는 성적에 만족하지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아무래도 올림픽 2연패에 대한 기대감이 컸을 테니까요. 지난 4강 전의 패배가 뼈아프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이제 결승전 얘기로 넘어가 볼 텐데 일단 상대가 미국입니다.
-미국과는 같은 A조였기 때문에 다시 만나려면 두 팀 모두 결승에 올라와야 했는데요. 결국 이렇게 정상에서 맞붙게 됐습니다.
-예선에서는 대한민국 대표팀이 미국 대표팀을 2 대 1로 잡아냈습니다만 결승은 또 다르겠죠?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미국은 자타공인 올림픽 최강팀입니다. 예선전에서 우리나라에 패배했다고 해서 그 평가가 퇴색되는 건 아닐 겁니다.
-많은 국민들이 예선전의 기적을 다시 한번 써주길 바라고 있을 텐데요.
-저 역시 같은 심정입니다. 다만 이번 올림픽 목표가 메달 획득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초과 목표를 달성한 셈이니까요. 오늘 경기는 다들 마음을 내려놓고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입에서 약한 소리가 나오자 TV를 지켜보던 신성 고등학교 선수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도 예선에서 이겼는데 해볼 만하지 않을까?”
“야. 오늘 미국 선발 크리스 반스야. 크리스 반스.”
“그게 뭐? 게릿 벌렌더도 털었는데?”
“게릿 벌렌더는 우완이고 크리스 반스는 좌완이잖아. 대표팀에 좌타자가 많으니까 더 힘들 거라고.”
“그래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공은 둥글다는 말 모르냐?”
“난 그냥 마음 비우고 보려고.”
“나도. 그냥 유성이가 안타 두 개만 쳤음 좋겠다.”
선수들이 떠드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김석률 수석 코치가 최윤석 타격 코치를 보며 물었다.
“최 코치 생각은 어때?”
“오늘 경기요? 솔직히 힘들죠. 우리하고 경성이 붙는 느낌이랄까요?”
“에이. 경성은 아니죠. 미국 대표팀이 사회인 야구 팀도 아니고 무슨 경성을 가져다 붙입니까? 최소한 청소년 대표팀 정도는 되죠.”
“그런데 우리 팀에 유성이 뛰면 청대도 잡을 수 있을 거 같지 않아?”
최윤석 타격 코치의 말에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피식 웃었다.
야구는 단체 스포츠고 특정 선수 한 명이 잘한다고 해서 승패에 큰 영향을 끼지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박유성이 지금껏 보여준 게 있다 보니까 괜히 기대가 생겼다.
“김 코치님은 누가 이길 것 같으세요?”
“글쎄. 초반 주도권을 가져간 팀이 이기지 않을까?”
“그러지 말고 우리 참치 내기하시죠.”
“참치?”
“요 앞에 참치집 새로 생겼잖아요. 거기가 그렇게 맛있답니다.”
“거기 엄청 비싸지 않아?”
“엄청 비싸니까 맛있죠. 야구 선수도 잘해야 연봉 많이 받잖아요.”
“연봉값 못 하는 선수가 태반인데 무슨.”
“암튼 맛은 보장한다니까 내기하시죠. 어때요?”
회라면 사족을 못 쓰는 배성일 배터리 코치의 제안에 김석률 수석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나 마나 둘 다 미국 쪽에 걸 터.
자신은 박유성을 믿고 대한민국에 걸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윤석 타격 코치가 선수를 쳤다.
“그럼 난 한국.”
“에에? 상대가 미국인데요?”
“나 원래 애국심 투철하잖아.”
“나중에 못 바꾸니까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신중이고 자시고 한국. 배 코치는 미국이지?”
“아뇨. 저도 한국인데요?”
“뭐?”
“오랜만에 최 코치님 뜯어먹으려고 했는데 꽝이네요.”
“내가 그 속내를 모를 줄 알고?”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입맛을 다셨다.
김석률 수석 코치야 박유성 때문이라도 한국을 선택할 테니 이기면 최윤석 타격 코치를 뜯어먹고 지더라도 김석률 수석 코치와 반씩 부담하면 될 거라 여겼는데 작전이 완전히 실패해 버렸다.
“그런데 왜 둘 다 한국이야?”
김석률 수석 코치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객관적인 전력만 놓고 보자면 미국 대표팀에게 거는 게 당연했다.
그러자 최윤석 타격 코치와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한목소리로 답했다.
“유성이가 있으니까요.”
“왠지 오늘도 유성이가 사고 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미국 대표팀 에릭 지터 감독도 박유성이 신경 쓰였다.
선글라스 낀 눈으로 감백호와 캐치볼을 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에릭 지터 감독이 지나가던 조아스 베일리 수비 코치를 붙잡고 물었다.
“조아스. 썬의 컨디션이 어때 보여?”
“글쎄요. 아직 타석에 서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조아스 베일리 수비 코치가 어깨를 으쓱였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 대표팀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캐치볼로 선수의 컨디션을 판단할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에릭 지터 감독이 보기에 박유성의 리듬감이 경쾌하게 느껴졌다.
“왠지 불안한데. 그래도 초공이라 다행인가?”
미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경기였지만 야구 결승전은 대한민국 대표팀이 홈팀이었다.
예선전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미국 대표팀을 꺾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미국 대표팀의 홈경기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에릭 지터 감독이 단호하게 반대했다.
‘전 세계인이 보고 있습니다. 룰대로 가는 게 좋습니다.’
그럴듯한 핑계를 댔지만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썬이 경기 초반에 날뛰게 둬서는 안 돼. 우리가 먼저 선취점을 뽑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