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47화
21. 우유천!(3)
마운드 뒤쪽으로 내려간 마츠다 유이토는 로진백을 가볍게 주물렀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바라봤다.
[R H B E]
[2 2 0 0]
[1 2 1 1]
오늘 경기에 나온 안타는 다 해서 4개뿐이었다.
대한민국의 선발 송찬우는 풀카운트 승부를 마다하지 않고 6회까지 100개가 넘는 공을 던져댔고.
자신도 메이저리그에서 아껴두었던 포크볼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며 대한민국 타자들의 혼을 빼놓았다.
전광판에 찍힌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양 팀 투수 모두 칭찬받아 마땅했지만.
마츠다 유이토는 이대로 경기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두고두고 일본을 괴롭힐 녀석이야. 이번 타석은 무조건 잡아야 해.’
타석에 들어온 박유성을 보며 마츠다 유이토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포크볼을 과하게 던져서 엄지와 중지 사이가 얼얼했지만.
이제 와 도망치듯 다른 공으로 승부를 보고 싶진 않았다.
그런 마츠다 유이토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구와하라 세이지가 초구에 바깥쪽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일단 카운트부터 잡고 가자. 마츠다.’
잠시 뜸을 들이던 마츠다 유이토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메마른 기합을 내지르며 구와하라 세이지의 미트 속에 공을 꽂아 넣었다.
퍼엉!
묵직한 포구 소리와 함께 구심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고.
박유성도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타석 밖으로 한발 물러났다.
‘오늘 슬라이더 좋네.’
초구에 이 공이 들어올 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타석에 서니까 방망이가 나가지 않았다.
밋밋한 백도어 슬라이더라면 결대로 밀어 쳐서 라인 공략을 노려봤을 텐데.
포크볼이 완성되기 이전에도 일본 최고의 투수로 군림하게 만든 구종이다 보니 움직임 자체가 달랐다.
바깥쪽에서 출발했다가 홈플레이트 직전에 갑자기 꺾여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괜히 건드렸다가 뜬공 날 수도 있으니까.’
길게 숨을 고른 뒤 박유성이 천천히 루틴을 펼쳤다.
오른발로 바닥을 잘 다지고 다시 왼발을 땅에 묻은 뒤에 오른쪽 타석 앞선을 긁고 방망이를 천천히 두 번 돌린 다음에 어깨에 안착시켰다.
방망이를 돌리는 거나 타선을 긁는 건 내키는 대로 하는 편이었지만 구와하라 세이지는 제멋대로 해석했다.
‘이 자식. 초조해하고 있어. 마츠다가 계속해서 마운드에서 버틸 줄 몰랐겠지.’
첫 타석과 세 번째 타석에서 3루타를 얻어맞았지만 구와하라 세이지는 박유성이 마츠다 유이토의 공을 제대로 공략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첫 타석 땐 루키라고 무시했다가 당한 거고.
세 번째 타석의 포크볼도 운이 좋았다고 봐야 했다.
‘삼진을 잡았을 때처럼 포크 볼을 아꼈다면 절대 맞지 않았을 거야.’
자신의 성급함을 다시 한번 반성하며 구와하라 세이지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몸쪽 높은 코스의 패스트 볼.
마츠다 유이토가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을 상대로 재미를 보고 있는 코스였다.
사인을 확인한 마츠다 유이토가 피식 웃었다.
초구 주문은 다소 아쉬웠지만 이번 2구는 참 마음에 들었다.
메이저리그에 처음 진출했을 때 언론들은 포크볼 위주의 피칭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울 거라 지적했다.
실제로 배럴을 만들기 위한 어퍼 스윙이 대유행을 타면서 종으로 떨어지는 변화구로 승부를 거는 투수들의 생존이 위협받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준비한 스플리터를 꺼내 들면서 우려가 쑥 들어가긴 했지만.
마츠다 유이토도 메이저리그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중 하나가 금기처럼 여겼던 하이패스트 볼이었다.
높은 코스의 공을 던지면 장타를 얻어맞을 거란 인식에 갇혀 일본에서는 거의 던지지 않았는데 새로운 포수와 호흡을 맞추면서 높은 유인구를 던지는 재미를 알게 됐다.
타자 입장에서는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유인구에 속는 것보다 충분히 칠 것 같은 공을 헛칠 때 더 열이 받는 법.
“크아압!”
마츠다 유이토가 다시 뱃심까지 끌어올려 공을 내던졌고.
그 기합성에 홀린 박유성은 방망이가 끌려 나가고 말았다.
“아오!”
마츠다 유이토에게 당했다는 걸 깨달은 박유성이 제자리에서 껑충 뛰었다.
방금 공은 설사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더라도 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괜히 욕심부리다가 헛심만 잔뜩 써버렸으니 다음 공을 대처하기가 더 부담스러워졌다.
어지간한 타자였다면 방금 공에 기가 팍 꺾였겠지만 프로 40년 차인 박유성은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다음 공은 포크볼이 들어올 거야.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는 안 돼.’
박유성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자 강기태 감독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 녀석 지금 어깨에 힘 뺀 거지?”
“네. 그런 거 같습니다.”
“저건 또 누구한테 배운 거야?”
“병규하고 붙어 다녔으니까 병규가 알려준 거 아닐까요?”
“무슨 소리야. 병규 아까 포크볼 헛칠 때 안 봤어? 씩씩거리고 난리도 아니었잖아?”
이번 올림픽에서 3전 전승으로 4강에 진출하자 언론들은 세대교체에 성공했다며 앞다투어 칭찬을 쏟아냈다.
신성인 박유성을 시작으로 젊은 타자들과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지금처럼 숨 막히는 투수전이 펼쳐지는 경기에서 선수들을 독려해 줄 베테랑의 부재는 뼈아프기만 했다.
그런데 제일 막내인 박유성이 누구보다 어른스럽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니까 강기태 감독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아무튼 저 녀석은 타고났어.”
“마츠다 유이토도 어이가 없을 겁니다. 일부러 하이 패스트 볼을 던졌는데 저래 버리면 김이 빠지죠.”
추신우 수석 코치도 한마디 거들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기습적으로 하이 패스트 볼을 던지는 건 어퍼 스윙에 대한 대처와 더불어 타자와의 심리전에서 우위를 가져가기 위함인데 박유성에게는 통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츠다 유이토도 구심에게 새 공을 요청하며 시간을 끌었다.
본래라면 곧바로 포크볼을 던져 삼진을 잡아내려고 했는데 박유성의 눈빛을 보니까 자칫 잘못했다간 잡아먹힐 것 같았다.
그때 1루수 야마카와 겐스케가 마운드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마츠다! 힘으로 눌러 버려!”
마츠다 유이토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후로 야마카와 겐스케에게 잔소리를 듣는 건 끝일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한마디 듣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좋아.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애송이.”
마츠다 유이토가 길게 숨을 고르며 포수 쪽을 바라봤다.
구와하라 세이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포크 볼을 주문했고.
마츠다 유이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지와 중지 사이 깊숙이 공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박유성의 눈에 정확하게 걸렸다.
‘커진다.’
마츠다 유이토는 투구 시 버릇들을 전부 다 고쳤다고 생각했지만 프로 40년 차인 박유성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실밥을 살짝 걸쳐 백스핀으로 던지는 스플리터는 그립을 고쳐 쥐더라도 티가 나지 않는 반면 톱스핀을 줘야 하는 포크볼은 실밥 밖으로 검지와 중지를 완전히 끼워 넣어야 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포크볼러인 마츠다 유이토도 오랜만에 40개가 넘는 포크볼을 던지는 건 벅찰 터.
게다가 앞서 6회에 폭투까지 나왔으니 그립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글러브가 살짝 벌어졌고.
그 모양새가 박유성의 눈에는 글러브가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정황상 포크볼이 들어올 확률이 높은 상황이지만.
포크볼을 염두에 두고 타석에 들어서는 것과 포크볼을 대비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좋아. 낮은 공에만 속지 말자.’
방망이를 들어 올리며 박유성은 공의 높이에 집중했다.
앞선 6회처럼 포크 볼이 높게 들어온다면 방망이를 휘둘러야겠지만.
3회처럼 낮게 날아들면 무조건 참을 생각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구와하라 세이지는 박유성의 무릎 옆쪽으로 미트를 가져다 댔다.
‘자! 마츠다! 끝내자!’
순간 마츠다 유이토가 기합과 함께 공을 내던졌고.
후앗!
무릎 높이로 빠르게 날아들던 공은 마지막 순간에 지면에 부딪치듯 뚝 떨어졌다.
-몸쪽! 이 공을 박유성 선수가 참아냅니다!
-역시 예상대로 포크볼이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침착하게 잘 골라냈습니다.
-벤치에서 기다리라는 사인이 나왔을까요?
-글쎄요. 박유성 선수가 못 치는 타자도 아니고 오늘 경기에서 유일하게 안타를 치고 있는데 벤치에서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제 볼카운트가 원 볼 투 스트라이크로 바뀌었는데요. 여전히 투수에게 유리하지만 마츠다 유이토 선수도 다음 공에 대한 고민이 많을 것 같습니다.
-마츠다 유이토 선수가 던질 수 있는 구종은 많지만 슬라이더에 빠른 공, 그리고 포크 볼을 던졌으니까요. 마츠다 유이토 선수의 계산은 여기서 끝이 나야 했을 겁니다.
-그럼 느린 커브볼이나 체인지업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겠네요.
-보여주지 않은 공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저는 왠지 다시 한번 포크볼로 승부를 걸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대결은 승패를 떠나 자존심 싸움이거든요.
-대한민국 대표팀의 슈퍼 루키와 일본을 대표하는 메이저리그 투수의 맞대결인데요. 말씀드리는 순간 투포수 사인 교환을 마쳤습니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르며 마츠다 유이토는 다시 포크볼 그립을 잡았다.
구와하라 세이지는 바깥쪽 커브 볼을 요구했지만 마츠다 유이토는 여기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코스가 너무 뻔했어. 몸 쪽으로 낮게 떨어지는 포크볼은 이미 한 번 써먹었잖아.’
마츠다 유이토는 앞서 3회 초에 박유성을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냈던 공을 다시 던진 게 실수라 여겼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깥쪽을 겨냥했다.
박유성도 바깥쪽으로 빠른 공이 날아들면 포심 패스트 볼이라고 착각할 터.
투 스트라이크에 몰린 타자의 심리를 철저하게 역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박유성은 마츠다 유이토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또 포크볼? 날 삼진으로 잡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 같은데 좋아. 이번에는 제대로 받아쳐 주마.’
박유성이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 들었다.
그 순간.
후앗!
마츠다 유이토의 손끝으로 새하얀 공이 튕겨 나왔다.
‘바깥쪽!’
코스를 파악한 박유성은 앞서 포크볼을 받아쳤을 때처럼 스윙 궤적을 조정했다.
타석에서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이 흉내 내기에는 쉽지 않은 타격 기술이었지만.
2회차 시절의 태반을 중장거리 타자로 살아온 박유성에게 이 정도 응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발…… 걸려랏!’
홈플레이트 앞쪽에서 뚝 떨어지는 공을 향해 박유성이 힘껏 방망이를 퍼 올렸는데.
따악!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중견수 쪽으로 치우쳐서 자리를 잡았던 좌익수 도노사키 료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포크볼로 승부를 볼 거라 예상하고 일부러 수비 위치를 조정한 건데 하필이면 타구가 텅 빈 공간으로 향했다.
“젠장할!”
도노사키 료마는 이를 악물고 타구를 쫓아 내달렸다. 하지만 먹혔다고 생각한 타구는 도노사키 료마를 놀리듯 계속해서 뻗어 나가더니 폴대 안쪽 워닝 트랙 앞에 뚝 떨어졌다.
“젠자아앙!”
펜스에 부딪힌 타구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자 도노사키 료마의 입에서 다시 한번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그사이 1루를 밟고 2루를 돈 박유성은 지체 없이 3루로 내달렸다.
-박유성 달립니다! 박유성! 박유성! 박유서어어엉! 3루에서 세이프! 박유성 선수가 오늘 경기에만 3개의 3루타를 때려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3루를 파고든 박유성을 보며 도노사키 료마는 다시 한번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하…….”
마츠다 유이토의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경기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2 대 1 승리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