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45화
21. 우유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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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다. 답답해. 어떻게 안타 하나를 못 치냐.”
거실에 앉아 야구 중계방송을 보던 박명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일전은 가족들과 함께 보자는 아내의 말에 술 약속도 미루고 칼퇴근을 했건만.
1회 초 박유성이 안타를 때려낸 이후 지금껏 추가 안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여보. 진정하세요. 아직 5회밖에 안 됐잖아요.”
“이 사람아. 야구가 몇 회까지 하는 줄 알긴 해?”
“9회까지 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래. 9회 중에 5회면 딱 절반이잖아. 그런데 아직이란 소리가 나와?”
“그래도 너무 열 내지 마세요. 건강 생각하셔야죠.”
“난 괜찮아. 지난번에 같이 가서 들었잖아? 우리 유신이 증손주까지 보고 죽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다른 때 같았으면 아내 이선영의 잔소리를 듣는 시늉이라도 했겠지만.
경기가 답답하다 못해 한심스럽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이선영은 딱히 화를 내지 않았다.
자신이 보기에도 경기가 불안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때 박명철의 옆에 앉아 있던 박유신이 박유선의 팔을 잡아 끌었다.
“왜?”
“형아 언제 나와?”
“오빠 나오려면 멀었어. 왜? 화장실 가게?”
“응. 나 응가 마려.”
“응가가 아니라 똥. 너도 내년이면 10살이야. 언제까지 애처럼 그럴래?”
누나인 박유선이 한마디 하자 박유신이 입술을 삐죽거리고는 이선영에게 들러붙었다.
“엄마. 누나가 나 혼내.”
다른 때 같았으면 무뚝뚝한 박유선을 대신해 박유신을 화장실까지 데려다 줬겠지만.
“유신아. 이제 화장실 혼자 갈 수 있지?”
“응?”
“얼른 갔다 와. 변기 물 내리는 거 까먹지 말고.”
“…….”
이선영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엉덩이를 떼지 못했다.
그렇게 5회 초 공격이 삼자범퇴로 끝이 나고.
5회 말 일본 대표팀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번 5회에도 송찬우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송찬우 선수가 지금까지 일본 타선을 잘 막아주고 있습니다만 투구수가 많다는 게 아쉽습니다. 4회까지 공을 75개나 던졌어요.
이선철 해설위원이 불안한 소리를 늘어놓자 박명철이 코웃음을 쳤다.
“75개면 뭐가 많다는 거야? 이닝당 스무 개도 안 던졌는데.”
타자들이 단체로 삽질(?)을 하는 와중에 1 대 0의 리드가 이어진 건 송찬우의 호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이터즈 선수라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보여준 송찬우의 활약상은 박유성 다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해설위원이랍시고 시답잖은 말을 지껄인 거라 일축했는데.
따악!
믿었던 송찬우가 4번 타자 야마카와 겐스케에게 동점 홈런을 얻어맞고 말았다.
“어휴. 저 등신 같은 놈. 내 저럴 줄 알았다. 저럴 줄 알았어. 에라이.”
박명철이 짜증을 내뱉자 박유선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속해서 안타를 얻어맞은 것도 아니고 오늘 경기 첫 안타를 홈런으로 내준 것뿐인데 아빠인 박명철이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빠를 말려보라는 심정으로 엄마 이선영을 바라봤는데.
“…….”
이선영은 박명철보다 더 허탈해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빠 회사 망한 줄 알겠네.’
오빠인 박유성이 출전한 경기라는 건 알겠지만 경기가 뒤집힌 것도 아니고 고작 동점이 됐을 뿐인데 아빠는 물론이고 엄마까지 너무 유난스러운 것 같았다.
그래도 하나뿐인 딸이라 박유선은 이선영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엄마. 괜찮아요. 오빠가 다시 점수를 뽑아줄 거예요.”
앞서 헛스윙 삼진을 당해서 살짝 김이 새긴 했지만.
박유선은 박유성이 다시 한번 안타를 때려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렇지? 그렇겠지?”
이선영도 희망적인 박유선의 말에 냉큼 호응했다.
하지만 박명철은 쓸데없는 소리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성이가 안타를 치면 뭘 해? 타자 놈들이 하나같이 배가 불렀는데. 유성이 혼자 안타 치고 도루하고 다 해?”
“또 모르죠. 오빠가 홈런을 칠 지도.”
“유선이 네가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인데 마츠다 저놈이 유성이한테 좋은 공을 줄 것 같아? 아까 이 악물고 포크 볼 던지는 거 봤지? 볼넷을 줬으면 줬지 절대 안타 안 맞으려고 할 거다.”
베어스 어린이 야구단 출신인 박명철은 40년 넘게 야구를 봐왔다.
친구들이 생업에 바빠 야구를 멀리할 때도 박명철은 베어스 경기를 악착같이 챙겨봤다.
심지어 전처인 송연주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중계 화면을 틀어놓고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그런 박명철이 보기에 대한민국 대표팀이 추가점을 내기란 쉽지 않았다.
‘마츠다 저놈이 빨리 내려가 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답이 없어. 일단 투수들을 총동원해서 막고 승부치기까지 가야 해.’
정규 이닝이 끝이 나면 대회 규정에 따라 승부치기에 들어간다.
보통은 발 빠른 1번 타자와 2번 타자를 주자로 내보낸 뒤에 3번 타자부터 공격을 시작하지만.
한 번 믿는 선수는 끝까지 신뢰하는 강기태 감독이라면 오늘 경기에서 안타를 때려낸 아들 녀석의 앞에 밥상을 차려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그런데 2사 이후에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이 마츠다 유이토의 초구를 잡아당겨 3루타를 때려내더니.
“……!”
눈 깜짝할 사이에 홈까지 파고들며 스코어를 바꿔 버렸다.
-스코어는 2 대 1! 대한민국 대표팀이 다시 한 점 앞서 나갑니다!
-박유성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선수가 나왔다는 게 그저 감격스러울 정도입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이 정말로 울컥하셨는데요. 이 모습을 시청자 여러분들께 보여 드리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고요. 박유성 선수 칭찬이나 하세요.
-아마 이 경기를 박유성 선수의 부모님도 보고 있을 텐데요. 뿌듯하실 것 같습니다.
-제가 어지간해서는 이런 얘기를 잘 안 하는데 박유성 선수에게 동생이 둘이 있다고 하거든요? 박유성 선수의 유전자를 나눠 받았다면 운동을 시켜도 잘할 것 같습니다.
-지금 채팅창으로 야구를 시키라는 글들이 쏟아지고 있는데요. 저 역시도 박유성 선수와 박유성 선수의 동생이 태극 마크를 달고 경기를 뛰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장호영 캐스터와 이선철 해설위원이 아들 잘 키웠다는 말을 돌려 말한 거지만.
막상 그 얘기를 듣는 당사자의 생각은 달랐다.
“유신이 축구 말고 야구 시킬까?”
“야구는 유성이 하나로 족하다면서요?”
“형제끼리 비교될까 봐서 그랬던 건데…… 유성이 녀석 하는 거 보니까 야구가 나을 거 같아. 기왕이면 투수로. 어때?”
“저야 상관없는데 유신이가 야구를 좋아해야 말이죠.”
이선영이 작은 방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화장실에 데려다주지 않아 삐친 건지 박유신은 화장실을 갔다가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신이 잘 얘기해 봐. 혹시 알아? 유신이가 유성이만큼 할지?”
“유성이는 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라고들 하던데요?”
“유성이도 유신이도 다 내 피를 물려받았어. 내가 말했잖아? 우리 집안이 원래 체력이 좋다고. 나 어렸을 때도 다들 축구 선수 하라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암튼 그건 유신이하고 상의하고 나서 결정해요.”
이선영이 말을 아꼈지만 박명철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형제 국가대표라.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선배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박유성을 보며 박명철은 자신만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고.
같은 중계 화면을 보고 있던 스타즈 구단 전력분석실도 갑작스러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거금을 주고 들인 90인치짜리 초고화질 TV 화면으로 박유성의 홈 슬라이딩 장면이 계속해서 흘러나왔지만.
자리에 앉은 이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다 감백호가 2루수 땅볼로 물러나자 최영수 차장이 뒤늦게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이건 잘해도 너무 잘하는데?”
“그러게요. 잘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잘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옆에 앉은 조명욱 대리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파이터즈에서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사왔으니 박유성을 스타즈 신인 선수라 여기고 응원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 보여준 플레이는 신인의 패기 같은 뻔한 표현으로 형용을 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격이 다른 플레이였다.
“요즘 박유성 선수 새 별명 생겼잖아요.”
“새 별명? 뭔데?”
“소찢남이요.”
“만찢남은 들어봤는데 소찢남은 뭐야? 설마 소설 찢고 나온 남자 뭐 그런 거야?”
“오올, 최 차장님 은근 잘 맞히신다?”
“그래? 내가 맞힌 거야?”
“네. 박유성 선수가 지난 U-18 야구월드컵 때 10할을 쳤잖아요. 그리고 곧바로 성인 국대로 뽑혔고요. 이런 건 소설 속에나 가능한 일이라는 얘기가 나오다가 소찢남이 됐어요. 그런데…… 진짜 소찢남인가 봐요.”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던지 임세영 대리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이들 중에 임세영 대리의 평가를 비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 최영수 차장과 조명욱 대리가 전략분석실에서 썩히고 있는 TV로 한일전을 보자는 얘기를 꺼냈을 때 안재희 운영팀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들의 모공까지 훤히 보인다는 TV로 야구를 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경태 전략분석팀장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전략분석실에 술판을 깔았는데 정작 맥주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경기 초반에는 박유성이 때려낸 3루타와 득점에 넋이 나갔고.
경기 중반에는 팽팽한 투수전 때문에 뭔가 넘길 수가 없었으며.
동점 홈런을 얻어맞고 나서는 눈치가 보여 맥주를 멀리 치웠다.
그런데 박유성이 또다시 마츠다 유이토를 상대로 득점을 만들어내고 나니까 술을 마실 기분이 확 사라졌다.
“임 대리. 협회에서 언제까지 답을 준다고 했지?”
“일단 내일까지 기본적인 입장은 전달받기로 했습니다.”
“최 차장. 협회 아는 사람 있지? 미안한데 분위기 좀 알아봐 줘.”
다른 때 같았으면 앓는 소리부터 늘어놓았을 최영수 차장은 군말 없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몇 번 식사했던 프로 야구 협회 직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괜히 불안해진 임세영 대리가 조명욱 대리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승인은 해주겠죠?”
“해줘야지.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승인을 받아내야 해.”
“왠지 평생 먹을 욕을 몰아 먹을 기분이 드네요.”
“욕먹으면 오래 산다잖아. 다른 팀 팬들에게 욕먹고 장수하자고. 우리 팀 팬들한테 욕먹으면 제 명에 못 살아.”
“꼭 욕먹길 바라시는 거 같네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우리 임 대리 프로잖아.”
“그럼 조 대리님도 같이 욕먹어주실 거죠?”
“어휴, 나는 선수들 챙겨야지. 우리 박유성 선수 신경 쓰기도 바빠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조명욱 대리의 시선은 최영수 차장의 깨톡 대화창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당초 계획대로 프로 야구 협회에서 트레이드를 승인해 준다면 참 좋겠지만.
비난 여론을 의식해 승인을 보류하거나 결정을 미루면 그때부터는 헬파티를 각오해야 했다.
“파이터즈 쪽에서 딴소리하지는 않겠죠?”
“이 경기를 보고 있다면 엎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겠지. 하지만 그렇게는 못 할 거야. 아직 우선 지명 발표 안 했으니까.”
안재희 운영팀장은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뒀다.
프로 야구 협회가 발을 빼고 파이터즈가 트레이드를 무르자고 나선다면 그때는 무조건 우선 지명으로 박유성을 잡아야 했다.
“그건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부담스러울 것 없어. 아까 그 플레이를 보고도 박유성 선수를 안 뽑는 건 미친 짓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