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44화
20. 병 주고 약 주고(10)
-마츠다 유이토가 박유성을 삼진으로 잡아내며 앞선 1회의 복수를 해냈습니다.
-마츠다 유이토의 포크 볼은 한국의 슈퍼 루키에게도 쉽지 않겠죠. 오히려 포크 볼에 스윙을 했다는 걸 높이 평가해 주고 싶네요.
-박유성이 마운드를 내려가는 마츠다 유이토를 한참 동안 바라봤는데요.
-아무래도 경외심이 들었겠죠. 메이저리그 최고의 팀인 양키즈에서 2선발로 뛰고 있는 투수니까요.
-1회 초에 박유성에게 불의의 3루타를 허용했습니다만 마츠다 유이토. 이후 9타자 연속 범타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회에 박유성이 안타를 때려줘서 마츠다 유이토가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지만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는 경계심을 갖게 마련이니까요.
일본 중계석은 박유성의 겁 없는 플레이가 마츠다 유이토를 각성으로 이끌었다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1번 타자로 나선 박유성에게는 최소 두 번의 타석이 남아 있었다.
5회 말에 터진 야마카와 겐스케의 솔로 홈런으로 균형이 맞춰진 6회 초.
2사에 주자 없는 가운데 박유성이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박유성을 힐끔 바라본 구와하라 세이지는 곧바로 검지와 중지를 벌려 포크 볼 사인을 냈다.
앞서 포크 볼로 헛스윙 삼진을 잡아냈으니 초구부터 박유성의 넋을 빼놓고 싶었다.
마운드에 선 마츠다 유이토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타순이 돌면서 포심 패스트 볼의 비율을 높였지만.
첫 타석에서 빠른 공에 반응했던 박유성에게는 철저하게 변화구 위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후우…….”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은 뒤.
마츠다 유이토가 빠르게 투구판을 박찼다.
후앗!
손가락 옆면을 타고 톱스핀으로 빠져나가는 공이 살짝 높게 제구됐지만 마츠다 유이토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박유성의 눈에는 더 잘 들어올 테니 이번에도 크게 헛칠 거라 여겼다.
하지만 프로에서 40년을 구른 박유성에게 연달아 같은 구종의 공을 비슷한 코스로 던지는 건 자살행위였다.
‘이 자식이?’
초구부터 포크 볼이 들어오자 박유성은 오른 무릎에 단단히 힘을 주며 버텼다. 그러고는 공이 히팅 존 안으로 들어오자 골프 스윙을 하듯 방망이를 퍼 올렸다.
마츠다 유이토의 포크볼 궤적을 머릿속에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종으로 크게 떨어지는 공을 퍼 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하필 초구에 포크볼을 던져준 덕분에 박유성은 부담 없이 방망이를 돌렸고.
따악!
방망이 끝에 걸린 타구는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우익수 곤도 타쿠야의 키를 넘겨 버렸다.
-박유성 선수가 1루를 돌아 2루로 내달립니다!
-다시 한번 3루타가 나올 것 같은데요?
-박유성 2루로! 2루에서 다시 3루로! 3루에서 세이프! 박유성 선수가 1회에 이어 6회 초에 다시 한번 3루타를 만들어냅니다!
“크아아아!”
팝업 슬라이딩으로 3루에 들어간 박유성이 오뚝이처럼 일어나 3루 쪽 벤치를 향해 어퍼컷을 날렸다.
순간 3루 관중석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응원단이 자지러졌고.
벤치 난간까지 몰려와 있던 대표팀 선수들도 화답하듯 주먹을 들어 올렸다.
“젠장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곤도 타쿠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본래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면 타구를 쫓을 수 있었을 텐데.
박유성을 얕잡아보고 텍사스성 안타에 대비했다가 또다시 3루타를 내주고 말았다.
“마츠다!”
곤도 타쿠야는 마운드 쪽을 향해 왼손을 들었다.
마츠다 유이토가 돌아서서 볼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마츠다 유이토는 박유성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떻게 친 거지?”
앞선 3회 초 박유성이 마지막 타자로 나왔을 때.
마츠다 유이토는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9살이나 어린, 일본 대표팀의 막내인 스즈키 지로와 나이가 같은 한국의 루키를 상대로 열을 낸다는 게 조금 우스웠지만.
실실 웃어대며 프로 선수들이나 할 만한 루틴을 선보이는 박유성을 보니까 오기가 생겼다.
초구에 바깥쪽을 아슬아슬하게 찌르는 슬라이더로 스트라이크를 잡고.
2구째 박유성이 칠 만한 높이로 몸 쪽 빠른 공을 붙여 파울을 이끌어낸 뒤에.
3구째 포크 볼 그립을 쥐고 있는 팔을 힘껏 내던졌다.
마음이 앞섰던지 원하던 것보다 공이 낮게 날아갔지만, 박유성은 겁 없이 덤벼들었고.
끝내 헛스윙 삼진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을 복기했을 때 방금 박유성의 타격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흔히들 포크 볼은 낮게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건 포크 볼을 구색용으로 던지는 투수들의 이야기였다.
타자에게 맞지 않기 위해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낮게 던지려는 것 자체가 포크볼에 대한 자신이 없다는 뜻이었다.
진짜 포크볼러라면 포크볼로 스트라이크를 잡을 줄 알아야 했다.
물론 이번 포크볼은 생각보다 조금 더 높게 빠졌지만.
제대로 된 포크볼을 경험해 보지 못한 박유성이 때려낼 만큼 쉬운 코스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마치 포크볼이 들어올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박유성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허리를 돌렸고 안타를 때려냈다.
전진 수비를 했던 곤도 타쿠야의 판단이 아쉬웠지만 그걸 탓하기에는 맞지 말아야 할 공을 얻어맞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친 거야?”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주루용 장갑을 끼던 박유성과 눈이 마주치자 마츠다 유이토가 대놓고 물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그냥 씩 웃고 말았다.
마츠다 유이토가 일본어로 말했거니와 영업 비밀을 함부로 알려줄 만큼 바보도 아니었다.
“표정을 보니까 엄청 당황했나 보네. 하긴. 포크볼에 자부심이 있는데 하필 나한테 얻어맞으니까 어처구니없겠지.”
박유성이 웃으며 주절거리자 3루수 가이 호타카가 박유성을 째려봤다.
한국어는 모르지만 어감상 박유성이 조롱을 한다고 느낀 것이다.
경험이 부족한 루키였다면 그 눈빛에 괜히 움찔거리다 꼬투리를 잡혔겠지만, 박유성은 달랐다.
“한국말 할 줄 알아?”
“……?”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왜 이렇게 인상을 써? 이렇게 다시 보는 것도 인연이니까 서로 파이팅 하자고.”
박유성이 계속해서 한국어로 떠들자 가이 호타카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뭔가 께름칙하긴 했지만 알아듣지를 못하니 따지기도 어려웠다.
그사이 포수 구와하라 세이지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마츠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투 아웃이잖아.”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런데 말이야. 포크볼이 제대로 안 먹힌 거야?”
“방금 공이라면 제대로 떨어졌어. 그냥 저 녀석이 잘 친 거야.”
마츠다 유이토는 뭔가 실수가 있었을 거라 의심하는 모양이지만.
박유성에게 던졌던 포크 볼은 다소 높았던 걸 빼고 완벽했다.
코스도 몸 쪽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듯 들어왔고.
적당한 구속과 피칭 터널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가라앉는 무브먼트까지 다 좋았다.
박유성이 포심 패스트볼을 노리고 달려들었다가 포크 볼인 걸 알아채고 방망이를 멈춰 세워도 충분히 스트라이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이었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한국의 루키에게 연달아 얻어맞은 마츠다 유이토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번 3루타는 실투적인 요소보다 박유성이 잘 쳤다고 봐야 했다.
그래야 계속해서 포크볼을 공격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마츠다. 다음 타자는 감백호야.”
“알고 있어.”
“감백호는 노련한 타자야. 투아웃이긴 해도 주자가 3루에 가 있으니까 낮은 코스의 유인구는 던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포크볼로 끝내자.”
“포크볼로?”
“네 포크볼이 최고라는 걸 보여주자고.”
구와하라 세이지가 어깨를 두드리자 마츠다 유이토도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 보면 오늘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 중에서 포크 볼을 때려낸 건 박유성밖에 없었다.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감백호와 기정후, 송현민은 물론이고 메이저리그에서 준수한 커리어를 쌓고 돌아온 김하선까지 포크볼에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심지어 박유성조차 포크볼에 삼진을 먹었다.
“후우……. 좋아. 가 보자.”
“감백호를 깔끔하게 잡아내자고.”
구와하라 세이지와 주먹을 부딪친 뒤 마츠다 유이토는 마운드 뒤로 내려가 로진백을 주물렀다.
평소에 로진 가루를 많이 묻히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 포크 볼을 많이 던졌으니 악력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 것이다.
그렇다고 포크볼을 대신해 스플리터를 던지고 싶진 않았다.
이미 손가락 감각을 포크볼에 적응시켜놓았는데 스플리터로 그립을 바꾸면 지금의 예리함이 무뎌질 것 같았다.
‘일단 투 스트라이크부터 잡자.’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박유성을 무시한 채 마츠다 유이토는 감백호와의 승부에 집중했다.
무사나 1사도 아니고 2사 상황에서 3루 주자는 딱히 견제할 필요가 없었다.
타자 주자만 잡아내면 이닝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포수석으로 돌아간 구와하라 세이지가 바깥쪽 슬라이더 사인을 내자 마츠다 유이토는 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박유성 쪽을 한 번 응시한 뒤에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초구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142㎞/h의 빠른 슬라이더가 S존을 통과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백도어성 슬라이더였는데요. 감백호 선수는 몸 쪽 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첫 타석은 유격수 직선타. 두 번째 타석은 중견수 뜬공으로 물러났습니다.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는데 타구가 전부 야수 정면으로 갔습니다.
-정타가 다 안타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격언이 생각나는데요.
-그렇습니다. 방금 전 박유성 선수의 타구도 사실 박유성 선수만큼 수비를 잘하는 선수였다면 충분히 잡았을 겁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마츠다 유이토 선수가 2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도 바깥쪽! 156㎞/h의 빠른 공이 꽂힙니다.
-이번 공은 노렸어야 했는데요. 감백호 선수. 아쉽습니다.
순식간에 볼카운트가 투 볼로 몰리자 감백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은 공을 주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공 2개가 전부 바깥쪽으로 들어올 줄은 미처 몰랐다.
‘바깥쪽에 대비해야 하나? 아니면 몸쪽?’
고민하던 감백호의 시선이 3루 베이스에 나간 박유성에게 향했다. 그러자 박유성이 씩 웃더니 외야 쪽으로 손을 뻗었다.
얼핏 보기에는 빈 공간을 알려주는 것 같았지만.
감백호는 박유성이 하려는 말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홈런 한 방 날려주세요. 형.’
타석으로 들어온 감백호는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오늘도 막내인 박유성 혼자 열일 중인데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배가 되어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딱 하나만 걸려라. 하나만.’
감백호가 방망이를 들어 올리자 구와하라 세이지가 곧바로 포크볼 사인을 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마츠다 유이토는 습관처럼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았고.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박유성은 어렵지 않게 구종을 알아냈다.
‘역시나 포크볼이네. 그렇다면…….’
마츠다 유이토가 투구판을 밟자 박유성이 성큼성큼 리드를 넓혔다.
한 발. 또 한 발. 그리고 다시 반 발.
순간 마츠다 유이토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지만 박유성은 겁먹지 않았다.
‘이 정도 거리는 역모션만 안 걸리면 귀루할 수 있어.’
박유성이 3루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대기하자 마츠다 유이토도 타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잠시 감백호와 기 싸움을 하던 마츠다 유이토가 투구판을 박차고 나오자.
타다다다닥!
박유성이 요란스럽게 홈을 향해 내달렸다.
“……!”
예상치 못한 박유성의 홈 대시에 당황한 마츠다 유이토는 공을 제대로 채지 못했다.
투구를 멈추면 보크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공을 내던졌는데 공이 쑥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이지!’
마츠다 유이토는 마음속으로 한때 단짝이었던 구와하라 세이지를 부르짖었다.
블로킹이 좋은 구와하라 세이지라면 자신의 실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줄 것 같았다.
하지만 박유성의 움직임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구와하라 세이지는 패대기치듯 날아온 포크볼을 쫓을 수가 없었다.
-이 공이 빠집니다! 3루 주자 박유성 홈으로! 홈에서 세이프! 일본 대표팀이 어렵게 만든 1 대 1의 균형을 박유성 선수가 다시 한번 깨뜨립니다!
공이 빠지기가 무섭게 홈으로 파고든 박유성이 껑충껑충 뛰며 포효했고.
일본이 자랑하는 에이스 마츠다 유이토는 다시 패전의 위기에 몰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