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43화
20. 병 주고 약 주고(9)
“너 어디 다친 데 없어?”
“괜찮아요.”
“그래도 조심해 인마. 야구 선수는 몸이 생명이야.”
“그래서 발로 밀고 들어갔잖아요.”
“일부러 그런 거였어?”
박유성과 함께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송현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평소 박유성이 레그 벤트 슬라이딩을 즐겨 해서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는데 계획된 플레이였을 줄은 미처 몰랐다.
“태그 업 하면서 보니까 아예 길을 막고 있더라고요. 뒤로 돌아가는 건 동선이 너무 길 것 같아서 그냥 밀어붙였어요.”
“암튼, 살아서 다행이다. 너 뛰었을 때 미친 건가 싶었어.”
송현민은 초구에 들어오는 마츠다 유이토의 바깥쪽 스플리터를 때렸다.
박유성에게 몸쪽 공을 연거푸 던지다 3루타를 얻어맞은 이후 마츠다 유이토는 감백호에게 철저하게 바깥쪽 승부를 펼쳤다.
그래서 일부러 바깥쪽 빠른 공을 노리고 외야로 밀어낸다는 생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는데 타구가 좌익수 정면으로 향할 줄은 미처 예상 못 했다.
좌익수 도노사키 료마가 거의 제 위치에 서 있었고 태그 업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타구가 너무 빠르고, 정직하게 날아가 잡혀 버렸기 때문에 박유성이 뛰지 못할 줄 알았는데 박유성은 투우사가 흔드는 빨간 천에 눈이 돌아간 황소처럼 홈을 향해 내달렸다.
설상가상 송구도 베이스라인을 따라 낮게 날아와서 저러다 죽겠구나 싶었는데 박유성이 저돌적인 플레이로 희생 플라이를 만들어줬다.
그때 이용구 주루 코치가 박유성에게 다가왔다.
“유성아. 방금 왜 뛴 거야?”
“네?”
“혼내려는 거 아니니까 긴장 풀고.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그게…… 오늘 아침 미팅 때 코치님이 말씀해 주셨잖아요. 도노사키 료마는 소속팀에서 우익수로 뛰고 있다고. 팀 사정상 좌익수로 출전하고 있으니까 긴박한 상황에서는 송구 실수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홈플레이트로 돌진한 거야?”
“뛰면서 구와하라 세이지의 눈을 봤는데, 제 등 뒤쪽을 보는 것 같더라고요. 송구가 제대로 날아오는 거 같아서 시간을 뺏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병구 형 말이 맞네.”
“……네?”
“주루 플레이는 네가 나보다 낫다.”
이용구 주루 코치가 씩 웃으며 박유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본적으로 조금 전 타구는 뛰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그래서 3루 베이스 코치로 나간 손시현 수비 코치에게 물어봤는데 박유성이 포구 타이밍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박유성에게 사실 확인을 하러 왔을 때도 이용구 주루 코치는 뻔한 대답을 예상했다.
3루 베이스 코치의 지시를 잘못 알아들었다거나 스타트만 끊으려 했는데 너무 많이 차고 나가 버렸다거나 하는 핑계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나마 아웃 카운트 때문에 욕심을 부린 거라면 다음부터는 신중하게 플레이하라고 한마디 하려 했는데.
미팅 중에 다들 대충 흘려들었던 내용을 기억해서 판단을 내린 거라고 하니까 할 말이 없었다.
이용구 주루 코치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강기태 감독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야?”
“유성이가 제대로 판단하고 뛴 것 같습니다.”
“제대로 판단했다니?”
“도노사키 료마 주포지션이 우익수라서요. 송구가 정확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뛰었답니다.”
“허, 유성이 녀석이 그렇게 말했어?”
“네. 포수하고 정면충돌을 각오한 것도 포수 시선을 보고 송구 방향을 알아채서랍니다.”
“그게 가능해?”
“그런 상황에서는 포수도 트릭 플레이를 못 합니다. 잠깐 한눈팔다가 공을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걸 캐치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유성이는 그게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허…… 저 녀석, 진짜 몇 살이야?”
순간 할 말이 없어진 강기태 감독이 괜히 나이를 들먹였다.
손시현 3루 베이스 코치가 박유성을 무리하게 뛰게 한 줄 알고 화를 냈는데 박유성이 만 점짜리 베이스 러닝을 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자 민병구 타격 코치가 실실거리며 말했다.
“자, 자. 감독님. 오해 풀리셨으면 이제 좀 웃으세요. 감독님 표정 때문에 커뮤니티 난리 나겠어요.”
“내 표정이 뭐? 나 별말 안 했는데?”
“유성이하고 하이파이브하실 때부터 표정 굳어 있었거든요? 그 장면 무조건 짤로 돌아다닙니다. 100퍼로요. 100퍼.”
이병구 타격 코치의 조언대로 강기태 감독은 뒤늦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자 장호영 캐스터가 냉큼 입을 열었다.
-강기태 감독이 웃는 것 같은데요?
-아마 아까는 구와하라 세이지 선수 때문에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느린 화면으로도 나왔습니다만 저런 식으로 홈플레이트를 막고 있으면 안 되거든요.
-일본에서도 뒤늦게 홈 충돌 방지 규칙이 마련됐습니다만, 구와하라 세이지 선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날쌘돌이처럼 빈틈을 비집고 들어갔으니 망정이지 주루 플레이에 미숙한 선수들은 포수 발에다 대고 슬라이딩을 하기도 하거든요.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들어갔다면 큰 부상을 당했을지도 모르고요.
-어쨌거나 박유성 선수의 재치 있는 주루 플레이 덕분에 대한민국 대표팀이 한 점을 앞서 나가게 됐습니다.
-경기 전에 이선철 해설위원께서 선취점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를 하셨는데요.
-모든 경기가 다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앞서가는 팀은 그만큼 여유를 가지고 플레이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쫓아가야 하는 팀은 조급해지겠죠. 특히나 국제 경기에서, 그것도 토너먼트를 치르는 중이라면 선취점을 누가, 언제, 어떻게 뽑느냐가 더 중요한데요. 박유성 선수의 발로 만들어 낸 이 한 점은 솔로 홈런보다 임팩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대표팀 입장에서는 주지 않아도 될 점수를 내준 기분일 테고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 찝찝함이 분명 일본 선수들의 플레이에 영향을 미칠 겁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처럼 일본 대표팀 타자들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대한민국의 간판타자인 송현민에게 솔로 홈런을 얻어맞았다면 그러려니 넘겼을 텐데.
얼마 전까지 U-18 야구 월드컵에서 뛰었던 아마추어 선수에게 농락당하니까 자존심이 상했다.
“고작 한 점이야. 빨리빨리 뒤집어 버리자!”
여느 때처럼 선수들을 독려하던 야마카와 겐스케의 목소리에도 짜증이 묻어났고.
그 감정에 전염된 일본 타자들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2구도 파울. 코다 요시히로 선수가 낮은 유인구에 반응합니다.
-코다 요시히로 선수가 어딘지 모르게 급해 보이는데요. 초구와 2구 모두 볼에 손을 댔습니다.
-앞서 이선철 해설위원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기분 나쁘게 선취점을 빼앗긴 걸 만회해야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데요.
-설사 그렇다고 해도 선두타자가 저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스윙을 하는 건 아니죠. 우리 박유성 선수도 저렇게는 안 하잖아요?
-코다 요시히로 선수. 도쿄 자이언츠 소속으로 10년째 일본 대표팀에서 활약 중인데요. 박유성 선수만 못하다는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경력을 떠나 아닌 건 아닌 겁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송찬우 선수가 3구를 던집니다. 헛스윙 삼진 아웃! 송찬우 선수가 바깥쪽 하이 패스트 볼로 까다로운 타자 코다 요시히로 선수를 잡아냈습니다!
“나이스 피칭!”
중견수 자리에서 승부를 지켜보던 박유성도 글러브를 두드리며 좋아했다.
야구 팬들에게는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라 불리고 있지만 송찬우는 한국 나이로 스물다섯에 불과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6년을 뛰고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4년 차에 접어든 마츠다 유이토에 비하면 프로 경력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했는데, 타석에서 집요하기로 유명한 코다 요시히로를 3구 삼진으로 잡아냈으니 이대로 기세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예상대로 송찬우는 2번 타자 모리타니 게이토를 유격수 땅볼로 유도한 뒤 3번 타자 곤도 타쿠야를 상대로 당당히 몸쪽 승부를 펼쳤다.
-곤도 타쿠야 선수가 친 공이 높게 솟구쳤습니다. 중견수 박유성 선수가 제 자리에서 타구를 기다립니다.
-살짝 위험한 코스였는데요. 곤도 타쿠야 선수가 힘에서 밀렸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가볍게 공을 처리하면서 세 번째 아웃 카운트를 만듭니다.
송찬우가 첫 이닝을 삼자범퇴로 끝내자 일본의 선발 마츠다 유이토도 스파이크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1회 초를 마치고 마운드를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선두 타자에게 3루타를 맞은 것 치고는 잘 막은 거라 웃어넘겼는데, 1회부터 이를 악물고 공을 던지는 송찬우를 보니까 너무 안이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때 포수 구와하라 세이지가 장비를 착용한 채로 다가왔다.
“아까 스파이크 끈이 풀렸던 거야?”
“세이지.”
“……?”
“이번 이닝부터 전력으로 간다.”
농담으로 기분을 풀어주려 했던 구와하라 세이지는 결연한 마츠다 유이토의 얼굴을 보고는 웃음기를 없앴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이닝부터 조금 까다롭게 리드를 할까 싶었는데 마츠다 유이토가 먼저 말해주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맡겨만 달라고.”
포수석으로 돌아간 구와하라 세이지는 대기 타석을 힐끔 바라봤다.
2회 초 선두타자로 나오는 건 5번 타자 김하선.
작년까지 파드레스에서 뛰던 대한민국 대표팀의 최고참 타자였다.
‘대만전 때 결장했으니까 몸이 근질근질하겠지.’
구와하라 세이지는 초구에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1회 때 초구에 빠른 공 사인을 냈던 만큼 베테랑인 김하선이 노림수를 가지고 타석에 들어왔을 거라 여겼는데.
따악!
예상대로 김하선이 곧장 방망이를 휘둘렀다.
‘루키한테 얻어맞았다고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거 아냐?’
타이밍이 빨랐다며 아쉬워하는 김하선을 보며 구와하라 세이지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한 타순이 돈 다음에 쓰려 했던 두 번째 볼배합을 꺼내 들었다.
-아, 한복판에 커브가 날아왔습니다. 투 스트라이크.
-우리 타자들이 빠른 공을 노리고 있는 걸 눈치챈 것 같은데요. 확실히 노련한 투수입니다.
-볼 카운트 노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마츠다 유이토 선수가 3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도 바깥쪽! 김하선 선수가 크게 헛칩니다.
-정말 좋은 포크 볼이 들어왔네요.
-마츠다 유이토 선수가 오늘 경기 첫 번째 삼진을 잡아냅니다.
김하선을 시작으로 마츠다 유이토는 포크 볼의 비중을 크게 높였다.
본래 포심 패스트 볼과 슬라이더, 스플리터의 비율이 전체의 80퍼센트에 달했지만.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의 노림수를 원천봉쇄하듯 빠른 공의 비율을 확 줄였다.
-헛스윙 삼진 아웃! 마츠다 유이토 선수가 이번 이닝에서만 2개의 탈삼진을 솎아냅니다!
-이번에도 포크 볼이었는데요. 저 공을 공략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박유성도 두 번째 타석에서 마츠다 유이토의 포크볼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3회차 들어 지금껏 단 한 번도 삼진을 먹어본 적이 없었지만.
일본에서도 최고라 불렸던 마츠다 유이토의 포크볼은 박유성이 앞선 회차에서 겪어 본 포크 볼과 느낌부터 달랐다.
“장난 아닌데?”
박유성이 혀를 내두르며 마츠다 유이토를 바라봤다.
그러자 1루 쪽에 자리 잡고 있던 일본 관중들이 이때다 싶어 플래카드를 흔들며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