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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142화 (142/412)

타자 인생 3회차! 142화

20. 병 주고 약 주고(8)

야구장의 베이스 간 거리는 27.44미터.

홈플레이트에서 3루까지 직선거리의 총합은 82.32미터였다.

원심력 때문에 곡선으로 달려야 하는 걸 감안한다면 거의 100미터에 가까운 거리.

발이 빠른 타자들은 100미터를 10초 후반에도 끊으니 대충 11초 초반쯤 걸린 박유성의 질주가 호들갑을 떨 만큼 대단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2루를 돌아 여유롭게 3루를 파고드는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확실히 적극적인 선수인 것 같습니다.”

제임스 터너 부단장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몸쪽 꽉 찬 공을 때려내는 타격 기술도 나쁘지 않았지만 경기 초반 팀에게 리드를 안겨줄 수 있는 베이스러닝을 할 수 있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컸다.

“그래, 맞아! 썬은 적극적이야. 수비도 그렇지만 베이스 러닝을 할 때 주저하는 법이 없지. 그렇다고 해서 생각 없이 플레이하는 선수들하고는 다르다고.”

“네. 방금 전에 몸쪽 꽉 찬 코스를 때려내는 걸 보고 알았습니다. 파울을 치고 난 표정은 힘에서 밀린 느낌이었는데 막상 같은 코스에 공이 들어오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쳐냈죠.”

“역시 제임스야! 자네라면 정확한 판단을 할 줄 알았지.”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러고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이 홀랜드 보좌역을 바라봤다.

“보라고. 로이. 자네 말고 다들 썬을 좋아하잖아?”

“썬이 싫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거야?”

“전 썬의 실력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썬의 실력을 평가절하한 게 아니죠.”

“저것 봐. 계속 저런 식이라니까. 그래서? 방금 전 썬의 플레이에 대한 자네의 공식 의견은?”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가상의 마이크라도 쥔 것처럼 오른손을 로이 홀랜드 보좌역 쪽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좋은 타격이었고 저돌적인 베이스 러닝이었습니다. 썬이 3루를 파고들면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양키즈의 2선발을 상대로 선취점을 올릴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합격인 거야?”

“방금 전 플레이에 대해서는 합격입니다. 다만 저런 플레이를 다저스에서 꾸준히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저것 봐. 저런 식이라니까.”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로이 홀랜드 보좌역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가끔 저렇게 꽉 막힌 사람처럼 구는 건 정말 별로였다.

하지만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의 충동적인 판단을 막아야 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썬이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는 거 인정합니다. 하지만 국제 대회에서의 퍼포먼스가 메이저리그까지 이어진 경우는 손에 꼽힙니다.”

“어차피 썬은 아마추어 계약으로 데려오는 거잖아?”

“아마추어 계약이지만 지금 분위기상으로는 최소 300만 달러 이상을 줘야 할지도 모릅니다. 경쟁이 붙으면 계약금은 더 커질 테고요. 제임스. 이래도 썬의 영입에 찬성합니까?”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 제임스 터너 부단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제임스 터너 부단장이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최소 300만 달러라면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 우리가 쓸 수 있는 보너스 풀은 550만 달러가 전부니까요.”

메이저리그 노사 단체 협약에 따라 메이저리그 구단은 A, B, C 세 그룹으로 나뉘어 아마추어 유망주 계약금 총액을 제한받는다.

돈이 많은 빅마켓 구단에서 유망주들을 쓸어담는 걸 막기 위한 제도인데 양키즈, 레드삭스와 함께 가장 많은 사치세를 내고 있는 다저스는 C그룹에 속했다.

C그룹의 보너스 풀은 총 550만 달러.

국제 시장에서 아마추어 유망주를 영입할 때 계약금으로 총액 550만 달러를 넘길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여분이 얼마나 있지?”

“정확한 건 다시 알아봐야겠지만 지난번에 파악했을 때는 120만 달러 정도 남았습니다.”

“그것뿐이야?”

“중남미 시장의 유망주들은 최소 3년 이상 관찰하고 관리해 온 선수들입니다. 그래서 보다 확신을 가지고 투자할 수 있는 거고요.”

“확신은 무슨. 그래서 결과가 얼마나 나왔는데?”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를 기준으로 따졌을 때 국제 아마추어 시장을 통해 뽑힌 선수가 30퍼센트 이상입니다. 드래프트 다음으로 많죠.”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제임스 터너 부단장의 말을 두둔하듯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 수치를 언급했지만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속지 않았다.

현 메이저리그에서 합법적으로 유망주를 수급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드래프트 시장에 나온 유망주를 뽑거나.

국제 아마추어 시장의 유망주를 사서 데려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세계 각지에서 고생하는 스카우트들을 무시하려는 게 아냐. 다만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관찰한 선수 중에서 최근 5년간 25인 로스터에 들어간 선수가 있는지 묻는 거라고!”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언성을 높이자 제임스 터너 부단장과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국제 아마추어 시장에서 팀의 주전급 선수를 발굴해 내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려운 일이라지만 다저스는 그 정도가 심했다.

최근 5년간 계약한 해외 유망주들 중에 다저스의 기대만큼 성장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 데려올 때 뭐라고 했어? 충분히 지켜봤다며? 마이너리그에서 3년 정도만 성장시키면 메이저리그로 올라올 수 있다며?”

“앤드류. 그런 식으로 따지면 끝이 없습니다. 썬도 이번 올림픽만 잘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래. 썬은 아마추어 선수라 아직 제대로 분석이 되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건 다른 유망주들도 마찬가지 아니야? 최근 5년간 뽑은 유망주들 중에서 썬처럼 올림픽 대표팀으로 활약한 선수가 있어? 있으면 말을 해보라고.”

“앤드류. 진정해요. 썬에 대한 영입은 스카우트 팀의 최종 보고서가 올라온 다음에 진행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때 따악, 하는 파열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고.

동시에 세 사람의 시선이 TV 쪽으로 향했다.

-일본 대표팀의 유격수가 타구를 잡아냅니다.

-캄의 타구가 빠르고 강하게 날아갔는데요. 일본의 유격수가 길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미국 중계진의 담백한 해설에 이어 리플레이 화면이 나왔다.

볼 카운트 1-1 상황에서 바깥쪽으로 파고드는 슬라이더를 2번 타자 감백호가 결대로 밀어 때렸는데 타구가 하필 유격수 우에바야시 마사유키의 정면으로 날아가 버렸다.

투수를 자극한답시고 리드를 과하게 벌렸다면 3루 주자까지 잡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박유성은 타구 방향을 보기가 무섭게 곧바로 3루 베이스로 돌아왔다.

‘확실히 경기를 보는 눈이 좋아.’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또다시 터져 나오려는 감탄을 되삼켰다.

여기서 박유성을 더 추켜세웠다간 박유성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제임스 터너 부단장까지 반대편에 설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진 박유성의 주루 플레이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따악!

3번 타자 송현민이 밀어 친 타구가 좌익수 방면으로 뻗어 나가자 박유성은 곧바로 태그 업 플레이를 준비했다.

그러고는 좌익수가 공을 잡기가 무섭게 홈플레이트를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좌익수로 출전한 도노사키 료마가 다급히 홈으로 송구했지만.

촤라라라랏!

박유성은 홈플레이트를 향해 곧장 다리를 밀어 넣으며 포수 구와하라 세이지의 포구를 원천 봉쇄했다.

“제임스! 봤어?”

“네. 봤습니다.”

“저걸 보고도 내가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

한껏 신이 난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의 물음에 제임스 터너 부단장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처음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한국과 일본의 경기를 같이 지켜보자고 권했을 때는 무슨 꿍꿍이인가 싶었지만.

아직 1회 초 공격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보여준 박유성의 플레이는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을 흥분시킬 만했다.

선두타자로 나와 2루타성 타구 때 3루까지 훔쳐낸 것도 대단했지만 감백호의 유격수 직선타 때 3루로 재빨리 귀루한 것과 깊지 않은 좌익수 플라이 때 과감하게 홈으로 뛴 것 모두 인상적이었다.

만약 박유성이 송현민 정도의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선수라면 당장에라도 구매 리스트 최상단에 이름을 추가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현재 박유성은 아마추어 신분이었다.

포스팅 신청을 한 선수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빅마켓이라는 이유만으로 역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국제 아마추어 시장에서 박유성을 잡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일단 브랜든과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제임스 터너는 일단 브랜든 킹스턴 단장의 이름을 팔았다.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의 보좌역 출신으로 다저스의 단장이 된 브랜든 킹스턴이라면 이 골치 아픈 문제를 알아서 잘 해결할 것 같았다.

같은 시각.

올림픽이 열리는 LA의 반대편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양키즈의 브라이언 캐시 사장도 리플레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녀석, 이름이 뭐야?”

“저 선수가 썬입니다.”

“썬? 에릭이 말했던 그 썬?”

“네. 그렇습니다.”

“아마추어 선수라며?”

두 눈을 TV에 고정한 채로 되묻는 브라이언 캐시 사장을 보며 스티브 허슨 보좌역이 멋쩍게 웃었다.

“개인적으로 전 세계 아마추어 선수 중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브라이언 캐시 사장은 다시 TV 볼륨을 키웠다.

야구를 볼 때는 중계진들이 떠드는 헛소리는 무시하는 편이지만 방금 전 박유성의 플레이를 어떻게 봤을지 궁금해졌다.

-썬의 발이 빠른 건 앞선 베이스 러닝 때도 설명을 했는데요. 이번에는 영리한 베이스 러닝을 보여주었습니다.

-영리한 베이스러닝이요?

-이 장면하고 대비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대만전에서 동점을 만들 때 썬은 대만 포수의 뒤쪽 공간을 노리고 들어갔거든요.

-포수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나요?

-그보다는 포수의 태그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좌익수 앞으로 짧게 떨어진 안타였고 홈에서 접전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았거든요. 하지만 썬은 포수가 지키는 공간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파고들어 홈플레이트를 찍었죠. 하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이번에는 포수의 가랑이 사이로 슬라이딩을 했는데요.

-그것도 손이 아니라 발부터 들어가는 슬라이딩이었습니다. 마음이 급했다면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했겠지만 썬은 영리했습니다. 일본의 포수가 길목을 지킨 채 송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 알고 그대로 밀고 들어간 겁니다.

-일본의 포수가 포구를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세이프가 됐습니다만 다소 위험한 플레이로 보이는데요?

-그전에 구와하라의 포구 위치를 봐야 합니다. 홈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 주자의 영역을 비워두는 게 원칙인데 여기, 이렇게 오른발로 홈플레이트 앞을 막고 있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포수의 뒤로 돌아들어 가는 판단을 했다면 태그 아웃이 됐을 겁니다.

-그러니까 썬이 살기 위해서 최선의 판단을 했다는 거네요.

-바로 그렇습니다. 이번 득점은 한국의 영리한 1번 타자가 홀로 만들어낸 득점이나 다름없습니다.

미국 중계석은 박유성의 순간적인 판단이 좋았다고 칭찬했지만.

박유성은 송현민이 좌익수 쪽으로 타구를 날리기 전부터 홈 대시에 관한 모든 시뮬레이션을 끝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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