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40화
20. 병 주고 약 주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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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열린 올림픽 야구 조별 예선 6일 차 경기는 이변 없이 끝이 났다.
미국 대표팀은 도미니카 공화국 대표팀을 10 대 3으로 완파하며 A조 2위로 4강에 진출했고.
베네수엘라 대표팀도 캐나다 대표팀을 11 대 2로 누르고 전승으로 B조 1위 자리를 지켰다.
“미국하고 베네수엘라 중에 어디가 올라올까?”
“아무래도 미국이겠죠. 미국 선수들 이제 완전히 감 잡았던데요?”
“내일 미국 선발은 게릿 벌렌더지?”
“우리한테 지긴 했지만 1선발이니까 게릿 벌렌더가 나오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 미국을 어떻게 이긴 거냐?”
“그러게요. 이겼다는 기억만 있고 뭘 한 기억이 없어요.”
“그건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기억이 없는 게 아닐까?”
“형. 팩폭 자제 좀요.”
하루 일찍 예선 일정을 마무리 지은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의 표정은 밝았다.
1차 목표인 메달 획득까지 필요한 건 단 1승.
4강전에서 지더라도 3, 4위전이 남아 있는 만큼 예선 풀리그 때보다는 확실히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4강 상대는 숙명의 라이벌이자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이었다.
“일본 선발은 마츠다 유이토겠지?”
“순서상으로는 그렇겠죠. 니키타 쇼우 카드는 못 쓰잖아요.”
니키타 쇼우가 예정대로 베네수엘라전에 등판했다면 4강전 깜짝 선발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지만.
푸에르토리코전에 나오면서 4강전 등판은 물 건너갔다.
“그런데 니키타 쇼우보다 마츠다 유이토가 더 나은 거 맞아요?”
“실력적으로는 마츠다 유이토가 위지. 메이저리그 짬이 있잖아. 대신 그만큼 우리도 많이 겪어봤으니까 편하긴 할 거야.”
“푸에르토리코전 보니까 니키타 쇼우도 그냥 그렇던데?”
“그런 얘기는 올림픽 타격 1위를 달리고 있는 유성이나 할 수 있는 소리고. 넌 안타부터 쳐라.”
선발 출장한 경기가 도미니카 공화국전뿐이라 총타석은 적었지만.
박유성은 0.667(6타수 4안타)의 타율로 올림픽에 참가한 모든 타자들 중에 가장 높은 정확도를 뽐내고 있었다.
강기태 감독이 4강전과 메달 결정전에서 박유성을 선발 출전시키겠다고 공언한 만큼 지금 페이스만 유지한다면 올림픽 야구 타격왕 타이틀도 가능한 상황.
“그런데 유성이는 어디 갔어?”
“글쎄요. 아까 준수하고 어디 가던데요?”
“준수하고?”
박유성에게 마츠다 유이토에 대해 알려주려 했던 기정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박유성 껌딱지라 불리는 민병규도 아니고 조용한 박준수가 박유성을 따로 챙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봉정근 투수 코치가 선수들에게 다가왔다.
“찬우 본 사람 없어?”
“찬우요? 못 봤는데요?”
“그래? 이 녀석 어디 간 거야?”
봉정근 투수 코치가 다시 몸을 돌려 송찬우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 시각.
송찬우는 박유성과 함께 박준수에게 음료수를 얻어먹고 있었다.
“찬우 너는 아메리카노지? 여기.”
“어. 그래.”
“유성이 너는 에이드 마셔.”
“저 커피 시켰는데요?”
“커피 마시면 밤에 잠 안 와.”
“그럼 나는 왜 커피 주는데?”
“네가 커피 마시겠다며?”
“저는요?”
“넌 안 된다니까.”
뜬금없이 불러다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박준수를 보며 송찬우는 미간을 찌푸렸고 박유성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준수는 두 사람과 친하게 지내라는 임세영 대리의 숙제에 집중했다.
“그런데 갑자기 음료수는 왜 산다는 거야?”
“그냥. 내일 잘하라고.”
“넌 아시안게임 다녀왔잖아?”
송찬우와 임찬기를 두고 고민이 많았지만 강기태 감독은 당초 순서대로 송찬우를 4강전에 등판시키기로 했다.
일본 대표팀을 상대로 좌투수를 내세워 재미를 보던 시절도 지났고.
노림수가 좋은 일본 대표팀 타자들에게는 투 피치에 가까운 임찬기보다 다양한 구종을 수준급으로 던지는 송찬우가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이번 올림픽에서 병역 혜택을 노리는 선수들이 송찬우에게 따로 부탁의 말을 전하곤 했지만 박준수는 사정이 달랐다.
2년 전 아시안게임 때 자신과 함께 대표팀에 발탁되어 병역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잠시 할 말을 잃은 박준수가 박유성을 들먹였다.
“유성이는 안 갔다 왔잖아.”
“유성이는 이번 올림픽 아니더라도 기회 많은데?”
“그래도 기왕이면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게 좋지.”
“그런데 그걸 네가 왜 말해?”
“왜긴. 유성이도 내 후배니까 그렇지.”
“후배? 너 신성고 아니잖아?”
“대표팀 후배잖아. 야구 후배고.”
박준수가 이번에는 그럴듯한 핑계를 댔지만.
오지랖 넓은 민병규도 아니고 그런 민병규를 한심스러워하던 박준수이다 보니 오히려 더 의심이 갔다.
“뭐냐?”
“뭐가?”
“솔직히 말해. 너 갑자기 왜 그래? 구단에서 무슨 얘기 들었어?”
“아니? 아무 얘기도 안 들었는데?”
송찬우가 미심쩍은 눈으로 박준수를 째려봤지만 박준수는 눈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어색해 보이던지 중간에 끼어 있던 박유성이 다 멋쩍어질 정도였다.
‘이 형들은 여전히 안 친하구나.’
대표팀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송찬우와 박준수가 싸웠다고 오해를 하겠지만 실제 두 사람은 1회차 때도 2회차 때도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애당초 투수 파트와 야수 파트는 부딪칠 일이 많지 않은 데다가 둘 다 과묵한 편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거나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런 두 사람을 챙겨주는 동기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박준수 옆에는 고교 시절부터 라이벌로 묶였던 민병규가 있고.
송찬우도 사교성 좋은 임찬기가 대신 대변인 노릇을 해왔다.
‘그러고 보니까 넷이 동기였지?’
뭔가를 떠올린 박유성이 씩 웃었다. 그러고는 빨대로 에이드를 한 모금 쪽 빨며 말했다.
“그런데 형들 동기죠? 고등학교 때는 누가 더 잘했어요?”
툭 하고 던진 그 한마디에 송찬우와 박준수가 눈싸움을 풀고는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내가 더 잘했지.”
“유성아. 물어볼 걸 물어봐라. 당연히 형이지.”
서로 자신이 낫다며 우기던 두 사람은 박유성의 한마디에 다시 열을 냈다.
“그럼 병규 형이 제일 잘한 건 맞아요?”
“누구? 병규?”
“여기서 병규가 왜 나와?”
“병규 형이 그러던데요? 고교 시절 원탑이었다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병규 형 보려고 티켓 끊고 줄을 섰었다고.”
민병규가 반농담으로 했던 말에 MSG를 살짝 치자 송찬우와 박준수가 동시에 코웃음을 쳤다.
“병규는 나보다도 못했어.”
“그건 인정. 준수는 그래도 내 공을 맞히기라도 했는데 병규는 건드리지도 못했을걸?”
“그럼 찬기 형은요?”
“찬기보다는 찬우가 더 위였지.”
“웬일이야? 지난번에는 찬기가 낫다더니?”
“슬라이더 한정이었어. 슬라이더는 찬기가 더 잘 던졌잖아.”
“내 슬라이더도 나쁘지 않았거든?”
“그럼 타자 중에서는 준수 형, 투수 중에서는 찬우 형이 최고였던 거죠?”
“그래. 맞아.”
“우리 둘 중에서는 내가 좀 더 나았고.”
“한판 뜰래?”
“콜. 유성아. 네가 심판 봐라. 나중에 딴소리 안 나오게.”
“그런데 형들 진짜 안 친한가 보네요. 설마 고교 시절에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혹시나 앞선 회차에서 듣지 못했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까 싶었는데 송찬우와 박준수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은 무슨. 그냥 학교가 달라서 안 친한 거야.”
“준수하고 병규는 서울이었고 나하고 찬기는 광주거든.”
“찬우 형 광주에서 학교 다니셨어요?”
“몰랐어? 찬우하고 찬기 둘 다 광일고 나왔어. 그런데 재수 없게 찬우가 파이터즈에 끌려갔지.”
“말 참 예쁘게 한다?”
“네가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2023년에 실시된 드래프트(2024 드래프트) 당시 타이거즈는 연고 지역 최대어인 송찬우와 임찬기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둘 중 한 명을 우선 지명으로 뽑으면 나머지 한 명은 놓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교 리그에서의 평가는 송찬우가 조금 더 나았지만.
타이거즈는 좌완 에이스 계보를 이어줄 임찬기를 선택했고.
송찬우는 뒤늦게 프로야구 판에 뛰어든 파이터즈의 우선 지명 선수로 호명됐다.
“솔직히 너 파이터즈에 갈 줄은 꿈에도 몰랐잖아.”
“당연하지. 파이터즈가 갑자기 만들어졌으니까. 솔직히 난 스타즈 갈 줄 알았어.”
창단 당시 스타즈와 파이터즈는 연고 지역과 상관없이 10개 구단의 우선 지명 이후 남은 선수 중에 두 명을 선발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타이거즈의 우선 지명을 받지 못했던 송찬우는 2024 드래프트 전체에서도 첫손에 꼽히던 최고의 유망주였고 스타즈가 무조건 데려갈 거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정작 스타즈는 덕우 고등학교 김정석과 신성 고등학교 나현호를 지명했다.
“그래서? 아쉽냐?”
“뭔 소리야?”
“스타즈 못 와서 아쉽냐고.”
“아쉽지. 네가 나보다 연봉을 더 받는다는 게 말이 되냐?”
올 시즌 송찬우가 파이터즈에서 받는 연봉은 3억 5천만 원.
반면 박준수는 민병규와 함께 6억을 받고 있었다.
WAR만 놓고 봤을 때 송찬우가 박준수보다 근소하게 높았지만 정작 연봉은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그러게 좀 더 받지 그랬냐.”
“내가 안 받고 싶어서 안 받았을까?”
“너 에이전트도 없이 바로 계약한다며?”
“에이전트 비용도 아까워서 나 혼자 하는 거야. 에이전트 써봐야 달라질 것도 없고.”
송찬우의 푸념을 듣던 박유성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선 1회차 시절과 2회차 시절의 재계약 PTSD가 온 것이다.
파이터즈 유니폼을 27년간 입었지만 단 한 번도 성에 차는 계약을 해본 적이 없었다.
‘3할 치면 100퍼센트 인상해 준다고 해서 3할 쳤더니 딴소리하고. 골글 타면 100퍼센트 인상해 준다고 해서 골글 탔더니 딴소리하고.’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파이터즈 프런트를 떠올리면 지금도 혈압이 올랐다.
그러자 송찬우가 박유성을 보며 말했다.
“유성이 너는 걱정하지 마. 파이터즈에서 널 지명할 일은 없을 거니까.”
“뭐 들은 거 있으세요?”
“파이터즈 재정 상황이 안 좋은 건 너도 알고 있지? 아마 이번 1라운드 1순위 지명권도 다른 구단에 팔 거야. 파이터즈 팬들은 너 뽑아서 성적 좀 내보자고 하는데…… 넌 다른 팀 가라. 그게 한국 야구를 위해서도 나아.”
“무슨 뻔한 얘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해? 유성이는 당연히 우리 팀 와야지. 원래 우리 팀 지역 선수인데.”
박준수가 별걱정을 다 한다며 끼어들었다. 민병규처럼 야구 커뮤니티들을 찾아다니지는 않지만 박준수도 스타즈 팬들이 박유성을 원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 제발 우선 지명으로 유성이 데려가라. 스타즈에는 유성이 자리 있잖아?”
“유성이 자리야 없어도 만들어야지. 유성이 걱정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뭔 소리야?”
“그냥. 혹시라도 파이터즈에서 널 서울 팀으로 트레이드 할 수도 있잖아.”
“……?”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너 솔직히 말해. 뭐 들은 거 있지? 그렇지?”
송찬우가 다급히 박준수의 팔뚝을 잡았다. 그러자 박준수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핸드폰을 꺼냈다.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아는 게 없거든.”
“뭔 소리야?”
“그리고 이거 내가 보여준 거 아니다. 찬우 네가 우연히 본 거야.”
“……?”
박준수가 내민 핸드폰을 잠시 훑던 송찬우가 뒤늦게 눈을 치떴다. 그러고는 임세영 대리의 메시지를 곱씹더니 뭔가를 깨닫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보내달라고 할 때는 안 된다고 하더니 이런 식으로 팔아먹네.”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어쩐지. 준수 네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나 했다.”
“크흠. 암튼 혹시라도 한솥밥 먹게 된다면 잘 지내보자.”
“내가 미쳤냐? 너하고 잘 지내게?”
박준수가 수줍게 내민 손을 밀친 송찬우가 박유성을 보며 말했다.
“유성이 너하고 같은 팀에서 뛰고 싶었는데 잘됐다. 네 덕에 형도 우승 반지 한번 껴보자.”
“……?”
“야. 유성이한테 그걸 보여주고 말해야지.”
“뭐야? 유성이 너 같이 안 봤어?”
“네 덩치가 얼마나 큰데 옆에서 본다고 보이겠냐?”
박준수가 혀를 차며 박유성에게 핸드폰을 내밀었고.
뒤늦게 메시지를 확인한 박유성의 입가에도 안도의 웃음이 번졌다.
‘그래. 인생 3회차인데 3연속 꽝은 너무하잖아.’
4강에서 탈락했던 올림픽 성적을 바꿔놓았으니 이번 3회차 때는 구단 지원이 좋은 스타즈에서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