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38화
20. 병 주고 약 주고(4)
안재희 운영팀장은 고개를 돌려 식당을 한번 훑어봤다.
30개가 넘는 테이블에 스타즈 팬들이 모여 앉아 웃고 떠들며 소리 지르는 모습을 상상하니까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암튼 사장님. 저희만 믿고 계세요.”
“오케이! 기분이다! 소주는 내가 쏜다!”
“사장님 최고~”
능청스럽게 사장 사내의 비위를 맞춘 임세영 대리가 서비스가 된 소주를 따며 말했다.
“이래도 제가 홍보팀 갔으면 좋겠어요?”
“넌 운영팀이 딱이다.”
“그걸 이제 아셨어요?”
임세영 대리가 웃으며 소주를 따랐다.
그냥 보기 좋게 잔만 채워놓으려 했는데 안재희 운영팀장이 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안 드신다면서요?”
“오늘 같은 날 마셔야지 또 언제 마셔?”
“그럼 짠이라도 하시죠.”
“그건 트레이드 승인 떨어지고 나서 하자.”
“승인 떨어지겠죠. 다른 구단들은 다 해줘놓고 우리만 안 해주는 게 말이 돼요?”
2년 전 다이노스가 파이터즈에게 1라운드 지명권을 현금 10억에 샀을 때 프로 야구 협회에서 거부할 거란 의견이 많았다.
현금 트레이드를 지양하는 프로 야구 협회 원칙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2개 구단 체제를 안정화시켜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던 프로 야구 협회는 운영비가 부족하다는 파이터즈 구단의 사정을 외면하지 못했다.
“다이노스도 트윈스도 다 했잖아요? 심지어 백업도 아닌 2군 선수들을 내줬고요.”
“그나마 트윈스는 좀 나았지. 2라운드 지명권까지 줬으니까.”
“그래 봤자죠. 파이터즈가 지금껏 뽑아 간 유망주가 몇 명인데요?”
“그래도 김민철은 괜찮게 하잖아?”
“파이터즈니까 괜찮아 보이는 거예요. 냉정하게 김민철 우리 팀에 오면 주전으로 쓴다 안 쓴다?”
“못 쓰지.”
“그거 봐요. 박유성 선수하고는 포텐 자체가 다르다니까요?”
지난해 트윈스에게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양도하고 받은 2라운드 지명권으로 파이터즈는 경암대학교 외야수 김민철을 지명했다.
수비력은 좋지만 공격력이 애매해서 하위 라운드 지명이 유력했는데 파이터즈가 먼저 선수를 쳐버린 것이다.
물론 기대 순위 자체가 낮았던 선수이다 보니 계약금은 타 구단 5라운드 선수보다 적게 받아야 했지만.
김민철은 올해 주전 좌익수로서 나쁘지 않은 한 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크으. 달다. 달아.”
뒤이어 소주잔을 들이켠 임세영 대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예전에는 술이 맛있다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박유성이 온다고 하니까 술이 정말로 달달하게 느껴졌다.
“적당히 마셔라. 너 쓰러지면 나 책임 못 진다.”
“소주 세 병까지는 끄떡없거든요? 그런데 팀장님. 김 단장님 말이에요. 왠지 우리처럼 술 한잔하고 있을 거 같지 않아요?”
“속이 쓰려서?”
“속이 쓰릴 게 뭐가 있어요? 20억이나 받았는데. 게다가 선발 자원을 둘이나 받았잖아요. 이 정도면 남는 장사 아니에요?”
이번 트레이드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 파이터즈 팬들은 뒷목을 잡고 쓰러질지 모른다.
돈 몇 푼 벌자고 올림픽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 박유성을 뽑을 수 있는 권리와 에이스 송찬우를 한꺼번에 팔아 치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이터즈 구단의 정상화를 위해 내려온 김경민 단장은 이번 트레이드를 통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일단 20억이라는 구단 운영 자금을 챙겼고.
내년 시즌이면 해외로 보내줘야 할 송찬우를 대신해 파이터즈의 마운드를 책임질 투수를 두 명이나 얻었다.
야구도 모르는 단장이 와서 지명권 장사나 한다는 오명은 벗기 어렵겠지만 운영비도 챙기면서 팀 전력을 보강했으니 스몰 마켓 구단의 단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송찬우 선수가 내년에 해외 진출할 때 이적료까지 챙기면 아마 팬들의 평가가 바뀌겠지. 하지만 당분간은 거의 매국노 수준으로 욕을 먹을 거야.”
“스포츠 구단 단장 중에 욕을 안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요. 구단 프런트들도 욕먹는 게 일상이잖아요?”
임세영 대리가 빈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그러자 안재희 운영팀장이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하시게요?”
“너 취하면 감당 못한다니까.”
“안 취한다니까요. 저 술 세요오~”
“술부심 부리는 사람들치고 술 센 사람 못 봤다.”
“칫.”
임세영 대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도발을 했다면 누가 죽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덤벼들었을 텐데.
자신의 모든 걸 다 지켜본 사수이다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리 팬들은 좋아하겠죠?”
“이번 트레이드? 글쎄. 우리도 욕 좀 먹지 않을까?”
“박유성 선수에 덤으로 송찬우 선수까지 데려왔는데 욕먹으면 좀 억울할 것 같은데요?”
“모든 팬들을 만족시키는 트레이드는 없으니까. 홍형태 선수와 조우진 선수 팬들은 아쉬울 테고.”
“걱정되세요?”
임세영 대리가 술잔을 들며 물었다. 트레이드에 대한 모든 책임은 김재식 단장이 지겠지만 그 트레이드를 물밑에서 도운 운영팀에도 불똥이 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안재희 운영 팀장이 그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걱정돼?”
“솔직히요?”
“그럼. 술 마셨는데 솔직해져야지.”
“엄청나게 걱정돼요.”
“뭐가 엄청나게 걱정이 되는데?”
“전부 다요. 이번 트레이드를 두고 팬들에게 욕먹는 것도 걱정이고 언론에서 멋대로 떠드는 것도 걱정돼요. 스카우트 팀에서 지랄하는 건 그냥 넘길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전후 사정도 모르고 월권이네 뭐네 뒤에서 쑥덕거리는 거 무진장 신경 쓰일 거 같아요.”
* * *
신성 그룹 본사에서 돌아온 김재식 단장은 곧바로 안재희 운영팀장을 호출했다.
그리고 신상욱 회장의 의지를 전했다.
“그럼 1라운드 지명권을 사서 박유성 선수를 뽑는 겁니까?”
“일단 계획은 그렇습니다. 안 팀장 생각은 어때요?”
“저야 무조건 찬성입니다. 솔직히 다른 팜 선수도 아니고 신성 고등학교 선수인데 이대로 놓치는 건 팬들에 대한 기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재희 운영 팀장은 단순히 1라운드 우선 지명권을 트레이드 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김재식 단장은 자신을 철저하게 엿 먹이려 들었던 스카우트 팀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스카우트 팀에서 고윤식 선수와 배현우 선수를 뽑으려 한다는 사실,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단장님 오시면 보고드리려고 했었습니다.”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네요.”
“아시다시피 선수 선발은 스카우트 팀 고유 영역이라서요. 게다가 올해는 박유성 선수 때문에 말이 많아서 더 조심스러웠고요.”
“참고로 회장님도 알고 계십니다.”
“……네?”
“회장님께 혼나고 오는 중이라고요. 그러니까 일을 수습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판을 다시 짜야 합니다.”
“다시라 하시면……?”
“썩은 고름도 짜내야죠. 모든 걸 갈아엎을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
안재희 운영팀장은 순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전임 단장의 배임으로 구단이 물갈이가 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모든 걸 갈아엎겠다니.
구단에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칠 것 같았다.
하지만 안재희 운영팀장은 스타즈를 위해 힘을 보태 달라는 김재식 단장의 요청을 외면하지 못했다.
“파이터즈 구단에서 원하는 건 운영 자금입니다. 하지만 운영 자금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운영 자금이 필요한 근본적인 원인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모기업의 지원이 적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림에서 지원을 안 하는 건 아닙니다. 다른 대기업들처럼 넉넉하게 지원하지 않을 뿐이죠.”
태산 그룹이 12구단 창단을 최종 포기하면서 프로 야구 협회에는 비상이 걸렸다.
목표였던 양대 리그 체제 개편을 위해서는 12개 구단이 필수인데 당장 유치를 희망하는 기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경련까지 나서서 여력 있는 기업들의 의사를 타진한 끝에 재계 30위권인 한림 그룹이 파이터즈를 창단하기로 결정했다.
프로 야구 협회는 대한민국 야구계가 한 단계 더 도약했다며 양대 리그 체제 전환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실상 울며 겨자 먹기로 파이터즈를 만든 한림 그룹은 야구단에 필요 이상의 지원을 해줄 생각도 여력도 없었다.
“아시겠지만 한 해 야구단 운영비는 200억이 넘습니다. 보통은 그 절반 이상을 모기업에서 부담하고 있고요. 파이터즈 구단은 초반 3년간 프로 야구 협회에서 연간 20억에 달하는 운영비를 지원받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지방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신생 구단이다 보니 협회도 관중 수익 부족으로 인한 손해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설마 한림에서 그 돈을 빼고 지원한 겁니까?”
“네. 한림의 계산은 간단했습니다. 3년쯤 지나면 구단도 자리를 잡을 테고 관중들도 늘어날 테니 20억은 충분히 메울 수 있을 거라고요. 하지만 파이터즈 구단은 관중 동원 능력이 12개 구단 최하위입니다. 원정 경기에서도 3루 쪽 응원석이 채워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요.”
12개 구단 체제로 접어들면서 경기당 관중 수익은 홈 팀과 원정 팀이 75 대 25로 나눠 가지는 걸로 바뀌었다.
기존보다 원정팀의 수익이 조금 줄어든 데다가 파이터즈의 홈구장인 파이터즈 파크도 기존의 1만 석 규모의 야구장을 리모델링해서 사용하는 중이라 관중 수익을 늘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프협의 지원금이 끝나면서 파이터즈의 운영 악화가 가속화됐습니다. 전임 단장은 그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임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의 김경민 단장이 부임했죠. 그리고 김경민 단장은 드래프트 1라운드 우선 지명권 거래를 통해 구멍 난 운영비를 채우는 중입니다. 하지만 지명권을 파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구단 운영을 정상화하려면 일단 성적을 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거든요.”
“그러니까 만성 적자를 해결하려면 모기업에서 더 투자를 하든가 팬들이 많이 찾아와야 하는데 결국 성적을 내야만 해결이 된다는 얘기로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돈이 곧 성적인 프로야구 판에서 투자 없이 성적을 내라는 건 공염불에 가깝습니다.”
“우리 구단도 12개 구단 중에 가장 많은 지원을 받고 있지만 아직까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죠.”
“네. 게다가 파이터즈는 송찬우 선수의 연봉도 부담스러울 겁니다. 명색이 국가 대표 우완 에이스인데 연봉은 그만큼 챙겨주지 못하고 있거든요.”
“송찬우 선수의 연봉을 많이 올리면 다른 선수들도 올려달라고 난리겠죠.”
“파이터즈 팬들은 송찬우 선수가 파이터즈 소속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겠지만 김경민 단장은 계륵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송찬우 선수가 있다고 해서 파이터즈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송찬우 선수가 우리 팀에 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죠.”
“네? 저희 팀에요?”
“송찬우 선수가 계륵이라면서요? 그럼 우리가 적정한 값을 치르고 데려오면 좋지 않을까요?”
파이터즈 김경민 단장의 딜레마를 설명하려 했던 안재희 운영팀장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파이터즈에서 지명권을 사서 박유성을 영입하는 것만으로도 내년 시즌이 기대가 될 지경인데 송찬우라니.
이건 판이 커져도 너무 커졌다.
“송찬우를 데려오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현금만으로는 안 될 겁니다.”
“현금을 늘리고 쓸 만한 선수를 내주면 어떻겠습니까?”
“쓸 만한 선수요?”
“우리 팀 입장은 생각하지 말고 철저하게 파이터즈의 입장에서 찾아보세요. 참고로 올 시즌이 끝나는 대로 스카우트 팀은 전면 개편할 예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감독이 바뀔 수도 있고요.”
“……!”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죠. 제가 맡은 임무가 바로 새 술을 담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새 부대라고 생각했던 게 새 부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부분을 도려내고 기워 쓰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 팀장님이 저 좀 도와주세요.”
김재식 단장의 속내를 읽은 안재희 운영팀장은 믿을 수 있는 멤버들만 불러 모았다.
자신이 처음부터 운영팀의 일을 가르친 임세영 대리를 시작으로 1군 운영을 총괄하고 있는 최영수 차장과 조명욱 대리까지.
이렇게 넷이서 머리를 맞대 김경민 단장이 혹할 만한 판을 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