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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137화 (137/412)

타자 인생 3회차! 137화

20. 병 주고 약 주고(3)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야 가게를 나온 김재식 단장은 다시 차를 돌려 스타즈 구단 사무실로 향했다.

“이제 끝나셨습니까?”

반쯤 불이 꺼진 사무실에는 안재희 운영팀장과 임세영 대리가 앉아 있었다.

“아직 퇴근들 안 했어요?”

“단장님께서 큰일을 하시는데 저희만 어떻게 퇴근을 하겠어요. 그렇죠, 팀장님?”

“네. 저는 집에 가고 싶었는데 임 대리가 단장님 기다리자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근무 시간 끝났으면 집에 가서 쉬셔야죠.”

“어차피 올림픽 브레이크잖아요. 시즌 중에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도 좀 이상하더라고요. 약간 백수 된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게 초안인가요?”

“네. 여기요.”

김재식 단장이 손에 든 계약서 초안을 임세영 대리에게 넘겼다. 그러자 임세영 대리가 냉큼 서류를 꺼내 안재희 운영 팀장 옆으로 붙어 섰다.

“일단 금액은 20억이네요?”

“안 팀장 전략이 적중했습니다. 찔끔찔끔 부르지 말고 최대 금액을 제안하자는 거요.”

“본래 도박판에서는 돈 많은 사람이 큰소리치는 법이죠. 물론 단장님이 화투를 잘 치셨겠지만요.”

“전 화투 말고 카드 좋아합니다.”

“그럼 얼마나 카드를 잘 치셨나 볼까요?”

시선을 아래로 내리던 안재희 운영 팀장이 송찬우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씩 웃었다.

지난 몇 년간 최하위를 도맡아 오고 있긴 하지만 파이터즈의 승률은 4할에 근접했다.

다시 말하자면 10경기 중 4경기를 이길 만큼의 전력은 갖췄다는 이야기.

파이터즈 선수들 중에서도 다른 구단이 군침을 삼키는 이들이 더러 있겠지만 스타즈가 욕심나는 선수는 딱 한 명뿐이었다.

소년 가장 송찬우.

파이터즈 소속이 아니었다면 투수 골든 글러브를 한 번쯤은 차지했을 대한민국 대표팀 우완 에이스.

내년 시즌이 끝나면 해외로 떠날 거라는 생각에 다들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던 그 송찬우를 데려왔으니 안재희 운영팀장의 입이 찢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송찬우 선수 달라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당황해하더라고요. 그래서 송찬우 선수를 대신할 선수들을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홍형태 선수 얘기 꺼내니까 반응이 어땠어요?”

“놀라더라고요. 설마하니 에이스 카드끼리 맞바꾸자는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겠죠.”

흔히들 국내 선발 투수들 중 가장 잘 던지는 선수를 가리켜 토종 에이스라 부르지만 토종 에이스라고 해서 다 똑같은 토종 에이스가 아니었다.

송찬우는 다른 팀 팬들조차 인정하는 에이스 투수.

외국인 용병 투수들과 맞붙여도 밀리는 법이 없었다.

반면 홍형태는 스타즈에서 억지로 밀어주고 키워주던 투수였다.

그 덕분에 국내 선발 투수들 중에서는 첫 순위로 꼽히긴 했지만 아직 에이스라 불릴 만큼의 안정감은 없었다.

하지만 구색만 놓고 보자면 에이스 카드인 셈.

“아마 김경민 단장은 홍형태 선수에게 꽂혔을 겁니다. 송찬우 선수만큼은 아니지만 파이터즈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선발 투수니까요.”

“그럭저럭 10승은 해줄 수 있고 해외 진출 자격은 낮고 생각보다 연봉은 높지 않은 투수라는 거죠?”

“게다가 홍형태 선수, 전주 제일고 출신이야.”

“그래요? 사투리 하나도 안 쓰던데요?”

“요즘은 지방에서도 사투리 잘 안 써. 암튼 고등학교 시절에는 구속이 나오지 않아서 파이터즈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고향팀 가면 좋은 거겠지.”

“그건 너무 우리 편할 대로 아니에요?”

“그럼 그렇게 포장해야지 어쩌겠어? 송찬우 선수가 오는데.”

“하긴. 저도 홍형태 선수 좋아하긴 하지만 송찬우 선수한테는 안 되죠. 송찬우 선수는 인성도 좋잖아요?”

“홍형태 선수는 인성 별로고?”

“이제 다른 팀 선수인데 뭘 그런 걸 따져요?”

괜히 말을 돌린 임세영 대리가 김재식 단장을 바라봤다.

“조우진 선수는 어땠어요?”

“조우진 선수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계약서가 나온 거고요.”

“아마 군필이라 더 좋아했을걸요? 파이터즈 신인들은 전부 아시안 게임 TO 노리고 군대 안 가잖아요.”

1군 경쟁에서 밀린 선수들은 일찌감치 병역을 해결하는 추세지만 파이터즈 선수들은 달랐다.

선수층이 얇은 데다가 1군 선수들 상당수가 FA를 통해 이적을 꿈꾸고 있다 보니 주전 경쟁을 통해 아시안 게임을 노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민찬수 선수도 그 덕분에 올림픽 차출된 거잖아.”

“이대로 진행되면 다음 아시안 게임 때는 홍형태 선수 밀어주겠죠?”

“간 좀 보겠지만 아마 그렇게 하지 않을까? 홍형태 선수는 해외 진출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잖아.”

“저는 영어 울렁증이라는 게 실제로 있는 건 줄 처음 알았어요.”

홍형태의 증상은 흔히들 영어가 약할 때 변명처럼 쓰는 영어 울렁증이 아니었다.

외국인 선수가 영어로 말만 걸어도 표정이 굳어지고 뒤돌아서 도망을 칠만큼 영어라면 질색을 했다.

어렸을 때 홍형태를 영재로 키우고 싶었던 부모님이 일주일간 영어 마을에 강제로 보내면서 생겼다는데 그때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메이저리그 진출을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다.

“그런데 홍형태 선수 말입니다. 일본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김재식 단장이 의문을 제기했다. 김경민 단장 앞에서 메이저리그 도전은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쳤지만 해외 리그가 미국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자 임세영 대리가 씩 웃으며 말했다.

“홍형태 선수 일본 엄청 싫어해요.”

“왜요?”

“집안에 독립운동하신 분이 있다고 하던데요? 일제 시대 때 가족들이 다 고생을 했다고요.”

“오호. 그런 내력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아무튼 조우진 선수도 파이터즈 가는 게 이득일 겁니다. 내년에 김혜성 선수 들어오면 자리가 없잖아요.”

현재 조우진은 스타즈의 5선발로 뛰고 있다.

본래 좌완 불펜을 보강하기 위해 데려 왔지만 체력도 좋고 구위도 나쁘지 않아서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간 상태였다.

하지만 현재 대학 리그를 씹어먹고 있는 좌완 김혜성이 합류한다면 조우진의 자리는 다시 애매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우진 입장에서도 김혜성이 아니라 우완인 고윤식이나 나해준이 뽑히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터.

“트레이드 확정됐을 때 잘 설명해 주면 고마워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럼 이대로 정식 보고서 만들까요?”

“네.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추가로 보낼 선수는 파이터즈에서 내일까지 답을 준다고 했으니까 오는 대로 바로 협회에 보내시고요.”

“알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단장님.”

“수고는요. 그럼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김재식 단장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홀로 단장실에 앉아서 이번 트레이드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해볼 생각이었는데 웃음이 가시질 않는 안재희 운영팀장과 임세영 대리의 모습을 보니까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김재식 단장이 사무실을 나가자 안재희 운영팀장이 서류를 임세영 대리에게 넘겼다.

“복사해서 나 한 부 주고 사장님께 올릴 보고서는 네가 만들어라.”

“팀장님은 협회에 보낼 요청서 만드실 거죠?”

“그건 내가 만들어야지. 너한테 맡겼다가 지난번처럼 실수하면 어쩌려고?”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까지 그러세요?”

“너도 틈만 나면 승철 씨한테 잔소리하잖아.”

“제 사수한태 배운 대로 하는 건데 불만 있으세요?”

“내가 언제 그렇게 가르쳤냐?”

“와, 저 깨톡 백업받아놓은 거 있는데 증거 까요? 저 갈구고 미안하다고 깨톡 보낸 것만 천 번은 될 텐데?”

“천 번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보고서 빨리 써. 끝나고 해장국이나 먹으러 가자.”

“팀장님이 쏘시는 거죠?”

“언제는 네가 쐈냐?”

대리 달고 머리가 굵어지긴 했지만.

안재희 운영팀장은 임세영 대리가 기특하고 고마웠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까지 남아서 희소식을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구단에 대한 애정과 업무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는 방증이었다.

덕분에 안재희 운영팀장도 쉼표 하나까지 신경 써야 하는 트레이드 요청서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잔업을 마치고 안재희 운영팀장과 임세영 대리는 구단 앞 24시간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이모. 여기 소주도 한 잔 주세요!”

“무슨 술을 시켜?”

“야근하면 소주 일병이 국룰이죠. 팀장님 요즘 너무 몸 사리시는 거 아니에요?”

“너도 나중에 결혼해 봐라. 퇴근 시간도 늦는데 술까지 마시고 들어오면 누가 좋아하겠냐?”

“이야, 우리 팀장님 애처가네요. 애처가.”

“애처가는 무슨. 그보다 너는 연애 안 해?”

“저 연애 끊었다니까요?”

“아니, 뭘 했어야 끊지.”

“팀장님 모르게 뒤에서 다 했죠. 그런데 별로 재미없더라고요.”

“이렇게 사는 건 재미있고?”

“그럼요. 재미있으니까 자처해서 야근하죠. 제가 뭐 팀장님 좋아서 야근했을까 봐요?”

“그래. 일하는 게 재미있다니 다행이다.”

처음 임세영이 스타즈에 입단했을 때는 야구의 야 자도 모르는 신입이었다.

신성 그룹에 입사했다가 스타즈로 발령이 났다던가.

똑 부러지게 생긴 게 워라벨을 엄청나게 챙길 느낌이라 보나마나 부서 이동 신청을 하거나 때려치우겠거나 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부하 직원이 되어 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야. 아무것도.”

“에이. 또 그 생각하셨죠?”

“무슨 생각?”

“예전에 다른 팀장님들하고 내기하셨다면서요. 며칠이나 버티나 하고요. 그때 며칠이라고 하셨죠? 2주? 3주?”

“1주일.”

“진짜 팀장님 사람 볼 줄 모르신다.”

“사람 볼 줄 모르기는. 너 악바리처럼 일 잘하게 생겨서 내가 억지로 운영팀으로 데려온 거 잊어버렸냐?”

본래 임세영 대리는 마케팅부 소속이었다.

야구단 생활에 적응하고 나서는 신입답지 않게 구단의 매출 증대를 위해 이런저런 아이디어도 내놓곤 했는데 전임이었던 마케팅팀장이 그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잡히고 괴롭힘당하는 게 안쓰러워서 안재희 운영팀장은 큰마음 먹고 임세영 대리를 빼 왔다.

그때는 둘 사이에 뭐가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지만.

지금은 차기 홍보팀장 후보로 거론될 만큼 제 능력을 마음껏 뽐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너 정말로 홍보팀 갈 생각 없어?”

“제가 왜요?”

“송 팀장 이직 준비 중이라잖아. 기왕이면 네가 가는 게 낫지.”

“제가 가면요? 팀장님은 누구하고 야근하시려고요? 그리고 거긴 팀원들 없어요? 다들 승진 욕심이 있을 텐데 제가 팀장 자리 꿰차면 절 좋아 하겠어요?”

“그래도 홍보팀 일이 편하지 않겠냐?”

“팀장님은 여자들의 세계를 몰라도 너어무 모르신다. 암튼 전 운영팀에서 뼈를 묻을 거니까 팀장님이 홍보팀 가세요.”

“내 자리는 네가 물려받고?”

“최 차장님이 싫다고 하시면요?”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네.”

에피타이저 삼아 웃고 떠드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저희 해장국 시켰는데요?”

“해장국값 받을 테니까 그냥 먹어. 감자탕이 더 맛있어.”

“이 집은 다 맛있죠~”

“역시 임 대리는 말을 참 예쁘게 한단 말이야. 내가 아들만 있었더라도 며느리 삼는 건데.”

마음대로 메뉴를 바꾼 주인 사내가 버너 위에 해장국을 올리고는 안재희 운영 팀장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안 팀장. 박유성이 데려 오는 거지?”

“박유성 선수 좋아하세요?”

“그럼. 좋아하고말고. 내가 스타즈 구단 앞에서 장사를 하지만 원래 베어스 팬이었잖아. 그래서 박준수 말고는 정이 안 가더라고. 그런데 박유성이 하는 걸 보니까 기가 막히더라니까? 막 애정이 가. 애정이.”

사장 사내가 너스레를 떨자 임세영 대리가 냉큼 끼어들었다.

“만약에 저희가 박유성 선수 데려오면 뭐 해주실래요?”

“뭘 해줄까? 말만 해.”

“박유성 선수 스타즈에서 뛰는 동안 뼈 무한 리필권 어때요?”

“콜! 내가 두 사람한테는 특별히 리필 해준다.”

“그러다 사모님한테 또 혼나시는 거 아니에요?”

“우리 와이프가 사위 삼고 싶다고 더 난리야. 아무튼 박유성이 꼭 데려와. 스타즈도 우승 한번 해보자. 그래야 여기도 팬들로 바글바글할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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