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35화
20. 병 주고 약 주고(1)
1
일본과 푸에르토리코가 마지막 1장 남은 4강 티켓을 두고 격돌하던 그 시각.
“제가 좀 늦었습니다.”
서울의 한 한식집으로 파이터즈 김경민 단장이 들어왔다.
“오늘 못 뵙는 줄 알았습니다.”
스타즈 김재식 단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본래 약속 시간은 오후 5시.
중간에 급한 용무가 있다는 말에 7시로 변경했고.
차가 막힌다는 핑계까지 군말 없이 받아줬건만 설마하니 12시가 다 되어서야 나타날 줄은 예상 못 했다.
하지만 김경민 단장도 늦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니었다.
“오전에 베어스 박 단장님하고 미팅을 했습니다. 오후에는 랜더스와 약속이 있었고요. 그래도 늦지 않게 시간 맞춰서 끝냈는데 갑자기 박준석 사장님이 찾아오셨지 뭡니까?”
“박준석 사장님이라면 히어로즈 말입니까?”
“네. 장형욱 단장님도 같이 오셨던데 아시잖습니까. 거기는 또 사장님이 실권자인 거.”
김경민 단장은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스포츠 구단 단장 중 한 명이었다.
올림픽 브레이크 기간 중이고 포스트 시즌은 일찌감치 물 건너간 상태라 전력 보강에 열을 올릴 이유도 없었지만.
지난해 우승팀 트윈스부터 한 끗 차이로 지명 순위가 밀린 자이언츠까지 김경민 단장을 만나지 못해 안달이었다.
심지어 연초에 김하선을 복귀시키면서 신인 선수 계약금까지 끌어 썼다는 소문이 나돌던 히어로즈까지 참전했다고 하니 김재식 단장은 쓴웃음이 났다.
‘우선 지명권은 우리한테 있는데 정작 엉뚱한 파이터즈만 난리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박유성을 우선 지명해 버리고 싶었지만.
협상을 해보지도 않고 판을 엎기에는 이 자리를 위해 공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 히어로즈 쪽에서 저녁을 먹자고 하는데 그럴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럼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이 집, 제법 잘합니다.”
“하하. 이거 기대가 되는데요?”
잠시 후.
김재식 단장이 미리 주문한 코스 요리들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정말 배가 고팠던지 김경민 단장은 체면도 마다하고 맛있게 접시들을 비워냈다.
그러면서 김재식 단장이 뭔가 말을 꺼내주길 기다렸지만.
김재식 단장은 후식이 나올 때까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단장님.”
“잘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김재식 단장과 김경민 단장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결과가 나왔나 보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김재식 단장은 핸드폰을 들어 새로 들어온 깨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일본이 승부치기 끝에 푸에르토리코를 10 대 9로 잡았습니다. 단장님.]
“일본이 힘겹게 이겼네요.”
같은 메시지를 받은 건지 김경민 단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니키타 쇼우가 나와서 쉽게 갈 줄 알았는데 초반에 무너질 줄은 몰랐습니다.”
김경민 단장을 기다리면서 김재식 단장은 핸드폰으로 일본과 푸에르토리코의 경기를 지켜봤다.
급성 장염에 걸렸다던 니키타 쇼우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마운드에 올라왔을 때만 해도 일본 대표팀의 우세를 예상했는데 정작 니키타 쇼우가 1회만 4실점을 하면서 푸에르토리코가 경기를 리드해 나갔다.
추가로 2실점을 한 니키타 쇼우는 3회 만에 강판됐고.
이후 일본 대표팀이 꾸역꾸역 점수를 쫓아가 8 대 8 동점이 되는 것까지 보다가 도착했다는 김경민 단장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껐는데 승부치기까지 갔던 모양이었다.
“오늘 던지는 걸 보니까 니키타 쇼우가 정말로 장염에 걸리긴 했나 봅니다.”
“하하. 그랬다면 선발로 올리지 않았겠죠. 니키타 쇼우도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잖습니까.”
“하긴 그렇겠네요. 장염이 심각했다면 매리너스에서 먼저 연락이 갔겠죠.”
“어쨌거나 일본의 바람대로 우리와 4강전을 치르게 됐습니다.”
“단장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4강전이요?”
“글쎄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재식 단장이 멋쩍게 웃었다.
마음으로는 당연히 대한민국 대표팀의 승리를 바라지만.
고작 대표팀 이야기를 하자고 이 시간까지 기다린 게 아니었다.
하지만 김경민 단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결과를 예상하면 재미없으니까 내기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내기요?”
“네. 만약에 김 단장님이 맞히시면 원하시는 1라운드 지명권을 스타즈에 팔겠습니다. 하지만 김 단장님이 틀리시면…… 다른 구단과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재식 단장은 말없이 김경민 단장을 바라봤다.
고작 야구 결과로 1라운드 지명권을 처리할 만큼 가벼운 인사는 아니라고 여겼는데 표정을 보니까 완전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물론 기본적인 조건은 맞아야겠죠. 하지만 아마 스타즈라면 다른 구단들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판단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신상욱 회장님의 오더가 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11구단 창단할 때 신상욱 회장님이 화끈하게 밀어붙여서 지금의 스타즈가 만들어진 거 아닙니까?”
지금은 경영 1선에서 한발 뒤로 물러난 상태지만.
한창때 신상욱 회장의 별명은 불도저였다.
뭔가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끝을 볼 때까지 무작정 밀어붙이는 성격이라 신성 그룹보다 규모가 큰 대기업들도 신성 그룹과 사업적으로 부딪치는 걸 꺼리는 편이었다.
김경민 단장의 예상대로 김재식 단장은 다른 구단들이 제시한 조건보다 더 많은 걸 내줄 각오를 하고 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구단주인 신상욱 회장이 박유성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데다가 올림픽 무대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만큼 놓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패를 꺼내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입방정을 떠니까 정중하게 대해줄 마음이 싹 가셨다.
“말씀하시는 걸 보면 다른 구단들과의 협상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쳤나 봅니다.”
“하하. 역시 김 단장님은 다르시네요. 그룹 감사팀에 계셨다더니 확실히 예리하십니다.”
김경민 단장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김경민 단장의 우선 순위 속에 스타즈는 뒤로 밀려 있었다.
1라운드 지명 순위가 6번째라 신인 계약금을 많이 낮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알짜배기 선수들은 보통 우선 지명으로 빼가지만.
그래도 1라운드 6번째 선수까지는 우선 지명에 준하는 기량을 갖춘 경우가 많았다.
당연하게도 지명된 선수들은 우선 지명 선수와 비슷한 계약금을 받길 원할 터.
그래서 아예 후순위인 트윈스나 히어로즈, 랜더스, 베어스 정도를 우선 협상 대상으로 삼았는데 하나같이 기대치를 맞추지 못했다.
“작년에 우리가 손해를 좀 보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파이터즈가 조금 양보해 주시죠.”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던 트윈스 박영석 단장은 초장부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1라운드 1순위로 데려간 송재영이 다친 게 파이터즈의 잘못이 아니건만 상식에도 없는 A/S를 요구했다.
“구체적인 조건을 말씀해 보십시오.”
“현금은 지난해와 동일하게 10억으로 하고 25인 이외의 선수 3명 어떻습니까?”
“추가 지명권 없이 선수 한 명 더 받아가란 말입니까? 그것도 25명이나 묶고요?”
“파이터즈도 연봉 많이 받는 선수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게 싫다면 유망주로 4명을 데려가도 상관없습니다.”
“박유성이면 송현민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후려치시는 겁니까?”
“그거야 키워봐야 아는 거죠. 막말로 박유성이 송재영 꼴 나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송현민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후로 팀 순위가 4위까지 떨어지면서 단장 해임설이 나돌아서일까.
박영석 단장은 작년과 180도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베어스에 기대를 걸었는데.
“향후 3년간 2라운드 지명권을 드리겠습니다. 추가로 20인 이외에서 선수 2명 얹고요. 어떻습니까?”
“향후 3년간이요? 그게 가능합니까?”
“어차피 괜찮은 투수들은 우선 지명과 1차에서 다 뽑을 수 있습니다. 저희는 그저 박유성만 키우려고요.”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빠졌습니다.”
“중요한 거요? 아아, 현금 말씀이시죠? 그것부터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참 하하. 제가 마음이 급했습니다.”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편하게 말해달라고 했으니까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모기업 사정이 썩 좋지가 않아서요. 아무래도 현금 트레이드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무슨……?”
“대신 2차 지명권이나 트레이드 된 선수들을 되팔아서 현금을 확보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저희더러 현금 트레이드를 따로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프로 야구 협회에서도 어느 정도의 현금 트레이드는 묵인해 주는 추세이지 않습니까? 파이터즈도 정리해야 할 선수들이 있을 테니까 이 기회에 털어버리시죠. 어떻습니까?”
“…….”
우선 협상 대상 구단들 중에 가장 많은 돈을 부른 건 다름 아닌 히어로즈였다.
“20억 드리겠습니다. 추가로 20인 외 선수 2명 어떻습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대신 현금 지급은 분납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분납이요?”
“1년에 4억씩 5년 어떻습니까? 아시다시피 저희도 지금 자금이 빠듯해서요. 그렇다고 박유성 선수와 푼돈을 주고 계약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
박준석 사장에 이어 장형욱 단장까지 사정을 봐달라며 읍소했지만 김경민 단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히어로즈보다 구단 사정이 안 좋은 게 바로 파이터즈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모기업의 투자가 상당한 랜더스에 기대를 걸었지만.
랜더스의 제안은 지극히 상식선이었다.
“구단주께서 불미스러운 말이 나오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전례를 따랐으면 합니다.”
“전례라 하시면……?”
“현금 10억에 25인 이외 선수 2명. 이게 저희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건 다이노스 때 조건입니다만?”
“작년에 프로 야구 협회에서 승인 나기까지 한 달 걸리지 않았습니까? 올해도 그런 식이면 저희는 거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구단주께서 말 나오는 걸 싫어하십니다.”
“…….”
랜더스보다 지명 순위가 빠른 타이거즈와 위즈는 현금 8억에 선수 2명을 제안했고.
다이노스와 라이온즈, 이글스, 자이언츠는 현금 5억 정도면 어떻겠냐며 간을 봤다.
“그 돈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우리가 뽑고 말지.”
김경민 단장은 지방 구단 단장들과의 미팅을 뒤로 미뤘다.
그리고 스타즈에 올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본과의 4강전 결과를 두고 내기를 하자고 운을 뗀 것도 협상 테이블을 주도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구단보다 스타즈의 부담이 더 클 거야. 그러니까 일단 거래부터 트고 보자.’
박유성의 우선 지명권은 스타즈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현호 사건으로 신성 고등학교 선수를 우선 지명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터라 박유성을 뽑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에 박유성을 허무하게 빼앗긴다면 박유성의 영입을 바라는 팬들의 실망감이 엄청날 터.
그 화살은 앞서 오판과 실언을 저지른 신상욱 회장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걸 보면 기존의 방침을 유지할 생각이겠지. 그럼 한 20억쯤 불러볼까?’
김경민 단장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올 시즌 송찬우의 연봉을 올려주고 구단 운영비를 마련하려면 최소 14억 이상의 여유 자금이 필요했다.
스타즈에서 15억 이상은 안 된다고 선을 그으면 좀 빠듯해지지만.
내후년 송찬우를 메이저리그로 보내고 나면 이적료로 또 한 시즌을 버티게 될 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