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134화 (134/412)

타자 인생 3회차! 134화

19. 유성이 맛이 어때?(6)

“그렇지!”

“그래! 이게 야구지!”

호들갑을 떠는 멤버들의 뒤에서 배종우는 숨을 죽이며 상황을 지켜봤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다 부정이라도 탈까 봐 겁이 났다.

‘제발 안타! 병규야. 이 자식아! 밥값 좀 해라. 제발!’

배종우는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했다.

만약 여기서 민병규가 짧은 안타라도 때려준다면 박유성이 무조건 홈을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원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민병규 선수가 3구를 기다립니다. 이번에는 바깥쪽! 그 공을 민병규 선수가 가볍게 때려냅니다!

민병규가 정말로 좌익수 앞으로 짧은 안타를 때려 버렸다.

어지간한 주자들이라면 무조건 3루에서 스톱이었지만.

넉넉하게 리드를 벌리고 있던 박유성은 타구가 자신의 앞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3루를 돌아 홈으로 내달렸다.

-박유성 3루를 지나 홈으로 뜁니다. 공은 백 홈! 홈에서! 홈에서! 홈에서 세이프! 박유성 선수가 대한민국 대표팀을 벼랑 끝에서 구해냅니다!

“크아아아아!”

“동점! 동저어어어엄!”

“내가 뭐랬어? 유성이가 해줄 거라고 했지?”

“뭐래요. 대만에 역배 건 주제에.”

“그건 그냥 역배충이라서 건 거라니까!”

“종우 형 뭐 해요? 동점이라니까요?”

TV 앞에 모여 있던 야생남 멤버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좋아할 때 배종우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팬티가 어디 있더라.”

오줌이 마렵던 걸 참고 경기를 봤었는데.

박유성이 기가 막힌 슬라이딩으로 홈을 훔쳐내는 모습을 보니까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버렸다.

“허…….”

대만의 왕 다이강 감독의 입에서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국에게 8 대 0으로 대패하면서 4강 진출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지만 대한민국을 꺾고 유종의 미라도 거둬볼 생각이었는데 어렵게 잡은 리드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는 걸 보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뤼안시 수석 코치가 재빨리 다가와 말했다.

“감독님. 챌린지 신청 안 하십니까?”

“챌린지?”

“혹시 모릅니다. 가오진더의 태그가 더 빨랐을 수도 있습니다.”

뤼안시 수석 코치가 흥분해 소리치자 왕 다이강 감독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승패란 모두가 승복해야 깔끔한 법이다.

미련을 남겨두느니 아직 남아 있는 비디오 판독 기회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 대만 대표팀에서 챌린지를 요청했습니다.

-대만 입장에서는 충분히 요청할 만합니다. 3루 베이스 쪽에서는 박유성 선수가 손을 뻗는 타이밍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요.

-느린 화면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공이 홈으로 오는 동안에 여기, 여기서 박유성 선수가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했는데요.

-박유성 선수도 타구가 짧고 공이 다이렉트로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들어왔고요.

-화면이 아까보다 느리게 재생되고 있는데 바로 여기죠. 포수 가오진더 선수가 공을 받고 태그를 하려고 몸을 돌릴 때 박유성 선수는 가오진더 선수의 등 뒤쪽으로 돌아가 기민하게 손을 뻗었습니다.

-가오진더 선수와 대만 벤치의 눈에는 안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앞에서 구심이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이 단언한 대로 챌린지 결과가 달라지지 않자 바다 건너 일본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박유성 득점 인정! (IEJ534A6D2)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한국이 역전이야? (A23W225DQD)

└이제 동점. 하지만 민병규가 2루까지 갔으니까 역전 기회는 남아 있어! (IEJ534A6D2)

└고마워요. 박유성! (KA23E4I58T)

└역시 한국은 박유성뿐인가? (B51E4Q66WD)

└한국이라는 나라에 박유성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J14Q44W6DF)

└그런데 박유성. 순수 한국인일까? (J62W4Q22MD)

└또 시작이야? ㅋㅋ (C2EQ76DF33)

└솔직히 유전학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한국과 일본의 메이저리그 숫자를 보라고. 한국에서 박유성 같은 인재가 나왔다는 게 말이 돼? (J62W4Q22MD)

└나도 의심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조부나 증조부 쪽에 일본의 피가 흐르고 있을 수도 있다고. (D63T2W68SD)

└난 재일이지만 이런 놈들 볼 때마다 역겨워. 사회적으로 안 좋은 일만 터지면 재일부터 의심하면서 이럴 때는 재일이길 바라는 거야? (KG3Q45W12R)

└닥쳐! 춍! 넌 세금만 잡아먹는 버러지잖아! (SAR32GQ525)

└적어도 내가 너보다는 세금을 많이 낼 것 같은데? 넌 아르바이트도 못 하는 멍청이잖아. (KG3Q45W12R)

└다들 진정하고 한마음으로 한국을 응원하자. 한국이 오늘 무조건 이겨야 해. 대만에게 패배하는 순간 우리는 4강전에서 미국을 만나게 될 거라고. (E57TW276QD)

└그런데 미국이 그렇게 강한가?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지 않아? (F9E34WD64G)

└여기서 말하는 미국은 야구 대표팀을 의미하는 거야. 축구 대표팀이 아니라고. (GE50Q21D5G)

└젠장! 다음 타자가 중견수 뜬공으로 잡혔어! (IEJ534A6D2)

└3아웃이야? (H42Q6W7D2F)

└아직 2아웃. (IEJ534A6D2)

└아직 한 발 남았다! (JQ32JD578K)

└포기해. 한국의 9번 타자는 아웃 자판기니까. (K0L324W5QM)

└아아아, 젠장! 천지아런의 공을 전혀 쫓아가지 못하고 있어! (IEJ534A6D2)

└볼카운트는? (L64W23K7JQ)

└1-2 (IEJ534A6D2)

└삼진 느낌이 나는데? (M11K26J8JW)

└제발! 누구인지 모를 한국의 9번! 안타를 때려내라고! (N4W2K6Q77M)

└하아. 끝났어. (O534W2K5QD)

└설마 삼진이야? (P76Q23WK0L)

└삼진. (Q62WD845QG)

└천지아런 뭐야? 왜 이렇게 잘 던지는 거야? (S3Q5W7D88W)

└올 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고 하잖아. (RQ32W1E45T)

└오늘 피칭만 놓고 보자면 메이저리그에서 충분히 관심을 가질 것 같은데? (T24Q6W7D8G)

└무리. (SAR32GQ525)

└절대 무리. (DK351KAB55)

└어이 어이. 상대는 한국이야. 일본이 아니라고. (J62W4Q22MD)

└그래도 어떻게든 동점을 만들어서 다행이야. 이번에 점수를 뽑지 못했으면 위험했을 거야. (P145EI6D7K)

└박유성은 중견수로 들어간 거야? (U4W23QK6D7)

└박유성이 중견수. 기정후가 좌익수로 옮겼어. (P145EI6D7K)

└한국의 수비가 강화됐으니까 추가 실점 가능성은 낮아졌어. 이제 공격이 문제인데 박유성의 타석이 돌아오는 거야? (IEJ534A6D2)

└감백호하고 교체됐으니까 한 번은 들어설 수 있어. (RQ32W1E45T)

└그때 박유성이 시원하게 한 방 때려냈으면 좋겠어. (V5W3Q6D8G9)

└나도 같은 생각이야. 다른 녀석들은 다 별로지만 박유성은 이상하게 정이 가. 일본을 여러 번 도와주잖아. (DFS231AD23)

일부 일본 팬들의 바람대로 9회 말.

박유성에게 경기를 끝낼 기회가 찾아왔다.

오늘 경기 안타가 없었던 4번 타자 김하선과 5번 타자 기정후가 연속 안타를 때려내면서 무사 1, 2루 밥상을 차려준 것이다.

-이제 타석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슈퍼 루키, 박유성 선수가 들어옵니다. 오늘 경기는 첫 번째 타석.

-박유성 선수. 긴장할 거 없습니다. 병살을 쳐도 좋으니까 자신 있게 방망이를 휘두르면 됩니다.

-가장 좋은 건 박유성 선수가 볼넷으로 출루하는 거 아닐까요?

-물론 만루를 만들면 좋겠지만 이번 대회 박유성 선수의 타격감도 상당히 좋으니까요. 볼넷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박유성 선수. 이번 올림픽에서 미국전 2점 홈런 포함 5타수 3안타를 기록 중입니다. 타율은 6할. 볼넷 하나에 2타점과 5득점, 그리고 무려 4개의 도루를 훔쳐냈는데요.

-정말이지 팔방미인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선수입니다. 타격은 물론이고 주루와 수비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으니까요.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이선철 해설위원께서 극찬을 하시니까 더 대단해 보이는데요?

-하하. 저도 칭찬을 할 때는 칭찬을 합니다. 칭찬을 할 만한 선수가 없어서 문제죠.

-아, 왕 다이강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아무래도 투수를 바꿀 것 같은데요?

-박유성 선수가 좌타자니까 좌투수로 교체하려는 것 같습니다.

-지금 불펜에 좌완 펑융지 선수가 몸을 풀고 있는데요. 이선철 해설위원의 예상이 적중했습니다. 펑융지 선수가 불펜을 나섭니다.

잠시 투수 교체가 이루어지는 동안 현지 중계 카메라가 벤치에 앉은 천지아런의 얼굴을 잡았다.

대한민국 대표팀을 상대로 호투를 펼쳤던 천지아런은 7회를 끝으로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7이닝 4피안타 1실점에 탈삼진 9개.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올림픽 무대에서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쇼케이스였지만 벤치에 앉은 천지아런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카메라는 다시 방향을 바꿔 대한민국 더그아웃 쪽을 비췄다.

더그아웃 입구 쪽에서 강기태 감독이 박유성을 붙잡고 뭔가 주문을 하고 있었는데 박유성은 놀이기구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떠 있었다.

-박유성 선수. 전혀 긴장을 안 하는 거 같은데요?

-표정만으로는 단언할 수 없겠습니다만 강심장인 건 확실합니다. 사실 아까 홈 대시는 좀 위험했으니까요.

-주자의 앞쪽으로 지나가는 좌익수 방면 타구는 3루에서 멈추는 게 기본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게 가르쳤던 시절도 있습니다. 지금은 타구의 속도와 방향, 좌익수의 수비 능력 등을 고려해 베이스 코치가 판단하지만요.

-아까 타구는 어땠습니까?

-잘 맞은 타구는 아니었지만 타구 속도는 빨랐습니다. 좌익수가 달려들면서 홈으로 송구할 수 있는 코스였고요. 사실 박유성 선수가 안이하게 홈으로 달렸다면 죽었을 겁니다.

-하지만 박유성 선수가 영리하게 포수 뒷공간으로 파고들면서 동점을 이끌어냈죠.

-그런 걸 보면 이번 타석도 기대가 됩니다. 뭘 시켜도 잘할 것 같은 선수니까요.

-그런데 강기태 감독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요?

-글쎄요. 분위기상 희생 번트 사인은 아닐 것 같은데 또 강기태 감독이 허를 찌르는 작전을 좋아하거든요? 무엇을 보여줄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펑융지의 연습 투구가 끝이 나고.

박유성이 타석에 들어섰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르며 평소처럼 루틴을 펼친 박유성은 별안간 번트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포수 가오진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타임을 외쳤다.

-희생번트인가요?

-흠……. 이렇게 되면 나경석 선수가 해결해 줘야 할 텐데요. 대만에서 나경석 선수를 거르면 그다음은 박찬희 선수입니다.

-박찬희 선수. 이번 대회에서 전 경기 출전 중이지만 아직까지 1안타에 그치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박찬희 선수가 땅볼을 친다면 곧바로 승부치기로 들어가야 하는데 희생 번트는 조금 안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만 대표팀 왕 다이강 감독도 코치들을 불러 모아 의견을 구했다.

“정말 번트일까?”

“만약에 박유성이 선발 출전하지 않은 게 타격 컨디션 문제 때문이라면 번트를 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 번트에 대비해야 합니다. 박유성은 발이 빠릅니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남아 있는 이닝이 많다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겠지만.

승부 치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을 이긴다 해도 대만 대표팀은 4강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승부치기의 득실은 TQB 계산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좋아. 번트에 대비하자고.”

왕 다이강 감독은 내야수 전체에게 전진 수비를 지시했다. 그리고 추가로 외야수들의 위치까지 앞으로 당겼다.

이번 대회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급부상한 박유성이라 해도 이런 압박 플레이에 대한 경험은 많지 않을 터.

대한민국 대표팀 벤치도 박유성이 불안해서 작전을 걸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정작 강기태 감독은 박유성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유성아. 웃어.”

“네?”

“그냥 웃어 이 녀석아. 편하게 해.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정말요?”

“그래. 어차피 승부치기 가서 져도 4강 확정이니까 부담 가지지 마. 너한테 어떤 사인도 안 낼 테니까 쫄지만 마. 알았지?”

“넵! 감독님!”

타석으로 들어간 박유성이 뜬금없이 번트 자세를 대자 강기태 감독은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고 설마하니 페이크 번트를 시도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대만 대표팀이 그 움직임에 속아버렸다.

“이렇게 나와주면 나야 고맙지.”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은 또다시 번트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 펑융지의 초구가 바깥쪽으로 낮게 날아오자 그 자세 그대로 방망이를 휘둘러 공을 맞혀냈다.

따악!

살짝 가벼운 타격음과 함께 타구는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유격수의 키를 살짝 넘어갔고.

중견수 천용지가 허겁지겁 달려와 공을 잡았을 때는 이미 김하선이 폭풍 질주로 홈을 쓸어낸 뒤였다.

-김하선! 김하선! 김하서어어언! 김하선이 득점합니다! 게임 셋! 대한민국 대표팀이 대만을 2 대 1로 잡아내고 조 1위로 4강에 진출합니다!

본래였다면 1승 2패로 조별리그 탈락했을 대한민국 대표팀은 그렇게 메달을 다투는 4강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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