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128화 (128/412)

타자 인생 3회차! 128화

18. 슈퍼 썬(7)

“후우……. 죽을 뻔했네.”

가까스로 아웃을 면한 박유성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쓴웃음을 짓는 루이스 카스티오를 한 번 째려봤다.

“옛정이 있지 무슨 이를 악물고 던지냐?”

이선철 해설위원은 공 하나 정도 더 지켜보는 게 낫다고 말했지만 박유성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3구째 바깥쪽으로 빠른 공이 예쁘게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1회차 시절 이 코스의 공을 밀어 쳐서 재미를 봤던 기억이 떠오르자 몸이 자동반사적으로 움직였고.

박유성도 좌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시원시원한 타구를 머릿속에 그리며 방망이를 휘둘렀는데.

딱!

“……?”

타격음이 시원치가 않았다.

랜더스에서 용병으로 뛰던 시절보다 지금의 구위가 더 좋았던 것이다.

“젠장할!”

먹힌 타구를 쫓아 유격수 에밀리 카브레라가 움직이자 박유성은 손에 쥔 방망이를 냅다 던지고 1루를 향해 내달렸다.

코스를 떠나 중남미 내야수들의 특징이 어깨가 좋다는 점이다.

불규칙 바운드나 펌블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송구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날아올 터.

이대로 국가대표 1번 타자 데뷔 타석을 날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뛰었는데 다행히 1루수가 공을 놓쳐주는 센스를 보여주었다.

“고맙다. 훌리오. 그런데 수비 연습 좀 해야겠더라.”

주루용 장갑으로 바꿔 낀 박유성이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훌리오 메세나의 수비 자세가 높아서 원바운드로 날아온 송구를 제대로 포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립적으로 상황을 지켜본 미국 중계석의 반응은 달랐다.

-썬의 전력 질주가 에밀리 카브레라의 실책을 유도해 냈습니다.

-리플레이 화면을 보면 나오는데요. 네. 여기. 에밀리 카브레라가 백핸드로 타구를 잡았을 때 썬은 이미 절반 이상 뛴 상태였습니다.

-거의 15m 정도 된 것 같은데요.

-어깨가 좋은 야수들도 타자 주자가 베이스라인을 절반 이상 넘어가면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부터는 가속이 붙기 때문에 조금만 머뭇거려도 발이 빠른 주자들은 잡기 어려워지죠.

-스텝을 밟지 않고 곧바로 송구한 에밀리 카브레라의 판단은 좋았습니다. 다만 제대로 힘을 싣지 못했기 때문에 바운드가 됐고 바운드 된 공이 1루수 훌리오 메세나의 예상보다 낮게 날아왔습니다.

-훌리오 메세나가 그런 상황까지 대비해서 조금 더 낮게 자세를 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지면 결론은 이겁니다.

-썬이 실책을 만들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조금 전 실책은 오로지 썬의 빠른 발이 만들어낸 겁니다.

박유성은 실책으로 나간 게 머쓱했지만.

대표팀 막내의 전력 질주를 지켜본 선배들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신이 녀석, 악착같이 뛰네.”

“저러니까 타격 8관왕을 한 거죠.”

“진짜 미워할 수가 없는 녀석이라니까.”

“괜히 우유천이 아니죠.”

“우유천? 그건 또 뭐야?”

“우리 유성이 천재예요. 커뮤니티에서 많이 쓰는 말인데 모르세요?”

“넌 커뮤니티 좀 그만해라. 그럴 시간에 배팅볼을 하나 더 쳐. 이래서 메이저리그 오겠니?”

“에이. 그래도 야구팬들 민심은 체크해야죠.”

“암튼 우리도 열심히 하자. 이러다 유성이 덕분에 메달 땄단 소리 나오겠어.”

“저도 유성이한데 그만 쪽팔리려고요.”

막내답지 않은 막내라서 귀여운 맛은 없지만.

박유성의 플레이는 프로에 처음 입단했을 때의 초심을 되새기게 했다.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치고 다시 국내로 유턴한 김하선도 마찬가지였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삶이 힘들고 지쳤는데 막상 대표팀 막내가 저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까 선배로서 가만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선취점이 중요하니까 번트를 대자.’

오늘 경기는 도미니카 공화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게도 중요했다.

도미니카 공화국을 잡아낸다면 대만전은 조금 편하게 준비할 수 있지만 반대로 도미니카 공화국에게 덜미가 잡히면 대만전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 했다.

그래서 김하선은 희생 번트까지 각오하고 3루 베이스 코치를 바라봤다.

자신을 믿고 존중해 주는 강기태 감독이 번트 사인을 낼 가능성은 낮은 만큼 상황을 봐서 번트를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기태 감독은 진루타를 위해 김하선을 2번에 넣은 게 아니었다.

‘도루?’

사인을 확인한 김하선의 눈이 커졌다.

아직 경기 초반이고 도미니카 공화국 포수의 어깨가 좋은 만큼 단독 도루는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강기태 감독이 곧바로 승부를 걸었다.

‘유성이가 발이 빠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도와줘야지.’

타석으로 돌아온 김하선은 작전이 나온 것처럼 일부러 번트를 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포수 카를 베드윈이 코웃음을 쳤다.

파드레스에서 나름 잘나갔던 김하선이 번트를 댈 리 없다고 여겼다.

‘보나 마나 압박을 주려는 거겠지.’

카를 베드윈은 김하선을 무시하고 바깥쪽 빠른 공을 요구했다.

코스로만 공이 들어온다면 1루 주자 박유성이 2루로 뛰더라도 충분히 잡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실책으로 선두 타자를 내보낸 루이스 카스티오는 부담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후앗!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서 공이 바깥쪽으로 완전히 빠져 버렸다.

페이크 번트를 시도하려던 김하선은 냉큼 방망이를 거둬들였다.

대신 피칭과 동시에 스타트를 끊은 박유성의 질주를 바라봤다.

낯선 투수인 만큼 타이밍을 잡기 어려울 거라 여겼건만.

촤라라랏!

박유성은 카를 베드윈의 송구가 도착하기도 전에 가볍게 2루 베이스를 훔쳐냈다.

-2루에서 세이프! 박유성 선수가 성인 국가대표팀 첫 도루를 신고합니다.

-정말이지 완벽에 가까운 도루였습니다. 지금 느린 화면으로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루이스 카스티오 선수가 키킹을 한 순간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저렇게 작심하고 뛰면 어지간한 포수들은 박유성 선수를 절대 잡지 못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벤치에서 작전이 나온 것 같은데요.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작전이 나오면 저렇게 뛰어야 합니다. 방금 도루는 프로 선수들도 본받아야 해요.

-오늘도 프로 야구의 발전을 위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으시는 이선철 해설위윈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박유성이 단숨에 스코어링 포지션에 나가자 김하선도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건 진루타였다.

2루에 있는 박유성을 3루까지 보낼 수 있다면 선취점의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 터.

따악!

2구와 3루를 침착하게 골라낸 김하선은 4구째 바깥쪽으로 꺾여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결대로 밀어 쳐 1, 2루간으로 타구를 굴렸다.

박유성이 1루에 있었다면 1루수 옆을 빠져나가는 안타가 됐을 코스.

하지만 박유성이 2루에 가버리면서 길목을 지키고 있던 1루수에게 딱 걸러 버렸다.

-아, 이 타구를 1루수 훌리오 메세나가 잡아냅니다.

-박유성 선수. 빨리 2루로 돌아와야 할 것 같은데요.

-훌리오 메세나 선수가 곧바로 3루에 송구합니다.

본래라면 2루 주자를 베이스에 묶은 뒤에 1루 베이스를 밟아 타자 주자를 잡아내는 게 정석이지만.

훌리오 메세나는 곧바로 3루수 에릭 구스만에게 공을 던졌다.

그리고 에릭 구스만은 2루 베이스 쪽으로 박유성을 몰면서 런다운을 시도했다.

경험이 부족한 선수라면 자신부터 살겠다고 2루 베이스로 내달렸다가 허무하게 죽었겠지만 박유성은 달랐다.

쫓기는 척 2루 베이스로 움직였다가 유격수 에밀리 카브레라가 자신에게서 눈을 떼자 곧바로 3루를 향해 몸을 틀었다.

공을 받은 에밀리 카브레라가 다시 3루로 공을 던지려 했지만.

포수 카를 베드윈은 물론이고 투수 루이스 카스티오까지 제때 백업에 들어오지 못하면서 3루가 텅 비어버렸다.

“제길!”

결국 에밀리 카브레라가 공을 들고 박유성을 쫓았지만 한발 앞서 내달리는 발 빠른 박유성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사이 김하선은 1루에서 2루까지 진루했고.

대한민국 대표팀은 안타 없이 무사 2, 3루의 득점 기회를 만들어냈다.

-지금 호르세 바티스타 감독의 얼굴이 화면에 잡히고 있는데요. 웃고 있습니다.

-아마 어이가 없겠죠. 메이저리그에서도 황당한 플레이들이 종종 나오곤 합니다만 방금 전 런다운 플레이는 너무 안일했어요. 에릭 구스만 선수가 너무 일찍 공을 던졌습니다.

-반면에 박유성 선수는 귀신같이 송구를 알아채고 방향을 틀었는데요.

-저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현역 시절에도 저도 런다운을 여러 번 겪어봤는데요. 저 상태에서 귀루를 하려고 몸을 돌리면 다시 방향을 틀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죽을 때 죽더라도 다음 베이스에서 죽으라고 하는 것이고요.

-만약 박유성 선수가 2루에서 잡혔다면 무사 2루가 1사 1루로 바뀌었을 텐데요. 박유성 선수의 기민한 주루 플레이 덕분에 무사 2, 3루가 됐습니다.

-이렇게 되면 송현민 선수를 거르지도 못할 겁니다. 무사 만루 상황은 도미니카 공화국도 부담스러울 테니까요.

그때 중계 카메라가 타석으로 들어오는 송현민을 잡았다.

앞서 미국전에서는 4타수 무안타에 그쳤지만.

메이저리그 레인저스 소속이며 3할이 넘는 시즌 타율을 기록 중이라는 자막이 왜 대한민국 대표팀의 3번 타자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오른손 타자에게 강한 송현민이 타석에 서자 카를 베드윈도 최대한 어렵게 리드를 했다.

초구에 바깥쪽 빠른 공으로 간을 본 다음.

2구째 몸쪽 커브를 던져 시선을 빼앗은 뒤 3구째 바깥쪽 슬라이더로 허를 찌르려 했는데.

따악!

그 공을 송현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공을 때려 버렸다.

‘역시 만만치가 않아.’

송현민이 바깥쪽 공을 노리고 있다고 확신한 카를 베드윈은 고민 끝에 몸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포심 패스트 볼과 슬라이더 투 피치 투수인 루이스 카스티오의 장점을 살리려면 계속해서 유인구를 던져 타자를 헷갈리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무사 2, 3루라는 압박 속에서 제구가 좋지 않은 루이스 카스티오가 카를 베드윈이 요구하는 수준의 체인지업을 던질 수 있을 리 없었다.

-볼. 몸쪽 낮은 코스의 유인구를 송현민 선수가 잘 참아냈습니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거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이선철 해설위원의 시선이 3루 쪽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송현민의 메이저리그 활약상을 모르지 않는다면 1루를 채우고 박준수와 승부하라는 사인이 나와야 할 텐데.

호르세 바티스타 감독은 제 팔짱을 낀 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투포수의 사인 교환이 끝났고.

후앗!

루이스 카스티오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몰리듯 몸쪽으로 날아든 순간

따악!

송현민이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큽니다!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건 넘어갔어요.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이 타구는…… 우익수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갑니다! 홈~런! 쓰리런! 대한민국의 3번 타자 송현민 선수가 드디어 이름값을 해냅니다!

“젠장할!”

타구가 머리 뒤로 솟구치기가 무섭게 고개를 떨어뜨렸던 루이스 카스티오는 호들갑스럽게 베이스를 도는 송현민이 아니라 홈플레이트 앞에서 김하선과 하이 파이브를 나누는 박유성을 노려봤다.

홈런을 때려낸 건 송현민이지만.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건 다름 아닌 박유성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음 타석 때 엉덩이를 맞혀 버리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명분이 없었다.

박유성에게 잘못이 있다면 얄밉게 야구를 잘한 것뿐이었다.

게다가 메이저리그 사무국도 올림픽 중에 보복성 빈볼을 던지지 말라고 했으니 메이저리그 선수로서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박유성의 다음 타석 때 몸 쪽으로 빠른 공을 바짝 붙이며 화풀이를 했건만.

박유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볼넷으로 걸어 나간 뒤에 다시 한번 2루 도루를 성공시키며 루이스 카스티오를 강판시켜 버렸다.

-아, 벌써 투수가 바뀝니다. 루이스 카스티오 선수는 여기까지입니다.

-2사 이후이긴 합니다만 박유성 선수에게 스트레이트 볼 넷을 내준 게 컸던 것 같습니다.

김하선이 바뀐 투수의 초구를 받아쳐 중견수 앞 안타를 때려내자 박유성은 쉴 새 없이 발을 굴러 3루를 돌아 홈을 파고들었다.

-공 백 홈 됩니다. 홈에서……! 홈에서 세이프! 박유성 선수가 대한민국의 네 번째 득점을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경기 초반에 주도권을 틀어쥔 대한민국 대표팀은 도미니카 공화국을 9 대 3으로 대파하고 4강 진출을 사실상 확정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