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27화
18. 슈퍼 썬(6)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당초 자신의 역할은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조언하는 것.
박유성이 지난 경기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는 충격적이었지만.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고작 한 경기만으로 박유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된 박유성의 호수비는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의 혼을 빼놓았다.
“저걸 봐! 저걸 보고도 안 된다는 거야?”
“평범한 센터 플라이였습니다.”
“평범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타구 판단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빠졌을 공이었어. 그런데 저걸 평범하게 잡아냈잖아.”
“앤드류.”
“우리 다저스에 저런 선수가 있다고 생각해 봐. 매번은 어렵더라도 시리즈마다 한 번씩만 멋진 수비를 펼쳐준다면 상대 팀은 골치가 아플걸?”
“시리즈에 한 번도 많습니다. 열 경기당 한 번씩 호수비를 펼쳐도 16번이고요.”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야. 지난번 경기 때처럼 수비만으로 경기 흐름을 확 바꿔줄 수 있는 선수가 있다는 게 중요한 거라고.”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박유성을 추켜세웠지만 그럴수록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여기서 섣불리 동조했다간 스카우트 팀이 고르고 고른 유망주들을 전부 놓치게 될지 몰랐다.
그때였다.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3번 타자 에릭 구스만이 잡아당긴 타구가 좌중간을 갈랐다.
“와우, 이건 큰데?”
“제대로 걸렸습니다.”
“3루까지 들어갈 것 같지?”
“에릭 구스만은 발이 빠른 편이니까요.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과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3루타를 예상했다.
코스도 코스지만 선수들이 다저스 파크에 익숙하지 않은 만큼 수비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빠르게 타구를 쫓아간 박유성은 펜스에 부딪혀 튕겨 나온 공을 단번에 잡아낸 뒤 앵커맨인 박찬희를 향해 정확하게 송구했다.
“3루로!”
그 송구를 받은 박찬희는 곧바로 3루수 김하선에게 공을 던졌고.
김하선이 포구와 동시에 태그를 성공시키면서 에릭 구스만을 3루에서 잡아냈다.
-한국의 환상적인 수비가 에릭 구스만의 질주를 막았습니다!
-중계 플레이도 훌륭했지만 썬의 타구 처리를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치 다저스의 선수처럼 공이 튀어 오르는 지점을 정확하게 예측했어요!
요란스러워진 중계진과 달리 사장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제 두 번째 경기를 치르는 다저스 파크에서 이렇게 깔끔한 수비가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리플레이 화면을 통해 박유성의 펜스 플레이가 나오자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뒤늦게 호들갑을 떨었다.
“로이! 저걸 봐!”
“네. 보고 있습니다.”
“저런 녀석을 어떻게 포기하라는 거야? 썬은 다저스를 위해 태어난 선수인 게 틀림없어.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완벽한 수비를 할 수가 없다고!”
평소답지 않게 침까지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을 보면서도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지난 경기에서 선보인 호수비가 박유성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라고 여겼는데.
그 최대치를 뛰어넘는 수비를 보고 나니까 자신도 모르게 다저스 유니폼을 입혀도 괜찮을 것 같은 감정에 휩쓸렸다.
그러나 모두를 놀라게 한 타구 처리는 박유성의 센스가 아니었다.
“내가 유신이 경기를 얼마나 봤는데.”
2회차 시절 박유성은 박유신의 출전 경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챙겨봤다.
타격으로는 자신을 뛰어넘은 동생에게 잔소리를 하기 위해 주루나 수비도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는데.
이번처럼 가속이 붙어 빠르게 굴러간 타구가 펜스 밑단에 부딪쳐 튕겨 오르는 경우도 여러 번 목격했다.
생각 없이 공만 쫓았다면 크게 튀어 오른 공이 머리 뒤로 넘어갔을 터.
타구가 좌우로 튀는 경우까지 고려해 적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섰으니 이 정도면 만점짜리 대처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진짜 너 대단하다. 어떻게 그걸 그렇게 처리하냐?”
“구장이 낯설어서 타구 처리하기 힘들었을 텐데 잘했다.”
감백호와 기정후도 한목소리로 박유성을 칭찬했다.
미국전 이후로 수비만큼은 자신들보다 낫다고 인정하긴 했지만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한 펜스 플레이까지 능숙하게 해내니까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이렉트로 안 던지고 찬희한테 던졌다?”
“형이 어제 찬희 선배한테 던지라고 했잖아요.”
“어이구. 그 와중에 내 잔소리가 생각났어?”
“저는 선배님들의 조언을 늘 가슴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유성은 처음에 김하선에게 송구를 할까 고민했다.
이미 앞선 경기에서 어시스트를 성공시킨 만큼 김하선에게 정확하게 배달할 자신은 차고도 넘쳤다.
그러다 타자 주자의 슬라이딩 타이밍이 빨라질까 봐 일부러 박찬희를 활용했는데 그 판단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모르는 감백호와 기정후는 말 잘 듣는 후배가 예쁘기만 했다.
“이야, 우리 유성이가 현민이보다 낫네.”
“그러게요. 현민이 저 녀석은 요즘 좀 잘나간다고 형들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던데.”
“저한테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했는데요?”
“누가? 현민이가? 웃기는 놈이네. 본인이나 잘하라고 그래라.”
“백호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예선전 끝나면 현민이 정신 교육 한 번 시키자.”
“완전 콜이요.”
감백호와 기정후 이외에도 대표팀 선수들은 발걸음을 늦추며 박유성이 오기를 기다렸다.
“유성아. 수비 좋았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잘하고 있어. 유성아. 그렇게만 해.”
“네. 하선 선배님.”
“짜식이 또 하나 했다고 목에 힘주네?”
“야, 송현민. 너나 잘해 인마.”
“그래. 괜히 막내랍시고 유성이 군기 잡을 생각 말고 너나 잘하자.”
“형들이 이러니까 유성이가 기고만장이죠. 유성이 버릇 나빠지면 다 형들 책임입니다.”
그때 선발 투수 임찬기가 박유성을 구석으로 잡아끌었다.
“유성아. 고맙다.”
“아닙니다. 선배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제 찬우 도와줬던 만큼만 도와줘. 알았지?”
“네. 선배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너만 믿는다.”
타이거즈의 영건 임찬기의 주무기는 슬라이더.
고등학교 시절 때만 해도 포심 패스트볼에 곁들이는 레퍼토리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타이거즈 레전드인 양현중을 만나면서 확 달라졌다.
거기에 고속 슬라이더로 MVP를 거머쥐었던 윤성민까지 가세해 슬라이더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해 준 끝에 리그 최고 레벨의 슬라이더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그만큼 임찬기는 슬라이더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다.
그래서 경기 초반에 슬라이더를 통타당하면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었다.
조금 전 타구도 바깥쪽 백도어 슬라이더를 던졌다가 얻어맞은 거였다.
물론 공이 살짝 몰린 감이 없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중계 플레이가 조금이라도 지체되어 3루타로 이어졌다면 슬라이더를 던질 때마다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박유성이 3루에서 타자 주자를 잡아준 덕분에 임찬기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음 이닝을 준비할 수 있게 됐다.
“유성아! 뭐 해 인마. 네가 1번이잖아! 제일 어린 게 아주 그냥 제일 굼뜨지. 빨리빨리 준비해!”
박유성이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게 못마땅했던지 송현민이 괜히 짜증을 냈다.
“네! 갑니다~”
대충 글러브를 내려놓은 뒤 박유성은 보란 듯이 기정후가 준 빨간색 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송현민이 냉큼 다가오더니 박유성의 손목을 붙잡았다.
“동작 그만. 어디서 밑장 빼기냐?”
“제 방망인데요?”
“진짜 이러기냐?”
“오늘은 빨강이 땡겨요.”
“너 자꾸 이러면 나 삐뚤어진다.”
“그게 지금 한창 어린 후배 앞에서 할 소리예요?”
“그 배트 쓰기만 해. 지금까지 협찬한 거 전부 돈 받을 거야. 진짜야. 농담 아니다?”
“어휴. 알았어요. 알았어. 암튼 소심해가지고는.”
송현민에게 복수한 뒤 박유성은 대기 타석으로 들어가 가볍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면서 연습 투구에 들어간 도미니카 공화국의 선발 투수, 루이스 카스티오를 바라봤다.
‘오랜만이야, 루이스. 그동안 잘 지냈니? 못 본 사이에 좀 야윈 거 같네.’
다이아몬드 백스의 4선발로 뛰고 있는 루이스 카스티오는 박유성을 처음 보는 것이겠지만.
박유성은 1회차 시절과 2회차 시절에 루이스 카스티오를 상대한 경험이 있었다.
5년쯤 지나서 랜더스의 용병 투수로 영입되기 때문이었다.
1회차 시절에는 루이스 카스티오만 나오면 기분이 좋았다.
포심 패스트 볼과 슬라이더, 투 피치 스타일에 제구가 좋은 편이 아니라 공을 맞히기가 쉬웠다.
하지만 2회차 시절에는 생각만큼 재미를 보지 못했다.
1회차 시절에 비해 스윙이 커진 탓인지는 몰라도 스위트 스폿에 공을 얹는 게 어려웠다.
‘그래도 지금 타격 스타일은 1회차에 가까우니까 해볼 만해.’
2회차가 끝날 무렵부터 박유성은 힘을 빼고 정확도를 높이는 스윙으로 회귀했다.
한창때야 빗맞은 타구도 가볍게 내야를 넘겼지만.
나이를 먹고 나니까 큰 스윙이 체력적인 부담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고민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지금의 타격폼이 완성됐다.
파워 포지션까지의 과정은 2회차 시절을 유지하되 파워 포지션 이후 히팅에 이르는 동작은 1회차 시절처럼 간결하게.
아직 한창때만큼 근력이 올라오지 않아서 스윙이 가벼운 게 아쉽지만 백 타석 가까이 맞붙어봤던 루이스 카스티오의 공을 때려내는 건 문제없을 것 같았다.
박유성이 타석에서 실실거리자 포수 카를 베드윈(레드삭스 AAA)이 바깥쪽 사인을 냈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한 야구 선수들 중에 일본의 스즈키 지로와 함께 가장 어린 선수지만.
앞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게릿 벌렌더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때려냈으니 조심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인을 받은 루이스 카스티오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카를 베드윈의 미트를 향해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퍼엉!
묵직한 포구 소리에 이어 전광판에 97mile/h(≒156.1㎞/h)이라는 구속이 찍혔다.
“공 좋은 건 여전하네.”
랜더스에서 뛰던 시절에도 루이스 카스티오의 포심 패스트 볼은 빠르고 묵직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 빠른 공을 스트라이크 존에 가깝게 붙이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번에도 볼일 것 같은데 하나 지켜볼까?”
박유성이 느긋하게 방망이를 들어 올렸다. 그 예상대로 루이스 카스티오가 내던진 공이 몸쪽 낮게 빠졌다.
-이번에는 슬라이더였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잘 골라냈습니다.
-볼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박유성 선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입니다.
-볼카운트가 유리한 만큼 공 하나 정도는 더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말씀드리는 순간 루이스 카스티오 선수가 공을 던집니다. 아아, 쳤습니다. 타구가 유격수 깊숙한 곳으로 흐릅니다.
-내야 안타가 나올 것 같은데요?
-유격수 에밀리 카브레라 선수가 공을 잡아 1루로! 1루에서 아웃! 아, 1루심이 판정을 번복합니다!
-1루수가 공을 떨어뜨렸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1루수 실책으로 출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