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23화
18. 슈퍼 썬(2)
박유성의 홈런으로 경기가 뒤집히자 양 팀 더그아웃이 부산해졌다.
“지금 찬우 투구수가 몇 개지?”
“투구수는 아직 여유가 있는데 타순이 돌았습니다. 1번 타자부터 시작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꿔?”
“리드를 당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뒤집었으니까요. 일단 불펜을 대기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봉정근 투수 코치의 의견을 받은 강기태 감독은 일단 좌완 장성찬과 우완 임태규를 준비시켰다.
좌타자들이 많은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일단 장성찬으로 급한 불을 끄고 좌타자에게 강한 임태규를 적시에 투입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여전히 3타자 이상을 상대한 투수만 교체를 허락하고 있지만 이번 올림픽 룰은 달랐다.
경기 수가 많지 않고 참가국 중에 만만한 곳이 없다 보니 교체 투구수 제한이나 상대 타자 제한 규정이 빠져 있었다.
미국 대표팀도 그 점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한국에서 불펜을 가동한 모양입니다.”
“벌써요?”
“리드를 잡았으니까 어떻게든 굳히려는 것 같습니다.”
미국 대표팀 타자들이 세계 최고 레벨의 선수들이라고는 하지만 생전 처음 본 투수의 공을 공략하기란 한계가 있었다.
현 미국 대표팀 선수 중에 3년 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참가했던 이들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대한민국 대표팀은 2년 전 아시안게임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단행한 상태였다.
그나마 공이 눈에 익은 송찬우가 조금 더 던져준다면 해볼 만하겠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이 악물고 투수들을 쏟아낸다면 추격이 어려워질 수 있었다.
후속 타자 김하선이 유격수 땅볼로 물러나면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6회 초 공격이 끝이 나자 에릭 지터 감독은 곧바로 대니 존슨을 호출했다.
“대니. 무조건 출루해야 해.”
“네. 감독님.”
“앞선 타석들처럼 성급하게 방망이를 휘두르지 말고 공을 최대한 지켜보라고. 한국도 리드를 날리고 싶지 않을 거야. 까다로운 공을 던질 거라고.”
현역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 에릭 지터 감독이 신중해질 것을 주문했다.
인디언스의 1번 타자인 대니 존슨은 빠른 발과 정교함에 장타력까지 두루 갖췄지만 인내심이 부족했다.
첫 타석 때는 2구를 건드려 땅볼로 물러났고.
두 번째 타석 때도 초구를 쳐서 파울 플라이로 아웃이 됐다.
송찬우가 언제까지 마운드를 지킬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두 타자인 대니 존슨의 출루가 꼭 필요했다.
“걱정 마세요. 감독님. 이번에는 최대한 공을 지켜보겠습니다.”
대니 존슨이 다짐하듯 말했다.
하지만 대니 존슨의 공격적인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경호는 역으로 높은 코스의 스플리터를 주문했다.
후앗!
송찬우가 이를 악물고 내던진 공이 거의 한복판으로 날아들자 대니 존슨은 반사적으로 방망이를 움직였다.
최대한 공을 지켜보겠다고 했지만 그건 나쁜 공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지금처럼 스트라이크 존에 공이 들어왔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따악!
대니 존슨이 걷어 올린 타구가 우중간 쪽으로 높게 솟구치자 관중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제대로 힘을 싣지 못한 타구는 워닝 트렉 앞쪽에서 고꾸라졌고.
그곳에는 일찌감치 백스탭을 밟은 박유성이 서 있었다.
-대니 존슨 선수가 친 공을 박유성 선수가 잡아냈습니다. 원 아웃.
-타구가 생각보다 멀리 날아갔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미리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투입된 이후로 지금 중견수 플라이만 4개째인데요. 확실히 대수비 쪽으로 타구가 간다는 야구의 속설이 맞나 봅니다.
-사실 방금 전 타구도 코스만 놓고 보자면 기정후 선수가 처리를 했어야 했거든요. 그런데 박유성 선수가 기정후 선수에게 자신이 잡겠다고 콜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왕성한 수비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송찬우 선수가 다시 한번 박유성 선수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립니다.
-송찬우 선수 입장에서도 마음이 편하겠죠. 플라이 타구는 박유성 선수가 거의 다 잡아줄 거라는 믿음이 생기니까 타자를 맞춰 잡기도 수월할 테고요.
-반면 미국 대표팀의 에릭 지터 감독은 경기가 잘 안 풀린다는 표정인데요.
-아마 이런 흐름 자체를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무사 3루 상황에서 추가 득점에 성공했다면 지금쯤 미국 대표팀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겠죠.
-그 흐름을 바꿔놓은 선수가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 박유성 선수입니다.
-솔직히 장호영 캐스터가 그 표현을 밀 때마다 너무 이르지 않나 싶었는데 오늘 경기를 보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선철 해설위원도 박유성 선수를 인정하신다는 거죠?
-인정하고 말고 할 게 있겠습니까? 오늘 경기를 이대로 잡아낸다면 MVP는 박유성 선수가 될 텐데요.
이선철 해설위원의 얘기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현지 중계 카메라가 중견수 쪽을 비췄다.
바로 그때 따악, 하는 타격음이 울렸고.
그와 동시에 박유성이 앞쪽으로 빠르게 스타트를 끊었다.
카메라는 그대로 박유성을 쫓았다.
놓친 타격 장면이야 리플레이로 보여주면 그만.
박유성의 신들린 수비의 비결을 파헤치기 위해 집요하게 카메라를 움직였는데.
촤라라랏!
박유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허벅지로 슬라이딩을 해서 드롭성 타구를 건져 올렸다.
“와우.”
경력 10년 차인 카메라맨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지금껏 수많은 메이저리거들을 카메라에 담아왔지만 박유성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슈퍼 플레이를 해내는 선수는 처음이었다.
미국 중계석에서도 쉴 새 없이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 타구를 썬이 또다시 잡아냅니다.
-리플레이 화면이 나오는데요. 쏭이 바깥쪽 스플리터를 던졌고 케빈 모랄이 퍼 올렸거든요. 2루 베이스와 중견수 앞 공간으로 떨어지는 안타성 타구였는데 그걸 썬이 처리했습니다.
-앞서 루이스 넬슨의 타구를 잡아냈을 때도 놀라웠지만 방금 전 수비는 베테랑 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맞아요. 저 선수는 무작정 슬라이딩을 하지 않습니다. 10년 차 수비수처럼 자신이 잡을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중계 카메라가 다시 상기된 얼굴의 송찬우를 잡았지만.
박유성에 대한 칭찬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강기태 감독도 박유성을 믿고 투수 교체 타이밍을 늦췄다.
“이번 이닝은 찬우에게 맡기자고.”
“마크 스테리 타석입니다. 앞선 타석 때 안타를 때려냈고요.”
“빗맞은 안타였잖아. 찬우도 잘 던지고 있는데 6회까지는 맡겨야지. 안 그래?”
형님 리더십으로 유명한 강기태 감독이 고집을 부리자 봉정근 투수 코치도 한발 물러났다.
공 2개로 두 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으니 송찬우의 기를 살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선 미국 대표팀의 간판타자, 마크 스테리는 그렇게 만만한 타자가 아니었다.
박경호가 집요하게 몸 쪽 낮은 코스로 승부를 걸었지만 마크 스테리는 1번 타자라도 되는 것처럼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공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풀카운트 접전 끝에 기어코 볼넷을 골라 나갔다.
“대단하네. 괜히 마크 스테리가 아니야.”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를 연구하기 시작한 건 박유신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고민하던 시점이라 마크 스테리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40년 차인 자신도 몸이 움찔거릴 만 한 공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까 과연 아메리칸 리그 MVP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강기태 감독이 더그아웃을 박차고 마운드로 올라갔다.
“투수 교체 타이밍이긴 한데…… 감독님 성격에 안 바꾸시겠지?”
2사 이후이긴 하지만 볼넷으로 주자가 나갔고 강타자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니 투수를 바꾸는 게 나아 보였다.
그러나 강기태 감독은 송찬우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리고는 그대로 더그아웃으로 몸을 돌렸다.
“분위기가 쎄한데.”
타석으로 들어오는 4번 타자 코리 베츠를 보며 박유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송현민이 옆에 있었다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한마디 했겠지만.
프로에서만 40년을 뛰다 보니 선견지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충 느낌이 왔다.
뭔가 일이 벌어지기 직전의 전조 같은 거라고나 할까.
게다가 라이벌이라 여기는 마크 스테리가 앞선 4회에 이어 또다시 출루를 했으니 내셔널리그 MVP인 코리 베츠도 이를 악물 것 같았다.
“제발 빠지지만 마라. 나한테 보내라. 넘기지도 말고.”
마치 영화 속 주술사라도 된 것처럼 박유성은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주절거리다 보면 정말로 타구가 정면으로 날아오곤 했다.
하지만 박유성의 예상대로 이를 악물고 타석에 들어선 코리 베츠는 1-1에서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정확하게 밀어 때려 좌중간을 완전히 갈라 버렸다.
-아, 공이 펜스까지 굴러갑니다. 마크 스테리 선수는 2루를 돌아 3루로! 코리 베츠 선수도 2루로 내달립니다!
-타구를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마크 스테리 선수가 홈으로 들어오는 건 막아야 해요.
이선철 해설위원이 실점만은 막아야 한다며 간절히 외쳤지만.
박유성이 타구를 손에 잡았을 때는 이미 3루 베이스 코치가 팔을 휘돌리던 상황이었다.
“유성아!”
외야 잔디 깊숙이 다가온 박찬희가 공을 달라고 소리쳤다.
박유성의 송구가 빠르고 정확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외야가 넓은 다저스 파크에서 홈으로 직접 송구를 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박유성은 곧바로 도움닫기를 한 뒤에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고.
그 공이 박찬희의 옆을 지나 3루를 지키고 있던 김하선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이 3루 쪽으로 향하자 코리 베츠가 뒤늦게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했지만 김하선은 여유롭게 글러브를 뻗어 코리 베츠의 오른팔을 찍었고.
“아웃!”
눈을 크게 뜨고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던 3루심은 마치 어퍼컷을 날리듯 주먹을 쳐올렸다.
-아, 지금 코리 베츠 선수가 3루에서 아웃이 됐는데요.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리플레이 화면을 봐야겠는데요? 만약에 마크 스테리 선수가 홈을 밟기 전에 코리 베츠 선수가 아웃이 된 거라면 방금 득점은 무효가 됩니다.
-일단 강기태 감독이 통역을 대동하고 구심에게 가는데요. 챌린지를 신청하겠죠?
-3루와 홈의 상황을 동시에 체크한 심판은 없을 테니까요. 리플레이를 통해 정확하게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비디오 판독이 진행되는 동안 박유성은 감백호와 기정후에게 붙들려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야 인마, 찬희한테 던졌어야지!”
“그래, 유성아. 타자 주자 잡은 건 잘했는데 그래도 찬희한테 주는 게 맞아.”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요.”
“너 설마 찬희가 아무 생각 없이 홈으로 공을 던질까 봐 그런 거야?”
“아니요. 그럴 리가요.”
“말하는 거 보니까 아닌 게 아닌데?”
“저도 찬희 선배한테 공을 던지려고 했는데요. 하선 선배님하고 눈이 마주쳤습니다.”
“하선이 형하고?”
“네. 제 송구를 기다리시는 거 같아서 욕먹을 각오하고 던진 건데 다행히 잘 들어간 거 같습니다.”
김하선 핑계는 반쯤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경험이 많았던지 김하선이 먼저 3루 베이스를 지키고 있었고.
박찬희가 공을 3루로 연결하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타자 주자와 겹칠 것 같아서 다이렉트로 송구를 했다.
다만 기정후와 감백호에게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막내이다 보니 그런 사정들을 일일이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비디오 판독 결과가 나왔던지 심판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분석 센터 결과를 전해 들은 구심이 양팔을 흔들며 득점 무효를 선언했다.
-아, 득점이 취소됐습니다. 박유성 선수의 기지로 대한민국 대표팀이 다시 한 점 앞서갑니다!
그 한 점의 리드를 마지막까지 지켜낸 대한민국 대표팀은 우승 후보라 불리던 미국 대표팀을 2 대 1로 꺾고 LA 올림픽 야구 첫 승을 거뒀다.
그리고 박유성은 전 세계 야구팬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똑똑히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