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22화
18. 슈퍼 썬(1)
1
오리엔테이션 때만 해도 박정일과 나예리는 앙숙이었다.
술 게임을 하다 벌칙에 걸린 박정일이 동기 중에 가장 콧대가 높았던 나예리에게 억지 고백을 했는데 나예리가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기 때문이다.
‘난 너 같은 애 딱 질색인데?’
나중에야 자신이 다른 여자 동기들에게 살갑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나예리가 질투를 했다는 사실을 듣게 됐지만.
나름 외모에 자신이 있었던 박정일은 한동안 나예리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나예리가 수강했다는 이유만으로 전공 수업까지 취소했다가 담당 교수에게 불려가 호되게 혼이 나기까지 했다.
“그때 너 엄청 찌질했었는데. 이런 게 뭐가 좋다고 참.”
불현듯 떠오른 과거를 회상하며 나예리가 박정일의 볼을 꼬집었다.
그러자 박정일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할 소리다. 진짜 너 그때 예쁜 거 말고 볼 거 없었어.”
“여자가 예쁘면 됐지 뭘? 너 얼빠잖아.”
“나 몸매충이거든?”
“그래서 뭐? 내 몸매에 불만 있다 이거야?”
“뭐래. 나 몸매충이라고. 그러니까 널 만나지.”
“칫. 됐어. 너랑 안 놀 거야~”
오늘도 동아리 방 소파에서 꽁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복학생 선배, 박현재가 짜증을 냈다.
“야. 너희가 여기 전세 냈냐? 어?”
“형은 왜 저희한테만 뭐라고 해요?”
“맞아. 현재 오빠 좀 이상해. 저러니 여친한테 차이지.”
“야! 차인 게 아니라 내가 찬 거거든?”
“뭐야? 현재 형 여친 있었어? 언빌리버블!”
“내가 더 충격적인 사실 말해줄까?”
“뭔데? 설마 내가 아는 사람이야?”
“무용과에서 제일 예쁜 언니야.”
“뭐? 그게 말이 돼?”
“심지어 그 언니를 현재 오빠가 참.”
“거짓말 치지 마라. 그게 말이 되냐?”
“이것들이 사람 면상에다 대고 뭐 하는 짓이지? 너희 둘 다 꺼져 버려! 빨리 나가, 이 한 쌍의 추악한 바퀴벌레 커플 같은 놈들아!”
박현재가 소리를 지르자 나예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가려고 했거든요?”
“어디 가게? 커피 마시자고?”
“이제 곧 3시잖아. 자리 잡고 준비해야지.”
“3시? 무슨 자리? 아직 낮인데?”
“으이그. 생각하는 거하고는. 오늘 야구 하는 날이잖아!”
“아! 맞다. 오늘이지?”
박정일도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박현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너희들 야구 룰은 아냐?”
“당연하죠. 저희가 오빠보다 잘 알걸요?”
“내가 지금까지 직관 간 게 몇 번인데, 장난해?”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하고 야구장 다녔거든요?”
“나는 우리 할아버지 손 잡고 야구장 다녔거든요?”
“어휴, 유치해. 가자 정일아.”
“그래. 제발 꺼져줘라. 부탁이다.”
박정일과 나예리는 동아리실을 나와 나예리가 자취하는 원룸으로 향했다.
“나 똥 좀.”
“어휴. 넌 무슨 우리 집 올 때마다 똥을 싸? 영역 표시하니?”
“갑자기 마려운 걸 어떻게 해?”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간 박정일은 3분 만에 개운한 얼굴로 돌아왔다.
“토끼세요? 무슨 똥을 그렇게 빨리 싸?”
“그만큼 내 장이 건강하다는 뜻이지.”
“좋겠다. 똥쟁아.”
“그러지 말고 우리 뭐 좀 먹자. 쌌더니 배고프네.”
“아까 점심 먹었잖아?”
“점심은 점심이고. 야구를 손가락 빨면서 볼 수는 없잖아.”
“잠깐 기다려 봐. 만두 사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 돌려 먹자.”
“오올, 냉동만두 좋지~”
나예리가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동안 박정일은 TV를 켜고 채널을 맞췄다.
“SBX로 볼 거지?”
“그럼. 해설은 선철이 형이지.”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는 선수들이 대거 방송계로 진출한 상황이지만 박정일과 나예리는 이선철 해설위원의 SBX를 선호했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함께 야구 중계를 봐온 탓에 이선철 해설위원의 목소리가 아니면 야구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미국은 지금 몇 시야?”
“잠깐만. LA가 서울보다 16시간 빠르니까 오전 11시에 하네.”
“오전 11시? 그 시간에 야구하면 관중들이 오나?”
“올림픽인데 오겠지. 와, 대박.”
“왜?”
“만원이래.”
“진짜?”
전자레인지 해동 버튼을 누른 뒤 나예리도 쪼르르 TV 앞으로 달려왔다.
옵션으로 넣어준 40인치 TV를 통해 다저스 파크의 전경이 펼쳐졌는데 농담이 아니라 빈자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많이 왔다. 거의 랜더스 필드 보는 줄.”
“에이, 자이언츠 파크겠지. 랜더스 올해 만원 관중 거의 못 찍었잖아.”
“정일아. 나 지금 젓가락 들었다.”
“우리가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자. 랜더스가 성적은 좋지만 관중 동원력은 그닥이잖아.”
“응, 아니야. 자이언츠는 관중만 많지 성적은 개판이죠?”
“자이언츠 아직 포시 가능성 살아 있다. 아직 타이거즈하고 세 경기 차이거든?”
“랜더스는 지금 1위거든?”
입학 후 1학기 내내 원수처럼 지내던 박정일과 나예리가 친해진 건 야구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다가 대학 진학 후 서울에서 살게 된 박정일은 자이언츠가 수도권 원정을 올 때마다 어떻게든 표를 구해서 직관을 갔는데 야구장에서 분홍색 랜더스 유니폼을 입은 나예리와 마주친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못 본 체하고 지나쳤지만.
매장에서 다시 부딪치고 화장실에서 또 부딪치고 나니까 서로 웃음이 터졌다.
“너 왜 나 쫓아다니냐?”
“뭐래. 나도 오줌 싸러 온 거거든?”
“그런데 너 혼자 왔어?”
“남이사.”
“좋게 물어보는데 삐딱하게 굴래?”
“그래. 혼자 왔다. 왜?”
“그럼 우리 테이블로 가자. 친구하고 같이 보기로 했는데 친구가 약속 있다고 안 옴.”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그랬냐?”
“참고로 매점 바로 옆 테이블임.”
“크흠. 그럼 같이…… 봐줄까?”
“어이없네. 같이 봐줄까는 뭐야.”
“그런데 그 친구, 남자는 아니지?”
그날.
자이언츠는 랜더스를 상대로 9대 0 완승을 거두며 랜더스 원정 9연패의 사슬을 끊었다.
하지만 박정일은 대놓고 좋아하지 못했다.
경기에 진 게 서러웠던지 나예리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야, 그만 울어. 남들이 보면 내가 울린 줄 알잖아!”
“너 때문이야! 네가 옆에서 깐족거려서 진 거라고!”
“너도 같이 깐족거리셨거든요? 그러지 말고 코노나 가자.”
“됐어! 내가 너하고 코노를 왜 가?”
“너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한다며? 가서 스트레스 풀자. 그리고 자이언츠 그만큼 볶아 먹었으면 한 경기 정도는 져줘도 되잖아. 안 그래?”
“맞아. 오늘 경기는 랜더스가 져준 거야. 절대 실력으로 진 게 아니야!”
“네에. 네에. 자이언츠가 승리 당한 겁니다. 그러니까 가시죠. 랜더스 골수팬 나예리 씨.”
그렇게 코인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푼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예리의 자취방에서 맥주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다음 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고를 친 뒤였다.
나예리는 여자 동기들에게 인기가 많은 박정일이 술김에 실수한 거라며 도망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여자 친구들만 많을 뿐이지 제대로 된 연애는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박정일은 나예리를 책임지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이제 사귀는 거지?”
“뭐래? 넌 한 번 자면 사귀냐?”
“그런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암튼 이렇게 된 거 잘 만나보자.”
“너 나 싫어하잖아?”
“싫어했었지. 그런데 이렇게 다시 보니까 지금은 아닌 거 같아.”
“뭐래. 암튼 나 만나고 싶으면 이거 하나 약속해.”
“뭔데?”
“난 죽어도 랜더스 응원할 거야. 나한테 자이언츠 응원하란 소리 하지 마.”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대신에 세컨 팀으로 상대 팀 응원해 주자. 어때?”
“으윽. 나더러 꼴등을 세컨 팀 삼으라고?”
“야, 랜더스는 뭐 평생 잘나갈 거 같냐? 너희도 박경호 민병규 빨이야. 민병규 메이저리그 가면 자이언츠가 더 셀걸?”
그때 이후로 1년 넘게 만나는 동안 박정일과 나예리는 서로의 응원팀을 존중하자는 약속을 잘 지켜왔다.
하지만 4회 말.
민병규의 연이은 실책성 플레이로 허무하게 한 점을 내주자 박정일의 입에서 짜증이 터져 나왔다.
“와, 진짜 민병규 쟤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야.”
“선 넘지 말지?”
“이건 선 넘는 게 아니지. 국대 경기잖아.”
“그러는 백영완은 뭘 했는데? 1번으로 나와서 삼진만 먹고 안타 하나 못 쳤는데 뭐?”
“민병규도 아까 안타 못 쳤거든?”
“민병규는 주 포지션이 1루거든?”
그렇게 처음으로 야구 때문에 싸움이 나려던 찰라.
-……기정후 선수가 좌익수로 자리를 옮기고 백영완 선수를 대신해 박유성 선수가 투입됐습니다.
갑작스럽게 수비가 바뀌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박유성 들어왔는데?”
“그럼 누가 빠지는 거야?”
“당연히 민병규지.”
“아 씨. 짜증 나아!”
“뭐지? 아닌데? 민병규 대신 감백호가 나왔는데? 그럼 기정후를 빼는 거야?”
“미쳤어? 기정후를 빼면 어떻게 이겨?”
“하아. X발. 백영완이네.”
“백영완? 헐, 진짜네?”
자이언츠 선수들 중에 이번에 올림픽 대표팀에 승선한 건 백영완과 김재신 두 명이었다.
그중 박정일이 신경 쓰는 선수는 백영완이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할 경우 곧바로 군대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빼도 왜 하필 백영완을 빼냐?”
“기정후 오리올스에서 주로 우익수로 뛰잖아. 그래서 바꾼 거 같은데?”
“진짜 민병규 오늘 안타 못 치기만 해라. 내가 죽을 때까지 저주한다.”
“자기야아~ 우리 병규 오빠가 백영완 대신해서 오늘 안타 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지?”
“어우, 저리 가!”
백영완의 교체가 속상했지만 박정일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민병규의 연속 삽질로 타자 주자가 3루까지 가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점수 내주면 오늘 경기 힘들 텐데.”
“근데 무사라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아. 송찬우 잘 던졌는데 진짜 아깝네.”
“미국 투수 이름이 뭐였지?”
“게릿 벌렌더?”
“암튼 걔 덩치 장난 아니더라.”
“작년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 상 투수라잖아.”
“작년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 크리스 반스 아니야?”
“그놈이 그놈이지 뭐.”
그때였다.
따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루이스 넬슨의 타구가 유격수 뒤로 날아가자 박정일과 나예리의 입에서 동시에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그런데 화면 위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박유성이 그 타구를 건져 올렸다.
“뭐야? 잡은 거야?”
“잡았어! 잡았다고!”
“3루! 빨리 3루!”
“정일아! 더블 플레이야!”
미국 대표팀의 챌린지 신청 때 잠시 숨을 죽였던 박정일과 나예리는 판정이 번복되지 않자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됐어! 아직 할 만해!”
“병규 오빠가 홈런 때릴 거야. 조금만 기다려.”
“민병규 진짜 홈런 쳐라. 못 치면 가만 안 둔다.”
“믿어. 우리 병규 오빠는 찬스에 강하니까.”
랜더스 선수들 중에 나예리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민병규.
얼굴도 잘생긴 데다가 야구까지 섹시하게 잘하기 때문이었다.
랜더스 팬들이 민병규에게 붙여준 수많은 별명 중에 나예리가 가장 좋아하는 건 역전규였다.
결승타도 팀 내 1위지만 팀이 뒤처지는 상황에서 역전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건 언제나 민병규였다.
6회 초.
민병규가 선두 타자로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서자 나예리는 두 손까지 모아가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병규 오빠. 하나만. 제발요. 네?’
하지만 믿었던 민병규는 게릿 벌렌더의 빠른 공에 3구 삼진을 당해 버렸고.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랜더스의 안방마님 박경호까지 초구를 건드려 유격수 땅볼로 물러나니까 응원할 맛이 뚝 떨어졌다.
“쉽지가 않네. 쉽지가 않아.”
마치 랜더스 타자들의 부진을 꼬집는 듯한 박정일의 푸념이 짜증 나려던 찰라.
-아! 공이 빠집니다. 박찬희 선수가 1루로 내달립니다.
뜬금없이 박찬희가 1루로 나갔다.
“파울 아니야?”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이라는데?”
상황 자체가 어이없긴 했지만 박정일과 나예리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앞서 김하선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의 두 번째 출루였다.
게다가 다음 타자는 박정일은 물론 나예리도 인정한 대한민국 야구계의 희망, 박유성이었다.
“유성아, 제발!”
“안타 안 쳐도 되니까 볼넷으로 나가자. 침착하게. 유성아, 넌 할 수 있어!”
“기왕이면 안타가 낫지 않아?”
“자기야. 욕심부리지 말자. 우리 이번 기회 무조건 살려야 해.”
나예리는 박유성이 안타를 칠 거라 기대했지만 박정일은 볼넷만 얻어줘도 감지덕지라 여겼다.
다음 타자가 앞서 안타를 친 김하선인 만큼 박유성이 찬스를 이어준다면 동점은 물론이고 역전까지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따악!
게릿 벌렌더가 초구를 내던지기가 무섭게 박유성이 곧장 방망이를 휘둘렀다.
“아아! 그걸 왜 쳐!”
박정일이 반사적으로 짜증을 내뱉었다.
송현민은 물론이고 기정후와 감백호까지 제대로 공략해 내지 못한 공이다 보니 외야 플라이로 잡힐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장호영 캐스터의 샤우팅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이 타구가! 넘어갑니드아아아! 홈런! 대한민국의 막내 박유성 선수가 게릿 벌렌더를 무너뜨렸습니다!
순간 멍하니 TV를 지켜보던 박정일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마추어 선수인 박유성이 때렸으니 타구가 멀리 뻗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화면에 잡힌 공이 쉬지 않고 허공을 가르더니 기어코 담장을 넘겨 버린 것이다.
펜스 앞까지 쫓아갔던 미국 대표팀의 우익수 루이스 넬슨의 허탈한 얼굴이 화면에 잡히는 순간.
나예리가 환호성을 내지르며 박정일을 꼭 끌어안았다.
“역전이야, 역전! 우리 유성이가 해냈어!”
그 시각.
올림픽 야구를 지켜보던 모든 시청자의 입에서 나예리와 똑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유성이.
아마추어 신분이라 아직 소속팀이 없다 보니 그 누구도 우리 유성이라는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유성아아아아!”
“이 자식! 이 기특한 자식!”
박유성이 홈플레이트를 밟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대표팀 선배들이 격하게 반겨주었다.
특히나 민병규는 눈시울까지 붉히며 박유성을 끌어안았다.
“유성아. 고맙다. 진짜 고맙다.”
“형. 우는 거 아니죠?”
“안 울어 인마. 남자가 울긴 왜 우냐?”
“지금 형 얼굴 백퍼 클로즈업이거든요? 그러니까 어금니 꽉 깨물어요. 평생 흑역사로 남고 싶지 않으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