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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121화 (121/412)

타자 인생 3회차! 121화

17. 우리 유성이~(8)

연이어 호수비를 펼친 박유성을 감백호가 가장 먼저 반겼다.

“야 인마. 그거 내 거야.”

“제 공 아니었어요?”

“짜식이 능청은. 암튼 고맙다. 내가 쫓아갔으면 놓쳤을 거야.”

“에이, 선배님이셨으면 가볍게 잡으셨죠. 그냥 제가 워밍업을 못 해서 대신 쫓아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그런데 너 진짜 열여덟 살 맞냐?”

감백호는 박유성이 신기했다.

자신도 프로로 넘어왔을 때 최고의 유망주 소리를 듣긴했지만 박유성만큼은 아니었다.

박유성은 그냥 잘했다.

아마추어네 유망주네 수식어를 붙일 필요 없이 같은 프로 선수가 보기에도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인생 3회차를 사는 박유성은 다회차 버프 없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인 감백호의 칭찬이 머쓱하기만 했다.

“저 나름 동안인데요?”

“야구선수 중에 동안이 어디 있어 인마. 땡볕에서 야구하다 보면 제일 먼저 맛이 가는 게 피부인데.”

“그래도 저 평소에 팩도 하는데요?”

“그래봐야 티도 안 난다니까 그러네. 암튼 앞으로 나한테도 형이라고 불러라.”

“네. 형.”

“이놈 봐라? 하란다고 바로 하네?”

“예전부터 형이라고 부르고 싶었어요. 백호 형.”

박유성이 웃으며 들러붙자 감백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이러다 나중에는 맞먹는 거 아니냐?”

그때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기정후가 합류했다.

“뭐야? 둘이 뭐가 그렇게 재밌어?”

“형. 유성이 이 자식 장난 아니에요. 제가 형이라고 부르랬더니 바로 말 깐 거 있죠?”

“에이. 제가 언제 말을 깠습니까.”

“그래 인마. 우리 유성이 그럴 애 아니야.”

“역시 절 알아주는 건 정후 선배님뿐이에요.”

“그런데 너 왜 내 배트 안 쓰니?”

“……네?”

“김석률 수석 코치님한테 내 배트 받았다면서? 요즘 그거 안 쓰더라?”

“아, 그건 집에 잘 모셔놨어요. 부러지면 안 되잖아요.”

회귀 후에는 손에 맞는 배트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용했지만.

송현민을 통해 장비 스폰을 받은 이후로 기정후의 빨간색 방망이는 방 한쪽에 잘 손질해서 세워놓았다.

송현민표 방망이는 부러뜨려도 얼마든지 리필(?)이 가능하지만 기정후의 방망이는 한 자루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U-18 야구 월드컵 MVP 이후 박유성의 인터뷰 기사를 봤던 기정후는 내심 섭섭했다.

“네 롤모델이 나라면서? 그런데 왜 현민이 방망이를 써? 그거 좀 무겁지 않아?”

“지금은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경기 끝나면 내 방으로 와. 그렇지 않아도 너 주려고 배트 몇 자루 가져왔거든? 앞으로는 그거 써.”

“그래. 현민이 놈 거 쓰지 말고 차라리 정후 형 거 써라. 현민이 놈 뻑하면 너 야구 잘하는 거 자기 덕분이라고 주접떠는데 꼴 보기 싫더라.”

“현민이 형이 그래요?”

“말도 마. 현민이 녀석 얘기 들으면 거의 널 업어 키웠다니까?”

박유성이 감백호와 기정후에게 붙들려 있자 송현민이 더그아웃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되돌렸다.

“형들 뭐 해요? 유성이 앞에서 제 흉 봤죠? 그렇죠?”

“현민이 저 녀석.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야! 박유성! 넌 인마 형 흉보는데 가만있냐?”

“가만있긴요. 저도 열심히 맞장구쳤는데요?”

“뭐?”

“형이 그랬잖아요. 선배님들에게 사랑받으려면 맞장구 잘 쳐야 한다고. 전 배운 대로 한 건데요?”

“야 인마! 내가 언제 그랬어?”

“이야, 우리 유성이가 똑 부러지네.”

“하하. 현민이 넌 유성이한테 안 되겠다.”

메이저리그 삼총사는 박유성이 대견스러웠다.

본래라면 자신들이 이를 악물고 뛰어서 바꿔놓아야 할 분위기를 막내인 박유성이 단번에 가져왔으니 이보다 더 예쁠 수가 없었다.

투수 송찬우도 더그아웃 앞에서 박유성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유성아. 고맙다.”

“제가 더 감사하죠.”

“뭐?”

“선배님이 좋은 공을 던져주셔서 제가 잡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뜬금없이 넙죽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박유성을 보며 송찬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먹이는 것 같기도 한 게 박유성이 무슨 의미로 말을 한 것인지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박경호가 웃으며 해석을 해주었다.

“유성이가 너 칭찬한 거잖아.”

“칭찬 맞아요?”

“후배가 되어서 대놓고 칭찬 못 하니까 돌려 말한 거야. 네 공이 좋아서 타구가 먹혔고, 그래서 자신도 호수비를 펼칠 수 있었다는 얘기라고.”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거 같은데요?”

“암튼 흔들리지 않고 잘 버텼다. 잘했어, 송찬우.”

박경호가 미트로 송찬우의 가슴을 툭 때렸다.

본래 듣기 좋은 말을 잘 안 하는 편이지만 이번 이닝에서 보여준 송찬우의 위기 대처 능력은 칭찬해 주고 싶었다.

“제가 한 게 있나요. 형이 던지라는 대로 던졌을 뿐인데요.”

송찬우가 멋쩍게 웃었다. 빗맞은 안타로 한 점을 내준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박경호가 언제나처럼 든든히 홈플레이트를 지켜줬기 때문이다.

“나도 너 믿고 리드한 거야. 그러니까 야수들 믿고 조금만 더 힘내자.”

“네. 알겠습니다.”

선취점을 내줬지만 대한민국 더그아웃의 표정은 밝았다.

마치 한 점 깔아주고 시작하기로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방금 전 실점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민병규! 넌 인마 내일 하루 종일 펑고 연습해라.”

“미쳤냐? 나도 쉴 때는 쉬어야지.”

“아까 추 코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지금 손 코치님한테 하는 소리야?”

“거짓말 마! 추 코치님이 그럴 리 없어!”

본래라면 실책성 플레이에 의한 실점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언급하지 않는 게 기본인데 다들 농담거리로 삼고 웃어넘길 정도였다.

반면 미국 대표팀 더그아웃 공기는 무거웠다.

연달아 터진 행운의 안타로 선취점을 올리고 무사 3루 기회를 잡았을 때만 해도 승리의 여신이 미국 대표팀을 향해 미소 짓는 것 같았지만.

연달아 펼쳐진 박유성의 호수비 때문에 좋았던 분위기가 짜게 식어버렸다.

팀 경기였다면 클럽 하우스 리더가 나서서 선수들을 독려했겠지만.

메이저리그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선수들을 모아 대표팀을 만들다 보니 총대를 메고 나서는 선수가 없었다.

“코리! 타구는 보고 뛰었어야지.”

“죄송합니다. 감독님.”

“코치가 멈추라는 지시를 내렸잖아?”

“그걸 못 봤습니다.”

“후우……. 그래도 곧바로 3루로 돌아가는 판단은 좋았어. 그런데 슬라이딩은 왜 한 거야?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때는 저도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아서요. 저도 모르게 그랬나 봅니다.”

“네 안타 덕분에 한 점 앞서가고 있으니까 방금 전 플레이는 잊어버려. 대신에 다음번 타석에서는 한 방 날리는 거야. 알았지?”

“네. 감독님. 저만 믿으세요.”

본래라면 코치가 했을 지적을 대신 하며 에릭 지터 감독이 코리 베츠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래서 코칭 스태프도 커리어가 있는 선수 출신으로 채우고 싶었는데.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국제 올림픽 위원회와 기 싸움을 하느라 신경을 써주지 않은 탓에 원하는 코치진을 꾸릴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선수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코치가 3루 베이스에 서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3루 베이스 코치의 사인을 무시하고 코리 베츠가 홈을 향해 내달렸을까?

“아니겠지.”

에릭 지터 감독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수 시절이었다면 저런 식으로 본헤드 플레이를 펼친 선수의 면전에다 대고 쌍욕을 퍼부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마크 코헤인 수석 코치가 에릭 지터 감독에게 다가왔다.

“에릭. 괜찮아요?”

“그럼요. 아무 문제 없어요.”

“혹시 고민 같은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요. 그래야 다른 코치들하고 공유를 하죠.”

“하하. 점수를 냈는데 고민이 있을 리가 있겠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마크 코헤인 수석 코치가 멋쩍게 웃었다.

레전드 출신인 에릭 지터 감독과 달리 메이저리그 커리어도 없고 선수 경력도 짧았지만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에서 10년 넘게 일해온 경력자로서 어떻게든 에릭 지터 감독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에릭 지터 감독은 마크 코헤인 수석 코치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데다가 다른 코치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보니 편하게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나저나 한국의 슈퍼 루키 말입니다. 생각보다 잘하지 않아요?”

에릭 지터 감독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조금 전 코리 베츠의 안일한 주루 플레이 때문에 추가 득점 기회를 날리긴 했지만 원인을 따져보자면 결국 박유성의 호수비가 문제였다.

메이저리그에서도 1년에 한두 번쯤 나올까 말까 한 허슬 플레이로 다저스 파크를 가득 메운 관중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으니 코리 베츠만 탓할 수도 없었다.

그러자 마크 코헤인 수석 코치가 웃으며 말했다.

“한국의 중견수를 말하는 거죠? 꼭 쿼드러플 A 선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쿼드러플 A요?”

“흔히들 메이저리그와 트리플 A를 오가는 선수들을 그렇게 표현하잖아요. 한국의 중견수도 아직 어리다 보니까 투지가 넘쳤던 것 같습니다.”

마크 코헤인 수석 코치는 대수롭지 않아 했지만 에릭 지터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애당초 그가 쿼드러플 A라는 표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고개를 갸웃거린 건.

‘쿼드러플 A레벨에 저런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선수가 있다고? 그럴 리가. 그렇다면 진즉 메이저리그 붙박이로 뛰고 있겠지.’

마크 코헤인 수석 코치는 박유성의 간절함이 기적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에릭 지터 감독도 그 평가 자체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박유성이 실력 이상의 뭔가를 억지로 끌어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록 한평생을 내야수로 뛰었지만 그가 지켜본 박유성의 플레이에는 확신이 있었다.

공의 낙하지점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리면 잡을 수 있다는 확신.

그 공을 잡아내기만 한다면 3루 주자까지 잡아낼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다이빙 캐치 이후 직접 몸을 일으켜 공을 던지지 않고 옆에 있는 수비수에게 후속 처리를 맡겨도 잘 처리해 줄 거라는 확신.

이렇게 확신이 가득 찬 플레이를 펼친 선수를 두고 쿼드러플 A라니.

이건 일종의 인종차별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에릭 지터 감독의 속내를 모르는 마크 코헤인 수석 코치는 초보 감독이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거라 여겼다.

“한 점이긴 하지만 점수를 냈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마운드는 게릿이 지키고 있으니까요.”

게릿 벌렌더는 올 시즌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을 노리는 최고의 투수.

대한민국이 대량 실점의 위기를 넘겼다고 해서 게릿 벌렌더라는 산을 넘긴 어려울 거라고 판단했다.

그 예상대로 대한민국 대표팀의 5회 초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이 났다.

경기 초반에 아껴두었던 투심 패스트볼의 구사 비율을 높이며 마음이 급한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을 가볍게 요리했다.

4번 타자 박준수는 중견수 뜬 공으로 물러났고.

5번 타자 기정후는 2루수 앞 땅볼로.

6번 타자 감백호는 파울팁 삼진을 당했다.

5회 말 미국 대표팀 타자들이 1사 2루의 추가 득점 기회를 무산시키자 게릿 벌렌더는 더 힘을 냈다.

“스트라이크, 아웃!”

수비 실수를 만회하겠다던 7번 타자 민병규를 3구 삼진으로 돌려세운 데 이어.

따악.

8번 타자 박경호를 초구에 유격수 앞 땅볼로 처리했고.

“스트라이크!”

9번 타자 박찬희까지 단숨에 투 스트라이크로 몰아붙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늘 경기는 게릿 벌렌더가 지배하는 느낌이었는데.

후앗!

게릿 벌렌더가 던진 투심 패스트 볼이 손에서 빠지면서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아! 공이 빠집니다. 박찬희 선수가 1루로 내달립니다.

원하던 코스를 벗어나긴 했지만 포수 조이 패런트가 충분히 처리해 줄 수 있는 공이었는데.

게릿 벌렌더의 공을 쫓아다니기 바빴던 박찬희가 냅다 스윙을 해버렸고

그 스윙 때문에 조이 패런트가 공을 놓치면서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비록 실책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이 오늘 경기 두 번째 출루에 성공합니다. 이제 다음 타자는…… 박유성 선수입니다.

박유성이 좌타석에 들어서자 게릿 벌렌더는 공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조이 패런트가 미트를 들어 올리기가 무섭게 한복판을 향해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어디 칠 테면 쳐봐라!

자신을 자극한 타자들을 상대로 기선제압을 하는 게릿 벌렌더 특유의 고집이 담긴 공이었는데.

따악!

“……!”

묵직한 포구 소리와 함께 관중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내야 할 공이 갑자기 머리 뒤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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