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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120화 (120/412)

타자 인생 3회차! 120화

17. 우리 유성이~(7)

“형. 미안해요.”

“넌 인마, 백업을 안 하면 어쩌라는 거야?”

“타구에 정신 팔려서 깜빡했어요. 정후 형이 미친 듯이 달려가기에 잡는 줄 알았죠.”

“그게 말이냐 막걸리냐?”

“암튼 내가 다음 타석 때 꼭 만회할 테니까 나 너무 미워하지 마요. 알았죠?”

“어휴. 얄미운 놈.”

혀를 차던 백영완의 시선이 다시 외야 쪽으로 향했다.

좌익수 자리는 몰라도 우익수 수비는 자신이나 기정후나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중견수가 박유성으로 바뀌어서일까.

외야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포수 마스크를 고쳐 쓴 박경호도 이제야 좀 마음이 편해졌다.

비록 발목이 좋지 않은 상태지만 감백호는 투타 겸업을 했을 만큼 어깨가 좋았고 기정후는 중견수를 소화해 낼 만큼 수비 범위가 넓었다.

그 둘 사이에 연습 경기에서 신들린 수비를 선보였던 박유성을 끼워 넣으니까 비로소 국가대표팀 같았다.

그때 타석으로 덩치 큰 선수가 건들거리며 들어왔다.

“수비를 바꾼다고 뭐가 달라져?”

“……?”

“난 담장 밖으로 날려 버릴 건데?”

그라운드의 악동이라는 별명답게 루이스 넬슨은 보란 듯이 박경호의 성질을 긁어댔다.

하지만 천만다행히도 박경호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뭐라는 거야 인마. 한국말로 해.”

“……왓?”

“미국이라고 텃세 부리는 거야 뭐야?”

“너 지금 나한테 욕한 거야?”

언어라는 건 참으로 신비했다.

서로 대화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들이 전달되다 보니 어지간한 트래시 토크 이상의 신경전이 펼쳐졌다.

그러나 박경호의 영어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의 눈에는 박경호가 말리는 것처럼 보였다.

“경호 형 영어 잘해요?”

“잘하긴. 쟤 영어 때문에 메이저리그 진출 포기했잖아.”

“에이, 설마요.”

“진짜야. 다른 포지션은 상관없지만 포수는 투수하고 말이 통해야 한다고. 우리가 백 년 강하게 말해도 통역이 뭉뚱그려 버리면 의미 전달이 안 돼요.”

“그럼 형은요? 형은 영어 잘해요?”

“내가 경호보단 낫지.”

“오올, 메이저 진출 가능?”

“경호보다 낫다고 했지 영어 잘한단 말은 안 했다.”

“자랑이다 인마.”

민병규와 나경석의 잡담을 듣고 있던 백영완이 코웃음을 쳤다.

경기 중간에 교체가 된 만큼 한두 이닝 정도는 묵묵히 응원하려고 했는데 옆에서 시답잖은 걸로 떠들어대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민병규가 씩 웃으며 말했다.

“형. 표정 좀 풀어요. 형 얼굴만 보면 한 열 점 차이로 지고 있는 줄 알겠어요.”

“지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미국 상대로 1 대 0이면 잘하고 있는 거죠.”

“저기 네가 만들어준 3루 주자 안 보이냐?”

백영완이 3루 베이스 쪽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곳에는 코리 베츠가 3루 베이스 코치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운 좋게 안타를 친 주제에 웃어대는 게 얄미웠지만.

무사에 힘이 좋은 타자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3루 주자가 홈을 밟는 건 막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민병규의 생각은 달랐다.

“형. 저하고 내기할래요?”

“내기? 무슨 내기?”

“3루 주자 들어오나 못 들어오나. 어때요?”

“그래놓고 3루 주자 들어오는 데 걸려고?”

“형은 들어올 것 같아요?”

“그럼? 내야 땅볼만 나와도 홈을 밟을 텐데 저걸 무슨 수로 막아?”

안타가 아니더라도 무사 3루에서 득점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일단 폭투나 패스드볼(포일)이 나오면 곧바로 홈을 밟을 수 있고.

내야 깊숙한 땅볼이나 빗맞은 타구가 나와도 3루 주자가 홈을 노릴 수 있다.

거기에 희생 번트나 희생 플라이까지 더하면 3루 주자를 3루에 묶어두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보다 그냥 한 점을 주고 시작하는 게 마음 편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나 민병규는 자신들을 대신해 대수비로 나간 박유성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형은 3루 주자 들어오는 데 걸어요. 난 못 들어온다에 걸 거니까.”

“진심이냐?”

“애국심 타령하는 거 아니고 진짜 못 들어올 거 같아요.”

“무슨 수로? 찬우가 세 타자 연속 삼진 잡는 걸로?”

“아뇨. 그것보다는 뭐랄까. 그냥 제 느낌적인 느낌인데요.”

“어디 한번 지껄여 봐.”

“루이스 넬슨이 극단적으로 잡아당기는 스타일이잖아요. 외야 수비가 보강됐으니 경호 형은 몸 쪽 승부를 걸 테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중간 쪽으로 먹힌 타구가 나올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요?”

“그래서? 백호가 타구를 처리하면 3루 주자가 쉽게 못 뛸 거라는 거야?”

“백호 말고 유성이요.”

“유성이?”

“왠지 애매한 타구가 나와서 유성이가 멋지게 잡아낼 거 같아요. 그리고 곧바로 3루로 송구해서 더블 플레이. 어때요?”

“지난번 자이언츠와 연습 경기 때처럼?”

“그때 유성이 하는 거 봤잖아요. 못 잡을 것처럼 굴다가 마지막에 건져 올린 거.”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민병규의 말에 홀리듯 백영완의 시선도 박유성에게 향했다.

만약에 정말로 그런 상황이 나와 준다면.

미국 대표팀 쪽으로 넘어간 분위기를 다시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정후를 대신해 중견수 자리에 들어간 박유성도 슬슬 시동을 걸었다.

급하게 몸을 풀어서 100퍼센트 예열이 된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정후 선배님은 정위치. 백호 선배님은 조금 뒤에 잡으셨네. 그럼 내가 백호 선배님 앞쪽까지 커버해야 해.’

감백호의 발목 상태를 고려했을 때 아까처럼 내야를 살짝 넘기는 타구의 처리는 박유성이 전담해야 했다.

코스가 완전히 좌익수 쪽으로 치우친 거라면 모를까.

좌중간으로 향하는 타구는 어떻게든 잡아낼 생각이었다.

“찬우 형. 뒤는 저한테 맡기고 과감하게 승부 봐요.”

박유성이 송찬우의 등번호를 보며 주절거렸다. 그 얘기가 들린 것일까.

후앗!

송찬우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루이스 넬슨의 몸쪽으로 날아갔다.

“어딜!”

루이스 넬슨이 기다렸다는 듯이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그보다 공이 한발 먼저 홈플레이트 위를 뚫고 지나갔다.

-헛스윙! 루이스 넬슨 선수가 초구를 크게 헛칩니다.

-몸쪽 속구였는데요. 루이스 넬슨 선수가 타이밍을 잡지 못했습니다.

-바깥쪽 공을 노렸던 걸까요?

-몸쪽 공은 조금만 몰리면 장타로 이어지기 십상이니까요. 한 점을 뒤진 상황에서 과감하게 몸쪽으로 공을 붙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송찬우는 곧바로 바깥쪽으로 슬라이더를 던져 루이스 넬슨의 파울을 이끌어냈다.

코스는 볼이었지만 초구를 헛쳤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였을까.

루이스 넬슨이 억지로 공을 맞혔고 타구는 백네트 뒤쪽으로 넘어갔다.

볼 카운트가 투 스트라이크로 바뀌자 박경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플리터 사인을 냈다.

비록 연달아 빗맞은 안타를 얻어맞긴 했지만 오늘 경기에서 송찬우의 스플리터는 떨어지는 각이 예리했다.

스플리터를 건드린 타자는 있어도 참아낸 타자가 없으니 던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송찬우도 박경호의 사인을 받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플리터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박유성은 세 걸음 정도 앞쪽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첫 타석 때도 루이스 넬슨은 공을 쫓아다니느라 바빴으니 타격으로 이어진다 해도 타구가 멀리 뻗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 예상대로 루이스 넬슨이 억지로 걷어 올린 타구가 높이 솟구치더니 유격수 뒤쪽 공간으로 급격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젠장할!”

타구를 따라 다급히 뒷걸음질을 치던 유격수 박찬희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조금만 더 뒤쪽에서 수비를 했다면 역동작으로 잡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머리 뒤로 넘어간 타구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형! 비켜요!”

저만치서 누군가의 다급성이 들려왔다.

‘유성이?’

흠칫 놀란 박찬희가 소리 나는 곳을 바라봤다. 그러다 공을 향해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려는 박유성을 발견하고는 타구를 포기하고 그대로 옆쪽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때까지 타구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박유성은 장애물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촤라라라랏!

마치 급브레이크를 밟은 슈퍼카처럼 박유성이 잔디 위로 미끌어졌고.

그 마찰력을 이기지 못한 잔디가 뽑히듯 뜯겨 나갔다.

“젠장할!”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저스 파크 구장 관리인은 제 머리를 잡아 뜯었다.

바로 내일 경기가 있는데 잔디가 망가졌으니 오늘 일찍 퇴근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던 구장 관리인은 이어지는 박유성의 플레이에 탄성을 내뱉어야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움켜잡고 있던 박유성이 몸을 옆으로 굴려 박찬희에게 글러브를 내밀었고.

그 안에서 공을 뽑아낸 박찬희가 곧바로 3루로 공을 던지면서 성급하게 홈으로 내달렸던 코리 베츠를 잡아낸 것이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말도 안 돼? 저걸 잡았다고?”

“리플레이 화면은 왜 안 나오는 거야?”

“챌린지를 신청해! 분명 놓쳤을 거야. 저걸 잡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다저스 파크를 가득 메운 관중들은 자신들의 두 눈으로 본 광경을 쉽게 믿지 못했다.

슬라이딩에 이은 포구와 마지막 순간에 글러브를 들어 올리는 장면까지 트릭이라 의심될 만한 행동은 없었지만 너무나 터무니없는 슈퍼 플레이라 자신들이 잘못 봤을 거라 착각했다.

“챌린지!”

메이저리그 레전드 출신인 에릭 지터 감독도 모처럼 더그아웃 밖으로 모습을 비쳤다.

그러고는 대기 타석에 있던 조시 스트로우를 불러서 느긋하게 다음 타석에 대한 주문을 늘어놓았다.

“방금 타구는 빠졌을 거야. 판정이 뒤집히면 한국은 큰 충격을 받겠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해.”

“자신 있게 휘두르라는 거죠?”

“그래. 한국의 투수가 잘 던지고 있지만 아직 어려. 이런 압박감에 익숙하지 않겠지. 분명 높은 확률로 실투가 나올 거야. 그러니까…….”

그때 전광판으로 리플레이 화면이 나왔다.

그런데 분명 빠져야 할 공이 대수비로 들어간 중견수의 글러브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뭐야?”

“헐, 잡았는데요?”

“말도 안 돼. 저걸 잡는다고?”

예상치 못한 결과에 에릭 지터 감독이 입을 쩍 벌렸고.

“크아아아아!”

“유성아아아아!”

애써 숨을 죽이고 있던 대한민국 더그아웃에서는 선수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챌린지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웃입니다. 원심 그대로 더블 플레이가 인정됐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2루심이 제대로 봤을 겁니다. 애당초 챌린지를 신청할 이유가 없었어요.

-지금 미국 관중들의 표정이 화면에 잡히고 있는데요.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하하. 오늘 경기장을 찾아온 관중들은 이런 플레이가 처음일까요? 세계 최고의 리그라 불리는 메이저리그라면 연례행사로 나올 만한 플레이인데요.

-지금 현지 해설진들도 믿을 수 없는 플레이였다며 극찬을 쏟아내고 있는데요. 정작 박유성 선수의 표정은 덤덤해 보입니다.

-저도 현역 시절에 중견수로 뛰어 봐서 아는데 기분은 좋을 겁니다. 다만 한 점 차이로 뒤지고 있으니까요. 정신 차리고 바로 다음 플레이를 준비해야죠.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대로라면 대한민국 올림픽 야구 대표팀에서 가장 어린 선수가 가장 의젓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대로 박유성은 당장에라도 소리를 내지르며 좋아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배인 민병규의 연속 실책성 플레이로 한 점을 내준 상황에서 개인적인 플레이에 취해 유난을 떠는 것만큼 꼴불견도 없었다.

‘이 플레이는 팬들이 평가해 주겠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박유성은 조시 스트로우의 타구가 솟구치기가 무섭게 좌익수 방면으로 내달렸다. 그러고는 백스탭을 밟던 감백호보다 한발 앞서 타구를 처리해 냈다.

-이 타구가 이번에도 박유성 선수의 글러브 속에 빨려 들어갑니다.

-감백호 선수가 처리하기에는 다소 까다로운 타구였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빠르게 스타트를 끊어서 잡아냈습니다.

-확실히 박유성 선수가 중견수로 들어가면서 외야 수비가 견고해진 느낌인데요.

-느낌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공격력이 조금 약해지더라도 박유성 선수를 중견수로 선발 출전시켰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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