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19화
17. 우리 유성이~(6)
-무사 1루 상황에서 4번 타자 코리 베츠 선수의 타석입니다. 첫 타석은 2루수 앞 땅볼.
-잘 맞은 타구였는데 송현민 선수의 호수비에 걸렸었죠. 만약 그 타구가 빠졌다면 0 대 0의 균형이 일찌감치 깨졌을 겁니다.
-이선철 해설위원께서 앞서 출루한 마크 스테리 선수와 함께 미국 대표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타자로 코리 베츠 선수를 꼽아주셨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크 스테리 선수가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타자라면 코리 베츠 선수는 현재 내셔널리그 최고의 타자니까요.
-이선철 해설위원이 말씀하신 것처럼 코리 베츠 선수는 지난해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한 바 있는데요. 마크 스테리 선수와는 타격 스타일이 정반대로 알려졌습니다.
-마크 스테리 선수가 좋은 공만 골라 치는 타자라면 코리 베츠 선수는 일종의 베드볼 히터입니다. 그렇다고 레드삭스의 로비 마르티네즈 선수처럼 극단적으로 휘두르는 건 아니지만요.
-코리 베츠 선수가 마크 스테리 선수보다 공격적인 타자라는 말씀이신데요. 이 위기를 송찬우 선수가 어떻게 극복할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중계석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포수석에 앉은 박경호가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몸쪽 빠른 공이라.’
송찬우는 잠시 망설였다.
박경호가 어련히 알아서 잘 판단하고 낸 사인이겠지만 내셔널리그 MVP 타자인 코리 베츠에게 몸쪽 공을 던진다고 생각하니까 부담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박경호도 어쩔 수가 없었다.
몸쪽 공이건 바깥쪽 공이건 가리지 않고 무작정 잡아당기는 유형의 타자라면 코스를 넓게 쓰겠지만.
코리 베츠는 바깥쪽 공을 가볍게 밀어 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지난해 커리어 하이 시즌을 쓴 것도 약점으로 지적받았던 바깥쪽 공을 공략해 낸 결과였다.
‘타구가 또다시 좌익수 쪽으로 간다면…… 수비가 붕괴될지도 몰라.’
미국 대표팀은 아직까지 민병규의 수비 능력을 100퍼센트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랜더스에 입단한 이후로 지금껏 1루수로만 뛰어왔고 지난 연습 경기의 데이터만으로는 분석에 한계가 있을 테니 어느 정도일지 헷갈릴 터.
배성고등학교 시절 자료까지 참고했다면 민병규의 수비 실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박경호는 지금껏 좌익수 쪽으로 타구가 날아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계산해 가며 볼배합을 했고.
그 덕분에 좌익수 쪽 타구는 두 개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나는 높게 솟구쳐서 민병규가 어렵지 않게 잡아냈지만.
방금 전 타구는 스타트를 늦게 끊은 바람에 잡을 수 있는 타구를 안타로 만들어주고 말았다.
‘이제 4회야. 유성이가 나오기엔 이르다고.’
경기 전 박경호는 양의진 배터리 코치로부터 박유성의 출전 가능 조건을 전달받았다.
6회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이 한 점 이상 앞서고 있을 때 대주자나 대수비 카드로 쓸 수 있다는데 지금은 그 어떤 조건도 충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은 버텨야 해.’
박경호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코리 베츠의 무릎 옆으로 미트를 들어 올렸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던 송찬우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고.
1루 쪽을 잠시 응시한 뒤에 빠르게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다.
후앗!
이름 모를 아시아 투수가 던진 공이 겁도 없이 몸 쪽으로 날아들자 코리 베츠가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날카로운 타격 소리가 다저스 파크에 울려 퍼졌지만.
다행히 타구는 우익수 쪽 관중석으로 휘어져 나갔다.
‘좋았어.’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내는 데 성공한 박경호는 또다시 몸 쪽 빠른 공을 주문했다.
이번에는 초구보다 공 두 개 정도 깊숙이.
공을 던지면서도 송찬우는 이게 과연 먹힐까 싶었는데.
따악!
코리 베츠가 친절하게도 다시 한번 공을 건드려 줬다.
-이번에도 파울! 볼 카운트가 투 스트라이크로 바뀝니다.
-박경호 선수. 역시 노련합니다. 초구 때 코리 베츠 선수의 타이밍이 늦었거든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몸쪽 공을 요구했습니다.
-초구에 비해 공 하나 반 정도 빠지는 코스였는데요.
-코리 베츠 선수 입장에서는 비슷한 코스라 느껴졌을 겁니다. 구종이 달라진 것도 아니니까요.
-코리 베츠 선수가 멋쩍게 웃고 있는데요. 내심 당황한 것처럼 보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머릿속이 복잡할 겁니다. 노리던 코스의 공을 연달아 놓쳤거든요.
-반면 대한민국 배터리는 공 2개만으로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는데요. 이번에 어떤 승부를 펼칠지 기대가 됩니다.
잠시 타석에서 물러났던 코리 베츠가 홈플레이트에서 조금 떨어져 자리를 잡자 박경호는 곧장 손가락을 움직였다.
구종은 일단 송찬우의 결정구인 스플리터.
그걸 몸쪽에 붙일까 했지만 코리 베츠가 몸쪽을 신경 쓰고 있는 만큼 바깥쪽으로 떨어뜨려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인을 확인한 송찬우의 눈빛도 달라졌다.
닥터 K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오늘 아직까지 단 하나의 삼진도 잡아내지 못했는데 여기서 4번 타자를 헛스윙으로 돌려세울 수만 있다면?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르던 송찬우가 있는 힘껏 투구판을 박찼고.
후앗!
송찬우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원 스트라이크였다면 무리하지 않고 지켜볼 코스였지만.
“젠장할!”
이미 투 스트라이크에 몰린 코리 베츠는 엉덩이가 빠진 상태에서 방망이를 쭉 내밀었다.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진 코리 베츠를 보며 박경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게 맞겠냐?’
빠른 공이라면 모를까 제법 낙차가 큰 송찬우의 스플리터가 저런 어설픈 스윙에 걸릴 리 없다고 확신하며 미트를 내밀었는데.
따악!
“……!”
방망이 끝에 공이 걸려 버렸다.
“젠장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박경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방망이에 공이 맞은 것도 억지 수준인데 하필이면 좌익수와 중견수 사이로 타구가 날아갔다.
“빠지면 안 되는데.”
더그아웃에서 고개를 내밀고 타구를 지켜보던 박유성도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본래라면 좌익수가 빠르게 달려 나와 타구를 건져내야 하는데 민병규의 반응은 늦고 기정후는 이번에도 장타를 의식해 깊숙이 수비 위치를 잡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냥 단타로 처리하고 다음 타자와 승부하는 게 나았지만.
걸음이 느린 1루 주자 마크 스테리가 2루를 돌아 3루까지 내달리는 걸 본 기정후는 마음이 급해졌다.
“병규야! 뒤!”
저만치 보이는 민병규에게 다급히 소리친 뒤 기정후는 드롭성으로 떨어지는 타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렇게 기정후의 글러브 끝에 공이 걸려드나 싶었지만.
“……!”
종이 한 장 차이로 공은 글러브 밑으로 사라졌다.
설상가상 민병규가 기정후의 뒷공간을 커버하지 못하면서 가속이 붙은 타구가 데굴데굴 굴러 나갔다.
-아아, 공이 완전히 빠집니다. 1루 주자 마크 스테리 선수가 3루를 돌아 홈으로. 코리 베츠 선수가 3루까지 내달립니다.
-3루에 가는 건 막아야 합니다.
-민병규 선수가 3루수 김하선 선수를 향해 길게 송구했습니다만 코리 베츠 선수를 막지 못했습니다. 1 대 0. 미국 대표팀이 한 점을 먼저 앞서갑니다.
정타도 아니고 빗맞은 안타 2개에 한 점을 내주자 실시간 채팅창에 난리가 났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인식한 듯 민병규의 얼굴도 창백하게 바뀌었다.
“감독님. 아무래도 병규를 바꿔줘야 할 것 같습니다.”
추신우 수석 코치가 다급히 교체를 요청했다.
평소였다면 민병규가 이번 실수를 만회할 수 있게 기회를 주자고 말했겠지만.
민병규의 얼빠진 표정을 보니까 이대로 뒀다간 큰 트라우마를 겪을 것 같았다.
그러자 이병구 타격 코치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수비는 빼도 상관없지만 공격은 안 됩니다. 지금 한 점 내줬고 무사 3루 상황입니다. 병규 빠지면 추격하기 버겁습니다.”
“그럼 백호하고 바꾸시죠.”
“백호?”
“발목이 좋지는 않지만 병규보다는 나을 겁니다.”
강기태 감독의 시선이 저만치 앉은 감백호에게 향했다.
마치 이런 논의를 하고 있을 거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감백호는 이미 글러브를 옆에 두고 스파이크 끈을 조이고 있었다.
“그럼 봉 코치가 마운드 좀 다녀와.”
“네. 감독님.”
시간을 끌기 위해 봉정근 투수 코치를 마운드에 올린 뒤 강기태 감독은 구심에게 민병규와 감백호의 수비를 바꾸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니까 캄이 좌익수. 민이 지명으로 간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응급처치를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려는데 손시현 수비 코치가 다급히 다가왔다.
“감독님. 아무래도 정후 수비를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정후가 좀 다친 모양입니다.”
강기태 감독의 시선이 뒤늦게 센터 쪽으로 향했다.
기정후가 괜찮다며 손을 들어 보이긴 했지만 발목을 돌리는 게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다이빙 때문에 그래?”
“억지로 잡으려고 몸을 비틀다가 살짝 충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빼야 하는 거 아냐?”
“수비를 못 할 정도는 아닌 거 같으니까 우익수로 옮기시죠.”
“그럼 중견수는?”
“영완이가 중견은 못 보니까…….”
“유성이?”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인 것 같습니다.”
강기태 감독의 시선이 다시 더그아웃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까까지 벤치에 앉아 있었던 박유성이 보이지 않았다.
“유성이 어디 있어?”
“지금 백호하고 캐치볼 중입니다.”
강기태 감독은 고개를 돌려 박유성을 찾아냈다.
감백호를 본 3루 쪽 팬들이 아우성을 치는 와중에도 박유성은 묵묵히 선배가 몸을 푸는 걸 돕고 있었다.
‘저 녀석도 몸이 얼마나 근질거릴까?’
대표팀 사정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스타팅 라인업에서 제외된 박유성의 속내가 어떨까 생각하니까 강기태 감독은 내심 미안해졌다.
그래서 구심에게 가서 추가로 선수 교체를 요청한 뒤에 직접 걸음을 옮겨 박유성에게 다가갔다.
“유성아.”
“네. 감독님.”
“여기서 뭐 해?”
“백호 선배님 수비 나가신다고 해서 공 받아드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더 열심인데?”
“이렇게라도 그라운드에 서니까 좋아서요.”
“짜식이.”
박유성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린 강기태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몸 푼 김에 너도 좀 뛰자.”
“네?”
“경기 나가고 싶잖아? 네가 센터 들어가.”
“그럼 정후 선배님은요?”
“정후가 우익수로 옮길 거야. 팀에서도 주로 우익수로 뛰었으니까 거기가 더 편하겠지. 네가 가서 정후한테 알려줘.”
“넵! 감독님!”
박유성은 손에 쥔 공을 감백호에게 힘껏 던져준 뒤에 센터 쪽으로 내달렸다.
그 모습이 중계 카메라를 통해 잡히자 채팅창이 다시 뜨거워졌다.
└뭐야? 박유성 출격임?
└박유성 중견수 들어가는 거 같은데?
└민병규 대신에 감백호 들어간다며? 설마 기정후를 빼는 거임?
└미쳤음? 민병규도 못 빼서 감백호로 돌리는데 기정후를 어떻게 뺌?
└그럼 뭐야? 박유성은 전령이야?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야?
└중계진 뭐 하냐! 일을 해라!
그때 현장 상황을 전달받은 장호영 캐스터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많은 분들이 박유성 선수의 출전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거 같은데요. 맞습니다. 기정후 선수가 우익수로 자리를 옮기고 백영완 선수를 대신해 박유성 선수가 투입됐습니다.
-아까 다이빙을 하고 난 다음에 다리를 저는 듯한 모습이 잠깐 카메라에 잡혔었는데요. 아마 그것 때문에 박유성 선수를 투입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기정후에게 선수 교체 내용을 전달한 뒤 박유성은 백영완에게 직접 뛰어갔다.
“나 빠지냐?”
“네. 선배님.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기정후의 몸 상태를 보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던 백영완이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박유성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유성아. 형 이번에 메달 못 따면 군대 끌려가는 거 알지?”
“네.”
“그러니까 오늘 경기 꼭 잡아줘라. 알았지?”
“네. 선배님.”
“짜식. 대답 잘해서 좋네.”
박유성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백영완은 시원섭섭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내려갔다.
“잘했어요. 형.”
“고생했어요.”
딱히 한 것도 없건만 더그아웃에 앉아 있던 선수들이 저마다 독려를 해주었다.
그렇게 울컥한 마음으로 구석 자리에 앉았는데 민병규가 눈치도 없이 옆으로 들러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