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18화
17. 우리 유성이~(5)
애스트로스의 에이스, 게릿 벌렌더가 메이저리그에 처음 모습을 선보인 건 2024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을 받고 3년째 되던 해였다.
당시 애스트로스는 게릿 벌렌더를 불펜 자원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96mile/h(≒154.5㎞/h)의 빠른 공을 던지지만 체력이 좋지 않아 긴 이닝을 던지기는 어려운 롱 릴리프.
체인지업과 커브, 슬라이더를 던질 줄 알지만 세컨드 피치라 부를 만큼 완성도가 높지 않아서 선발보다는 허리에서 힘을 실어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게릿 벌렌더도 욕심부리지 않고 불펜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경기 결과가 한쪽으로 확 기울어진 뒤에야 마운드에 설 수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시즌 후반에 4선발이었던 라이언 스타크맨이 팔꿈치 인대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하자 애스트로스 구단은 대체 선발을 콜 업 하는 대신 게릿 벌렌더에게 선발 기회를 주었다.
이미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된 상태라 부담 없이 내보낸 건데 게릿 벌렌더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7이닝 2실점 호투를 펼치면서 구단과 팬들의 눈도장을 제대로 받아낸 것이다.
게릿 벌렌더의 첫 선발승 제물이 된 건 레인저스.
당시나 지금이나 타력 하나만큼은 화끈한 팀이었지만 생각보다 묵직한 게릿 벌렌더의 포심 패스트 볼을 제대로 공략해 내지 못했다.
시즌이 끝나고 오랫동안 팀에 헌신해 온 노장 라이언 스타크맨이 은퇴를 선언하자 애스트로스 팬들은 그의 후계자로 게럿 벌렌더를 지목했고.
게릿 벌렌더도 8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스프링캠프에서 살아 남으면서 5선발로 시즌을 시작하게 됐다.
첫 풀타임 시즌 성적은 11승 6패에 평균자책점 3.00.
메이저리그 전체 5선발들 중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게릿 벌렌더는 만족하지 않았다.
후반기 체력 고갈로 등판 간격이 길어지면서 팀에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부터 게릿 벌렌더는 체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조금씩, 가슴둘레를 늘려 나가더니 올해에는 유니폼이 터질 듯한 근육을 자랑하며 메이저리그 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웨이트는 투수와 타자 모두에게 도움이 됩니다. 단 적정선을 유지할 때 얘기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근육을 키우면 몸을 움직이는 데 부담이 될 겁니다.”
“몸무게가 무거울수록 홈런을 더 많이 때려낸다면 일본의 스모 선수들을 메이저리그에 데려와야 합니다. 하지만 야구는 그렇게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죠.”
“게릿 벌렌더는 몸을 키우는 걸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여기서 더 비대해지면 밸런스가 완전히 깨질 겁니다.”
전문가들도 한목소리로 게릿 벌렌더의 웨이트 중독을 지적했다.
과도한 웨이트 집착으로 야구 선수답지 않은 몸이 되어버렸으니 이대로는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정작 게릿 벌렌더는 올 시즌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는 중이었다.
올림픽 브레이크 전까지 20경기에 선발 등판해 15승 2패에 평균자책점 2.28을 기록 중이고 탈삼진을 168개나 잡아냈다.
아메리칸 리그 다승과 탈삼진 1위에 평균 자책점은 크리스 반스에 이은 근소한 2위.
아직 크리스 반스를 비롯한 경쟁자들과의 격차가 크지 않은 상황이지만 적어도 비대해진 몸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됐다는 걸 성적으로 증명해 냈다.
올해 미국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은 에릭 지터 감독도 1선발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팀에는 좋은 투수들이 많습니다. 하나같이 각 구단의 에이스들이죠. 그래서 올 시즌 성적이 좋은 투수부터 내보내려고 합니다. 그게 최고의 선수들에 대한 예의니까요.”
일부 언론에서 미국 대표팀 내에 2026년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한 레이 머피(어슬레틱스)나 작년에 사이영상을 차지한 레드삭스의 에이스 크리스 반스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에릭 지터 감독의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1선발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게릿 벌렌더는 에릭 지터 감독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을 던졌다.
퍼엉!
빠른 공이 묵직하게 미트에 꽂힐 때마다 구심의 스트라이크 콜이 터져 나왔고.
“후우…….”
대한민국 타자들은 저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타순이 한 바퀴 돌 때까지 게릿 벌렌더의 공을 건드려 본 타자는 단 세 명.
김하선과 기정후, 감백호뿐이었다.
올림픽 직전 맞대결에서 무안타의 사슬을 끊었다며 자신만만해하던 송현민은 삼진 아웃.
그것도 게릿 벌렌더의 빠른 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형. 자신 있다면서요?”
“아직 경기 안 끝났다. 두고 봐. 다음 타석 때 무조건 안타 친다.”
큰소리를 치던 송현민은 4회 초, 1사 1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선두 타자로 나선 백영완이 2루수 땅볼로 물러났지만 주장인 김하선이 게릿 벌렌더의 슬라이더를 밀어 쳐 팀의 첫 안타를 신고해 낸 것이다.
코치들과 잠시 머리를 맞댄 강기태 감독은 작전을 거는 대신 송현민을 믿고 맡기기로 결정했다.
송현민이 침을 튀기며 자랑하던, 게릿 벌렌더를 상대로 때려낸 안타에 희망을 걸었는데 애석하게도 최악의 결과가 나와 버렸다.
-아, 송현민 선수의 타구가 2루수 정면으로 향합니다. 2루수 브룩 로우가 잡아 2루로. 2루에서 다시 1루로. 4-6-3의 더블 플레이가 나왔습니다.
-방금 공은 투심 패스트 볼이었는데요. 송현민 선수가 잘 공략해 내긴 했습니다만 코스가 좋지 않았습니다.
-직전의 김하선 선수도 이 코스로 안타를 때려냈었는데요.
-김하선 선수는 오른손 타자라 2루수 브룩 로우 선수가 2루 베이스 쪽으로 붙어서 수비를 했지만 송현민 선수 타석 때는 거의 외야 잔디 앞까지 물러나서 자리를 잡았거든요. 그 덕분에 강습 타구에 가까운 공을 여유롭게 처리해 냈습니다.
-이제 미국 대표팀의 4회 말 공격으로 이어지는데요. 게릿 벌렌더 선수만큼이나 대한민국의 선발 투수 송찬우 선수도 호투를 펼치고 있습니다.
-매 이닝 안타를 허용하고 있긴 하지만 실점 없이 잘 틀어막고 있는데요. 아직까지 볼넷이 없다는 걸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앞서 송찬우 선수는 볼넷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송찬우 선수뿐만 아니라 투수들은 볼넷을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어렵게 승부를 하다가 아쉽게 볼넷을 내주는 경우가 아니라면 주지 말아야 해요. 프로야구에서도 기껏 아웃 카운트 잡아놓고 볼넷 때문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빈번하지 않습니까.
-이선철 해설위원께서 오늘도 프로야구의 발전을 위해 따끔한 일침을 아끼지 않으셨는데요. 송찬우 선수가 꼭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3회까지 송찬우의 피칭은 기대 이상이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 대표팀 타자들을 상대로 씩씩하게 자신의 공을 던지며 코리안 헐크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하지만 박유성의 눈에는 송찬우가 평소보다 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찬우 형이 6회까지만 버텨준다면 참 좋을 텐데.”
박유성이 불안한 얼굴로 주절거리자 옆에 앉은 나경석이 한마디 했다.
“7회까지는 충분할 거야. 찬우 체력 좋거든.”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 투수들 중에서 이닝 소화 능력이 가장 뛰어난 건 송찬우였다.
불펜이 불안한 소속팀의 사정 때문에 이기든 지든 긴 이닝을 소화하던 게 버릇이 되면서 100구를 던져도 지치지 않는 체력 괴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국내 프로 야구 기준에서의 이야기였다.
지금 송찬우가 상대하고 있는 건 메이저리그에서도 최고의 실력과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들이었다.
4번 타자인 마크 스테리(양키즈)의 올해 연봉이 송현민과 기정후, 감백호를 뺀 대한민국 대표팀 전체 연봉과 맞먹을 정도였다.
그런 미국 대표팀 타자들에게 아직까지 점수를 내주지 않았다는 건 송찬우가 그만큼 공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쏟고 있다는 의미였다.
‘찬우 형. 조금만 더 버텨줘!’
박유성이 주먹을 꼭 움켜쥔 채로 타석을 바라봤다.
미국 대표팀의 선두 타자는 3번 타자 마크 스테리.
양키즈의 간판 타자이자 2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MVP를 차지한 현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였다.
앞선 타석에서도 비록 잡히긴 했지만 중견수 방면으로 큼지막한 타구를 때려내 경기를 지켜보는 대한민국 야구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박경호는 초구부터 바깥쪽으로 빠지는 빠른 공을 요구했다.
타격감이 좋은 마크 스테리를 상대로 정직하게 승부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인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송찬우는 박경호의 미트를 향해 정확하게 공을 꽂아 넣었고.
마크 스테리는 그 공을 가볍게 흘려내며 볼 카운트를 챙겼다.
-마크 스테리 선수. 바깥쪽 공을 지켜만 봅니다.
-155㎞/h의 빠른 공이었는데요. 마크 스테리 선수가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선구가 좋은 타자를 속이기에는 공이 좀 많이 빠지지 않았나 싶은데요.
-마크 스테리 선수의 노림수를 파악하기 위해 일부러 공 하나를 뺀 것 같은데 이번 공이 중요합니다. 지금 제 생각으로 마크 스테리 선수는 몸 쪽 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거든요.
-말씀드리는 순간 송찬우 선수가 2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는 몸 쪽! 마크 스테리 선수가 빠르게 걷어냅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예상대로 마크 스테리는 2구째 몸 쪽을 파고드는 슬라이더에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다행히 방망이 안쪽에 공이 걸리면서 파울이 됐지만.
마운드 위에서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송찬우가 혀를 빼물 만큼 날카로운 스윙이었다.
“이번 공이 중요해. 이번에 무조건 스트라이크를 잡아내야 해.”
나경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크 스테리가 몸쪽 공을 노린다는 걸 알아챘으니 송찬우가 아직 체력이 남아 있을 때 최대한 공격적으로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박경호는 3구째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경호야. 그거 아니야 인마.”
“왜요? 뭔데요?”
“체인지업.”
“몸쪽이요?”
“그랬으면 말도 안 하지.”
무겁게 한숨을 내쉬는 나경석만큼이나 박유성도 불안해졌다.
송찬우가 전성기 시절 류현신만큼 체인지업을 잘 던진다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슬라이더나 커브보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꺼내 든 건 자살 행위 같았다.
송찬우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투구판에서 발을 뺐다.
“찬우야! 괜찮아. 잘하고 있어!”
포수석에서 몸을 일으킨 박경호가 송찬우를 크게 독려했다. 그러고는 체인지업 대신 스플리터 사인을 냈다.
“바깥쪽 스플리터라. 그래. 차라리 이게 낫겠다.”
“전 좀 애매한 느낌인데요.”
“그래도 체인지업보다야 낫지.”
“마크 스테리가 속아줘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나경석은 구종이 바뀐 걸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박유성은 아웃 코스의 유인구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따악!
송찬우가 내던진 새하얀 공이 박경호의 미트 속으로 빨려들어 가기 직전 마크 스테리가 가볍게 방망이를 휘둘렀고.
“레프트!”
3루수 키를 넘긴 타구는 평소보다 깊숙이 수비하고 있던 민병규의 앞에 뚝 떨어졌다.
-마크 스테리 선수가 오늘 경기 첫 안타를 때려냅니다.
-본래 위치였다면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는 타구였는데요. 민병규 선수의 수비 대응이 아쉬웠습니다.
대한민국 벤치에서도 한숨이 흘러나왔다.
“뭐야? 병규는 왜 뒤로 간 거야?”
“장타에 대비해 정후를 뒤로 물렸는데 병규도 따라 움직인 거 같습니다.”
“타구 판단도 느린 녀석이 뭐 하러 움직여? 아무튼 시키지 않는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
마크 스테리의 장타력을 감안해 외야 수비 라인을 뒤로 물렸으니 민병규도 따라 움직인 것이겠지만.
경기 전 손시현 수비 코치는 민병규에게 제 자리를 지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멋대로 움직였다가 주지 않아도 될 안타를 허용했으니 코치들도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점수 준 거 아니니까 진정들 해.”
더그아웃 분위기를 다잡은 강기태 감독은 송찬우를 향해 잘하고 있다며 손뼉을 쳐주었다.
그렇게 하면 송찬우도 훌훌 털고 다음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타자를 본 순간.
“후우…….”
송찬우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