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109화 (109/412)

타자 인생 3회차! 109화

16. 슬기로운 국대생활(7)

“양 코치!”

“네. 감독님.”

“뭐가 문제야? 경호 왜 저래?”

박준수와 민병규가 펼치는 1루수 경쟁만큼은 아니지만.

누가 국가 대표 포수 마스크를 쓸 것인가에 대한 관심도 상당했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아시안 게임 때 먼저 발탁이 됐던 박경호가 주전으로 뛰기로 얘기가 끝난 상황이었지만.

박유성에게 연달아 홈런을 얻어맞는 걸 보니까 박경호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성이 입장에서는 경석이보다 경호가 더 편한 것 같습니다.”

“경호가 더 편하다니?”

“경석이는 같은 코스의 공을 연달아 요구하는 경우가 드문 반면에 경호는 약점이다 싶으면 집요하게 노리는데 유성이가 그걸 알아챈 것 같습니다.”

양의진 배터리 코치가 박경호를 두둔했다.

나경석도 허용하지 않았던 홈런을 연달아 맞았으니 포수의 볼배합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박유성 역시 국가대표 투수들을 연이어 상대하며 타격감을 끌어 올린 상태였다.

그러자 이병구 타격 코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유성이 저 녀석이 잘하는 거라고. 게다가 실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방금 공은 좀 몰리지 않았어?”

“그게 앞에서 찍혀서 그렇지 저렇게 들어가는 게 맞습니다. 바깥쪽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유성이가 잘 친 거라고 봐야 합니다.”

봉정근 투수 코치도 한마디 거들었다.

김재신은 좌타자를 상대로 바깥쪽 슬라이더와 커터를 함께 쓰는데 피칭 터널을 빠져나올 때까지는 두 구종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아서 타자들이 타이밍을 잡는 데 애를 먹었다.

커터라고 생각하고 방망이를 휘두르다 슬라이더가 들어오면 헛스윙이나 파울이 나오고.

슬라이더라고 생각하고 방망이를 휘두르다 커터가 들어오면 땅볼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박경호도 일단 바깥쪽 커터부터 보여줬던 건데 그걸 박유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쳐 버린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김재신과 박경호가 밑그림을 그리기도 전에 박유성이 스케치북을 찢어버린 꼴이었다.

“이제 누구 남았지?”

“원투펀치 남았습니다.”

이번 LA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한 각 구단의 선발 투수는 총 8명.

결승까지 총 5경기를 치르는 올림픽에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선발 투수가 3명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선발 투수 비중이 지나치게 많았지만.

실력 위주의 대표팀을 강조하던 강기태 감독은 선발과 불펜을 가려 뽑지 않겠다며 무한 경쟁을 선언했다.

예선 3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선발 투수는 3명.

예비로 한 명을 추가한다 해도 최대 4자리인 선발 자리에 8명의 투수가 도전장을 내밀었으니 경쟁률은 2 대 1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두 자리를 두고 6명의 투수가 경쟁하는 모양새였다.

작년 프리미어 12를 통해 코리안 헐크라는 별명을 얻은 우완 송찬우와 제2의 김강현이라 불리는 임찬기가 이미 두 자리를 선점해 버렸기 때문이다.

둘 중에 먼저 나선 건 송찬우.

196㎝의 거구가 마운드에 오르자 박유성의 입에서 저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크네.’

송찬우 못지않게 키가 큰 이관우도 상대해 봤지만 뭐랄까.

이관우가 전봇대 같았다면 송찬우는 사나운 곰처럼 느껴졌다.

체격만 놓고 보자면 메이저리그 선수들에게 전혀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다.

“유성아. 인사해야지.”

박유성이 송찬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박경호가 넌지시 한마디 했다.

그러자 박유성이 서둘러 헬멧 챙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1회차 시절과 2회차 시절 모두 파이터즈의 우선 지명을 받았지만 송찬우와는 딱히 친분이 없었다.

내년 시즌을 채우고 송찬우가 곧바로 메이저리그로 가버리기 때문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기대만큼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워낙에 체격 조건이 좋다 보니 부상 없이 10년을 뛰다가 조용히 은퇴를 선언했다.

2회차 시절.

파이터즈에서 우승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던 박유성은 송찬우의 복귀를 간절히 바랐다.

송찬우가 온다고 해서 무조건 우승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해마다 최하위 탱킹을 하며 유망주들을 긁어모은 덕분에 전력이 제법 탄탄해진 때라 송찬우급 에이스가 구심점을 잡아준다면 한 번쯤 일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꼴찌 탈출을 염원하는 파이터즈 팬심을 받아들인 파이터즈 구단도 암암리에 송찬우의 리턴을 준비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

가뜩이나 돈이 없는 구단이 모기업의 특별 승인까지 받아가며 생색을 내봤지만 송찬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찬우 선배 문제라기보다는 구단의 문제겠지. 오죽하면 해외 진출 자격 얻기가 무섭게 곧바로 포스팅을 신청했겠어?’

내년 초에 열리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1라운드를 통과했을 때 송찬우가 활짝 웃는 모습이 기사로 난 적이 있었다.

송찬우는 2라운드 진출이 기뻤다고 말했지만 송찬우의 사정을 잘 아는 야구팬들은 기사 밑에 댓글로 파이터즈 탈출 축하합니다, 라는 댓글을 달아 파이터즈 구단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1회차 시절에는 파이터즈 망하길 바라는 인간들이라며 욕을 했지만.

파이터즈를 겪을 만큼 겪은 지금은 파이터즈 탈출은 지능 순이라는 말에 반박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당해줄 수는 없으니까. 일단 공 좀 지켜보자.’

송찬우에 대한 데이터가 거의 없다시피 한 터라 박유성은 침착하게 공을 골랐다.

퍼엉!

초구는 바깥쪽 꽉 찬 코스에 꽂혔다.

“들어왔다.”

미트를 가볍게 들어 올린 박경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찬우의 주무기는 196㎝의 큰 키에서 내리꽂는 포심 패스트 볼.

완벽하게 몸을 풀지 않은 상태라 최고 구속(156㎞/h)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홈플레이트 끝까지 살아 들어오는 공을 받고 나니까 이번에는 박유성을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송찬우도 한참 후배인 박유성에게 얻어맞을 생각이 없었다.

‘컨택이 좋으니까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해.’

어느 정도 계산이 끝난 듯 2구째 몸쪽 꽉찬 코스를 찔러 박유성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후우…….”

또다시 바깥쪽 공이 들어올 줄 알았던 박유성은 길게 숨을 골랐다.

다행히 공이 좀 높게 들어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투 스트라이크를 먹을 뻔했다.

박유성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리자 박경호가 피식 웃었다.

‘유성아. 본 게임은 지금부터야. 아까 친 홈런에 정신이 팔려 있다간 찬우 공 절대 못 칠걸?’

잠시 고심하던 박경호는 3구째 다시 한번 바깥쪽 공을 요구했다.

그리고 송찬우는 박경호의 미트에 정확하게 공을 찍어 넣으며 현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1-2네요.”

“이번에는 유성이도 좀 힘들어 보이는데?”

“아직 스플리터는 보여주지도 않았잖아요.”

“역시 송찬우. 살아 있네.”

경기를 지켜보던 선수들의 입에서도 감탄이 흘러나왔다.

국가대표팀 뒷문을 담당해야 하는 정규진과 김재신이 연거푸 홈런을 얻어맞았으니 조심스러워질 만도 한데 송찬우의 피칭은 평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민병규는 박유성이 뭔가 또 보여줄 것 같은 기대감을 버리지 못했다.

“야. 박준수.”

“왜?”

“내기하자.”

“내기? 무슨 내기?”

“넌씨눈이냐? 이 상황에서 무슨 내기를 할까?”

“유성이? 그렇다면 난 친다에 건다.”

“뭐?”

“왜? 너도 칠 거 같으니까 내기하자는 거잖아. 아니야?”

민병규만큼이나 박준수도 박유성의 타격을 높이 평가했다.

무려 10명의 투수를 상대하면서 박유성은 단 한 번도 삼진을 당하지 않았다.

플라이볼 2개를 치긴 했지만 홈런도 2개나 때려냈고.

나머지 타구들도 야구장 구석구석으로 보내며 스프레이 히터로서의 모습을 보여줬으니 송찬우의 공도 어떻게든 때려낼 것 같았다.

“이러면 내기가 성립이 안 되잖아.”

“왜 안 돼? 네가 못 친다는 쪽에 걸면 되지.”

“양아치냐?”

“그러는 너는? 나한테 또 뭘 뜯어먹으려고 내기를 들먹여?”

“됐다. 됐어. 무슨 말이 통해야 얘기를 하지.”

“내가 할 소리다.”

민병규와 박준수가 티격태격거리는 사이 사인 교환이 끝났다.

박경호의 주문은 몸 쪽 스플리터.

원하던 사인이 나오자 송찬우가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고.

박유성도 평소보다 길게 루틴을 실행하며 호흡을 골랐다.

‘이번에는 스플리터겠지? 또다시 포심이 들어오면 곤란한데.’

포수가 나경석이었다면 대놓고 스플리터를 노렸겠지만 박경호다 보니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래. 어차피 테스트인데 편하게 가자.’

짧은 고민을 털어낸 박유성이 왼 어깨에 방망이를 걸쳐 들었다. 그 순간.

후앗!

바람 소리와 함께 송찬우의 공이 몸쪽으로 날아들었다.

투구 폼과 릴리즈 포인트가 거의 비슷해서 육안으로는 송찬우의 포심 패스트 볼과 스플리터를 구분하기 어렵다고 알려졌지만.

‘스플리터!’

40년간 수많은 공을 지켜봐 온 박유성의 눈에는 미세한 회전의 변화가 보였다.

박유성은 내디뎠던 오른발에 잔뜩 힘을 주며 버텼다. 그러다 피칭 터널을 빠져나온 스플리터가 히팅 존의 낮은 쪽으로 파고들자 단숨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새하얀 공이 하늘 위에 솟구쳤다.

그리고 그 공을 쫓듯 수많은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너무 높이 떴는데?”

“플라이야. 센터 플라이.”

몇몇 선수들은 성급하게 결과를 예상했지만 공은 계속해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고.

끝내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미치겠네.”

설마하니 이게 넘어갈까 싶었던 박경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박유성이 몸쪽으로 제대로 떨어진 스플리터를 퍼 올렸을 때 내심 감탄하면서도 센터 깊숙한 플라이가 될 거라 예상했는데 그 타구가 저렇게 멀리 뻗어 나갈 줄은 미처 몰랐다.

삼진을 확신하며 공을 던졌던 송찬우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짜 구단에 전화를 넣어야 하나?’

박유성에 대한 정보를 달라던 김경민 단장의 부탁을 떠올렸던 송찬우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렇게 재능 넘치는 후배와 한솥밥을 먹는다면 참 좋겠지만 조만간 메이저리그로 떠날 처지에 박유성을 파이터즈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마운드에 오른 대표팀의 좌완 에이스, 임찬기가 우익수 플라이를 유도해 낸 걸 끝으로 박유성의 신고식은 끝이 났다.

“결과가 어떻게 되지?”

“12타수 9안타입니다.”

“7할 5푼?”

“야구 월드컵에서 10할을 쳤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거품인가 봅니다.”

이병구 타격 코치의 농담에 다른 코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비록 100퍼센트 전력으로 맞붙은 라이브 배팅은 아니라지만 프로 야구를 주름잡는 대표팀 선배들을 상대로 3개의 홈런과 9개의 안타를 때려냈으니 타격 실력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추 코치 생각은 어때?”

“타격은 좋아 보입니다. 다만 수비를 아직 못 봐서요.”

“무슨 소리야? 나하고 같이 경기 봤잖아?”

“그래도 직접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추신우 수석 코치의 요청에 따라 박유성은 잠깐 목만 축인 뒤에 그라운드로 나갔다.

그리고 추신우 수석 코치가 직접 때려내는 펑고를 소화했다.

타격에서 기대 이상의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수비에서 평균만 해준다면 강기태 감독에게 주전 기용을 강력하게 건의해 보려고 했건만.

따악!

타구 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동물적으로 반응하는 박유성을 보니 그저 감탄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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