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108화 (108/412)

타자 인생 3회차! 108화

16. 슬기로운 국대생활(6)

박유성의 두 번째 아웃 카운트는 베어스의 박정우가 잡아냈다.

150㎞/h를 넘나드는 빠른 공에 커브와 파워 커브, 체인지업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박정우는 박유성과의 정면 승부를 철저하게 피했다.

컨트롤 변태라는 별명답게 스트라이크 존을 최대한 넓게 쓰면서 박유성의 노림수를 막았고.

끝내 바깥쪽 체인지업으로 좌익수 뜬공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레프트 플라이!”

이용구 주루 코치가 아웃을 선언하자 박정우가 후련한 얼굴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러자 동갑내기인 나영민과 임태규가 좌우에 붙어 놀려댔다.

“야. 좌정우. 뭘 그렇게 열심히 던지냐?”

“후배 하나 잡겠다고 전력을 다하네. 이 땀 좀 봐. 혼자 올림픽 결승전 뛴 듯?”

“그래도 난 안타는 안 맞았다.”

“대신 공을 8개나 던졌지.”

“축하한다. 첫 풀카운트 승부.”

“안타를 맞는 것 보단 낫지 않을까?”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그럴 거면 그냥 안타를 맞아라.”

“그건 볼질하다 볼넷 내줄 때 얘기고. 난 뜬공 유도했거든?”

“와, 뜬공 유도래. 뻔뻔한 것 좀 봐.”

“너 아까 유성이가 6구 안 건드려줬으면 그냥 볼넷이었어. 양심 없냐?”

“크흠, 어쨌든 난 안타는 안 맞았다.”

“자랑이다 인마.”

결과만 놓고 봤을 때 대결의 승자는 박정우였지만.

박유성과의 8구 승부를 지켜본 사람은 전부 박유성이 이겼다고 여겼다.

박유성을 낚아보겠다고 박정우가 아슬아슬한 코스로 연달아 공을 찔러 넣었지만 전부 볼이 되면서 볼카운트가 3-1까지 몰렸기 때문이다.

이후 박유성이 공 3개를 연달아 건드려 주지 않았다면 박정우는 박유성에게 첫 볼넷을 내줬을 것이다.

“그런데 저 녀석 별명이 왜 좌정우야?”

“감독님 모르세요?”

“개명했나? 그런데 우리나라에 좌 씨가 있어?”

“그게 아니라 박정우 투구 스타일입니다. 왼쪽에 하나. 가운데 낮게 하나. 다시 오른쪽에 하나.”

“아, 그래서 좌정우야? 왜 그렇게 던지는 거야?”

“본인만의 루틴 같은 거였다는데 요즘은 그 정도까진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봉정근 투수 코치의 설명을 들은 강기태 감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소 신중하게 공을 던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볼배합에 집착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박정우가 과도한 컨트롤 집착으로 볼넷을 내줄 뻔했다면 다음에 등판한 장성찬은 아예 대놓고 볼넷을 줘버렸다.

“크아아압!”

박유성에게 절대 맞지 않겠다며 온 힘을 다해 공을 던졌지만, 공 4개가 전부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 버린 것이다.

“뭐야? 내 공은 왜 안 치는데?”

박유성이 박정우 때처럼 볼도 건드려 줄 줄 알았던 장성찬이 당황한 얼굴로 따졌다.

하지만 장성찬의 약점이 제구인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유성이 볼을 건드려 줄 리 없었다.

“후우……. 성찬아. 비슷하게라도 던져줘야 치지.”

강기태 감독이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장성찬이 다급히 외쳤다.

“잠깐 타임! 감독님! 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몸이 안 풀려서 그래요. 정말이에요!”

구위로 박유성을 찍어 누르려 했던 장성찬은 진심으로 억울해했지만 한 타석 승부라는 룰은 바뀌지 않았다.

장성찬이 한참 동안 떼를 쓰다 나영민과 임태규에게 끌려 내려가는 사이 포수가 바뀌었다.

백업 포수 역할로 합류한 나경석이 내려가고 주전 포수 박경호가 미트를 잡아 든 것이다.

“유성아.”

“네?”

“경호 쟤는 좀 과하게 꼬아서 리드하거든?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라. 알았지?”

“아, 넵. 감사합니다. 선배님.”

라이벌인 박경호에게 지고 싶지 않았던지 나경석이 넌지시 조언해 주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박경호의 리드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다.

‘무려 40년을 당했으니까.’

랜더스 구단이 열어준 은퇴식에서 박경호는 자신과 관련된 수많은 별명 중 국대 포수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밝혔지만.

현장에서 통용되는 박경호의 별명은 따로 있었다.

그라운드의 여우.

타자들의 허를 찌르는 볼배합은 기본이고 기습적인 견제와 주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트릭 플레이까지 얄밉게 야구를 잘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박유성도 박경호에게 여러 번 당했는데 블로킹하다 튄 공을 찾지 못하는 박경호의 연기에 속아 뛰다가 죽은 것만 세 번이었다.

‘그것도 죄다 3루에서 잡혔지.’

5년 연속 나눔 리그 도루왕에 16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했을 만큼 뛰는 것 하나는 자신 있었던 1회차 시절의 박유성도 박경호가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함부로 베이스를 박차지 않았다.

그나마 박경호의 짜증스러운 플레이를 상대하는 건 회차를 통틀어 20년 정도였지만 박경호표 볼배합은 40년 내내 이어졌다.

박경호가 은퇴 직후 랜더스의 배터리 코치로 합류한 뒤 수석 코치를 거쳐 감독까지 해 먹었기 때문이다.

‘2회차 마지막 시즌 때도 랜더스만 안 만났으면 타율이 2푼은 더 올랐을 텐데.’

박유성이 얄밉다는 눈으로 박경호를 바라봤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박경호는 포수 장구를 착용한 채로 박유성의 엉덩이를 툭 때리며 독려했다.

“너 잘 친다?”

“감사합니다.”

“나는 경석이하고 다르니까 정신 바짝 차려. 알았지?”

“네. 선배님.”

똑같이 국가대표 생활을 오래 했지만 나경석과 박경호의 리드 방법은 정반대였다.

나경석은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구종을 최대한 활용해 타자들의 노림수 자체를 봉쇄하는 편이라면.

박경호는 타자의 노림수를 이용해 볼카운트 싸움을 끌고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나름의 노하우를 가진 베테랑급 투수들은 박경호보다 나경석과 호흡을 맞추는 걸 선호했고.

마운드 위에서 투구에 집중하기도 벅찬 젊은 투수들은 박경호를 전적으로 의지했다.

아홉 번째로 마운드에 오른 랜더스의 마무리 투수, 정규진은 팀에서 하던 대로 박경호의 미트만 보고 공을 던졌다.

퍼엉!

초구에 바깥쪽 아슬아슬한 코스로 슬라이더를 찍어 넣어 박유성의 반응을 체크한 뒤.

퍼엉!

2구째 비슷한 코스에 포심 패스트 볼을 집어넣어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따악!

3구는 다시 바깥쪽 슬라이더로 박유성의 파울을 이끌어냈고.

퍼억!

4구째 몸쪽 낮은 코스로 체인지업을 던져 분위기를 환기시킨 뒤.

따악!

5구째 다시 바깥쪽 슬라이더를 찔러 넣었다.

“후우…….”

치기 까다로운 정규진의 고속 슬라이더가 연거푸 들어오자 박유성도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이 한창때라 공도 좋았지만.

다른 투수들이 공을 던지는 동안 몸을 거의 다 풀어놓은 탓에 체감 구위 자체가 확 올라갔다.

거기다 박경호는 집요하게 말을 걸었다.

“유성아. 규진이 슬라이더 맛이 어때?”

“날카로운데요?”

“짜식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새파란 후배 녀석이 선배 공을 평가하냐?”

“선배님이 물어보셨잖아요?”

“물어본다고 다 대답해?”

“대답 안 하면 싸가지 없이 대답 안 한다고 하실 거잖아요.”

“억울하면 나보다 일찍 태어나지 그랬냐?”

“그게 제 맘대로 되나요.”

박유성의 말대답이 재미있었던지 박경호가 피식 웃었지만.

3회차를 사는 동안 생년월일은 똑같았으니 설사 4회차가 주어진다고 해도 박경호의 선배가 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일부러 뜸을 들이던 박유성이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그러자 박경호가 곁눈질을 한 번 하고는 정규진에게 다시 한번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코스는 바깥쪽.

앞서 던진 슬라이더보다 공 두 개 정도 빠지게.

정규진은 이번에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박경호의 미트를 향해 힘껏 공을 내던졌다.

후앗!

정규진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또다시 바깥쪽 먼 곳으로 돌아들어 왔지만, 박유성은 허리를 돌리지 않았다.

‘멀어.’

정규진은 앞선 슬라이더와 똑같이 던졌다고 생각하겠지만 박유성의 눈에는 릴리즈 포인트가 어긋난 게 보였다.

한창때라 구위만 믿고 던진 탓에 세심한 컨트롤이 떨어진 것이다.

퍼억!

박유성이 미동도 하지 않자 박경호가 다급히 프레이밍을 시도해 봤지만 스트라이크 존에 끌어놓기에는 공이 너무 빠졌다.

“볼입니다.”

“야 인마. 판정은 포수가 하는 거야.”

“볼이에요.”

“이 정도면 스트라이크라고 봐도 돼.”

“양의진 코치님께 여쭤볼까요?”

“짜식이? 무슨 양 코치님까지 소환을 해?”

“경식 선배님 표정 좀 보실래요?”

박유성의 말에 박경호가 나경식을 바라봤다.

그래도 같은 포수니까 자신의 편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에라이.’

방금 전 자신의 프레이밍을 흉내 내며 다른 선수들과 깔깔거리느라 정신없었다.

“오케이. 볼. 이거 하나 봐준다.”

“네에. 감사합니다.”

“어째 대답이 띠껍다?”

“아닙니다아.”

“말꼬리 길지?”

“아닙니다아아.”

“이 자식 봐라?”

박유성과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박경호의 머릿속은 다음 공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방금 공을 건드려 줬어야 했는데.’

본래 투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펼쳐지는 승부는 타자와 투수 모두에게 부담이었다.

쓰리 볼까지 몰리면 투수는 볼넷에 대한 부담감이 커지니 어떻게든 이 공을 잘 던져야 했고.

이미 투 스트라이크에 몰린 타자는 삼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이 공을 지켜봐야 했다.

정규진이 박정우만큼 제구가 된다면 참 좋겠지만.

세대교체를 통해 들어온 대표팀의 젊은 투수들은 대체로 제구가 완벽하지 않았다.

최고 구속 155㎞/h에 달하는 포심 패스트 볼과 140㎞/h까지 나온다는 고속 슬라이더를 장착한 정규진도 핀 포인트 제구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부러 바깥쪽을 넓게 쓰면서 정규진의 슬라이더에 끌려다니던 막내 녀석을 다시 한번 낚아보려고 했는데 박유성이 속아주지 않았다.

‘이제 뭘 던져야 하나.’

잠시 고심하던 박경호는 다시 한번 바깥쪽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이번에는 볼이 아니라 스트라이크로.

임태규만큼 각이 크지 않아서 자칫 잘못하면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정규진이 자신 없어 하는 체인지업을 던지게 하는 것보다는 슬라이더로 승부를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정규진은 곧바로 투구판을 밟았다.

그러고는 특유의 거친 투구폼으로 공을 내던졌다.

후앗!

정규진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예상보다 공 반 개 정도 바깥쪽으로 들어오자 박경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공이라면 박유성이 건드리지 않더라도 프레이밍을 통해 스트라이크로 둔갑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공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던 박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방망이 중심에 찍히듯 걸린 공은 방향을 바꿔 좌중간 쪽으로 뻗어 나갔고.

“어어어!”

“와, X발. 저걸 넘겨?”

“진짜 대박이다!”

그대로 왼쪽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뭐냐 너?”

멍하니 타구를 지켜보던 박경호가 박유성을 바라봤다.

스트라이크 존에 몰린 공도 아니고 코스를 알려준 것도 아닌데 박유성은 너무나 완벽하게 정규진의 슬라이더를 공략해 냈다.

홈런을 얻어맞은 정규진도 박유성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와, 저 자식. 하필 나한테 홈런을 치네.”

대표팀의 마무리 투수인 정규진이 무너지자 강기태 감독은 자이언츠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김재신을 긴급 등판시켰지만.

따악!

박유성은 김재신의 커터까지 담장 밖으로 날려 버리며 강기태 감독을 고민스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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