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07화
16. 슬기로운 국대생활(5)
“와, 저 녀석 뭐냐?”
“그러게요. 저걸 아무렇지도 않게 치네.”
“경석이가 사인 알려준 거 아냐?”
“알려줬어도 저건 치기 어렵죠. 좌타자 눈에는 완전 볼일 텐데.”
1루 쪽 베이스라인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고참급 선수들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지금의 임태규를 있게 만든 백도어 슬라이더를 욕심부리지 않고 툭 때려내는 건 베테랑 타자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가대표 주전 포수 박경호는 아예 나경석에게 다가가 물었다.
“몰렸어?”
“아니. 잘 들어왔어.”
“유성이가 잘 쳤다는 거지?”
“진짜 저놈 뭐지? 전략분석 자료라도 봤나?”
나경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박경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본다고 쳐지는 거야?”
“암튼 난 제대로 리드했어. 초구가 몸쪽 하이 패스트 볼이었으니까 바깥쪽 슬라이더로 카운터 잡는 게 기본이잖아?”
“볼 배합에 정답이 어디 있냐?”
“그럼 너는? 너라면 2구에 뭘 요구할 건데?”
나경석의 날 선 추궁에 박경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랜더스에서 전략적으로 키워준 덕분에 일찍 태극 마크를 달긴 했지만 그렇다고 동갑내기인 나경석보다 포수로서 경험이 크게 앞서는 건 아니었다.
“체인지업은 좀 그런가?”
“몸쪽으로?”
“아니. 바깥쪽.”
“난 그거 3구로 생각했어.”
“2구에 바깥쪽 체인지업으로 헛스윙을 유도하고 3구째 몸 쪽에 슬라이더를 찔러 넣었다면 어땠을까?”
“그건 너무 어렵게 가는 거 아니냐?”
“지금 상황에서는 어렵게 가야 하는 거 아니냐?”
“하긴. 저 녀석, 다 치고 있지?”
나경석과 박경호의 시선이 타석 밖으로 물러난 박유성에게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유성은 다음 대결을 준비하듯 허공에 방망이를 휘두르며 풀어지려는 긴장감을 단단히 조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강기태 감독이 봉정근 투수 코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봉 코치.”
“네. 감독님.”
“어떻게 봤어?”
“방금 안타요? 어우, 잘 치는데요?”
“그게 다야?”
“네. 잘 쳤습니다. 저 정도면 뭐 프로 레벨이라고 봐도 될 거 같습니다.”
봉정근 투수 코치가 이용구 주루 코치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용구 주루 코치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규는 좌타자 상대할 때 홈플레이트 왼쪽 끝을 밟고 던지니까 방금 공은 좌타자 눈에 볼로 보일 겁니다.”
“게다가 쓰리 쿼터니까 더 멀리 보이고요.”
“좌타자가 저 공을 치려면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올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타자가 거의 없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여기 이 코치 정도라면 모를까 어지간한 선수들은 흉내도 못 낼걸요?”
“하긴. 이 코치가 원래 커트 신공으로 유명했지.”
봉정근 투수 코치에 이어 이병구 타격 코치까지 이용구 주루 코치를 추켜세웠다.
비록 대표팀의 주루 및 작전 코치로 합류했지만 이용구는 프로 통산 타율이 3할에 다다를 만큼 정교함의 대명사로 꼽혔다.
특히나 용구 놀이라 불리는 커트 플레이는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용구 주루 코치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말 그대로 걷어내는 수준이었습니다. 한창 컨디션 좋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솔직히 방금 공은 라인 안으로 끌어올 자신이 없습니다.”
“이야, 이 코치도 못 치는 공을 유성이가 친 거야? 이거 우리 막내 장난 아닌데요?”
이병구 타격 코치가 장난스럽게 웃자 강기태 감독이 추신우 수석 코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추 코치는 어때?”
“방금 공이요? 제 스타일대로라면 아마 레프트 플라이가 됐을 것 같습니다.”
“하긴. 추 코치는 손목 힘이 좋으니까 공이 좀 더 뻗었겠지.”
강기태 감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추신우 수석 코치도 현역 시절 스프레이 히터 소리를 들었지만 방금 박유성이 보여준 것처럼 정교하게 라인 위에 떨어뜨리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유성이 저 녀석은 어느 쪽이야? 영민이 상대할 때는 현민이 같더니 태규 공은 영완이처럼 치네.’
대표팀에 뽑힌 타자들 가운데 이용구 주루 코치와 가장 비슷한 타격을 하는 건 자이언츠 소속 백영완이었다.
날쌘돌이라는 별명도 현역 시절 날쌘돌이라 불리던 이용구 주루 코치를 닮아서 붙은 애칭이었다.
경험이 많은 베테랑 타자들은 상황에 따라 타격 스타일에 변화를 주곤 한다지만.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선수가 프로 야구 좌타자들을 애먹이던 나영민의 뱀직구에 이어 임태규의 백도어 슬라이더까지 때려냈다?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때 이병구 타격 코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감독님. 이제 다음 투수 준비하시죠?”
“다음 투수? 이만하면 되지 않았어?”
“유성이 실력이야 잘 봤죠. 그런데 여기서 끝내면 영민이하고 태규는 뭐가 되겠습니까.”
강기태 감독이 맞은편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3루 쪽 더그아웃 앞쪽으로 투수들이 마치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듯 공을 움켜쥔 채 서 있었다.
완벽한 세대교체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마운드의 최고참은 조영준.
만 스물여덟으로 일본에서도 인정하는 포크 볼을 던지는 투수였다.
그다음으로 라이온즈의 원투 펀치 김일웅과 신우현, 베어스의 마당쇠 홍필용이 스물일곱이었고.
베어스의 차기 에이스라 불리는 박정우를 비롯해 이글스의 희망 장성찬과 이번에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단 나영민, 임태규가 스물여섯이었다.
대표팀의 뒷문을 책임질 김재신(자이언츠)과 정규진(랜더스)이 스물다섯.
그리고 대표팀의 에이스 라인, 송찬우(파이터즈)와 임찬기(타이거즈)가 스물셋 막내 라인이었다.
최고참 조영준과 막내 임찬기가 고작 다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다 보니 투수 파트는 거의 다 친구처럼 지냈다.
조영준과 김일웅, 홍필용이 고참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기존의 대표팀처럼 위계질서를 엄격하게 따지지 않았다.
대신 서로 경쟁심이 상당했는데 강기태 감독이 나영민 다음에 임태규를 호명했던 것도 임태규가 보란 듯이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유성의 테스트를 이대로 끝내 버린다면?
나영민과 임태규는 한동안 어깨를 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음에 누가 막내 좀 혼내볼래?”
강기태 감독이 입을 열자 선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그럼 나이순으로 가자.”
강기태 감독은 다음 공을 조영준에게 넘겼다.
나영민처럼 공을 쥔 채로 마운드에서 버티던 임태규를 끌어내려면 최고참인 조영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내려가 인마.”
“형. 조심해요. 저 녀석 장난 아니에요.”
“네 복수는 내가 해줄 테니까 잔말 말고 내려가. 여기서 더 버티면 추해진다?”
임태규를 내려보낸 뒤 조영준은 보란 듯이 연습구를 던졌다.
초구에 포심.
2구도 포심.
3구 역시 포심.
4구까지 포심.
마치 빠른 공을 던질 것처럼 계속 포심을 던져댔지만 나눔 리그에서 주로 뛰었던 박유성은 조영준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어차피 포크 볼 던질 거잖아요.’
조영준의 별명은 조크준.
시답잖은 농담을 잘하는 데다가 포크 볼을 잘 던져서 붙은 별명이었다.
조영준은 조크준이라는 별명을 정말 좋아했다.
‘포크 볼과 관련된 별명을 가진 투수는 국내에 나밖에 없잖아. 잘못 들으면 조커 같기도 하고.’
그만큼 포크 볼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는데 포크 볼이 잘 들어간다 싶은 날에는 투구의 대부분을 포크 볼로 던질 정도였다.
그래서 박유성도 포크 볼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공을 골랐다.
퍼엉!
초구에 바깥쪽 낮게 깔려 들어온 포심 패스트 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퍼엉!
2구째 몸 쪽 꽉 차게 들어온 포심 패스트 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넘겼다.
따악!
3구째 아웃 코스를 파고드는 슬라이더는 일부러 건드려 파울을 만들었다.
‘승부가 길면 재미없으니까.’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로 봐서 대표팀의 모든 투수와 한 타석씩은 대결을 펼쳐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집중력이 떨어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승부를 봐야 했다.
“후우…….”
볼카운트가 원 볼 투 스트라이크로 유리해지자 조영준이 길게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검지와 중지를 벌려 실밥 가장자리 밖으로 밀어냈다.
‘유성아. 미안하다.’
아직 프로에 데뷔조차 하지 못한 대표팀 막내에게 전력을 다하는 게 살짝 부끄러웠지만.
일본 출신 인스트럭터를 통해 손가락을 찢어가며 배운 이 전통 포크 볼이라면 박유성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경석도 눈치껏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포크 볼 사인을 냈다.
‘좋아.’
단단히 고개를 끄덕인 조영준이 투구판을 밟았다. 그러고는 나경석의 미트를 향해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후앗!
조영준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거의 한복판으로 날아들었다.
만약 조영준에 대한 데이터가 없었다면 실투라고 생각하고 덤벼들었겠지만.
조영준의 포크볼에 삼진만 수십 번 당해본 박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바깥쪽을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던 공은.
따악!
방망이 중심에 정확히 찍혀 통타당하는 신세가 됐다.
“센터 플라이!”
공이 솟구치자 이용구 주루 코치가 크게 소리쳤다.
중견수 자리에 자신이 서 있었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였다.
하지만 그 타구를 지켜보는 조영준은 중견수 플라이라는 이용구 주루 코치의 선언에 웃을 수가 없었다.
‘이걸 쳐?’
방금 공은 헛스윙을 노리고 던진 공이었다.
일부러 한복판에 던진 것도 타자가 덤벼들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초구와 2구를 지켜봤던 박유성이 시동을 걸었을 때 조영준은 박유성의 방망이가 시원하게 허공을 가를 거라 굳게 믿었다.
그런데 새까만 방망이는 허공이 아니라 정확하게 풀려 나가는 공을 가격했고.
타구는 센터 깊숙한 위치까지 날아갔다.
만약 박유성과 한 타석 더 승부를 한다면 방금 공을 또 던질 수 있을까?
‘못 던져.’
아웃 카운트는 잡아냈지만 조영준은 씁쓸히 마운드를 내려왔다.
생전 처음 상대하는 자신의 포크 볼에 이렇게 반응하는데 나중에 프로에서 적으로 만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부담스러워졌다.
조영준에 이어 마운드에 오른 홍필용도 주무기인 체인지업을 얻어맞았다.
조영준과는 달리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볼카운트가 불리한 상황에서 회심의 승부구를 꺼내 들었지만.
따악!
체인지업이라면 지긋지긋하게 쳐낸 박유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라이온즈의 원투 펀치도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최고 구속 155㎞/h까지 나오는 포심 패스트 볼이 장기인 김일웅은 초구에 몸 쪽 빠른 공을 붙였다가 좌중간을 가르는 장타를 허용했고.
각은 작지만 빠르게 꺾여 나가는 신우현의 명품 고속 슬라이더도 박유성의 방망이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렇게 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12명의 투수들 중에 절반이 얻어맞자 선수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쟤 진짜 뭐냐? 정말 고 3 맞아?”
“잘 치는 줄은 알았지만…… 저건 너무 잘 치는데?”
“영완이 형. 이러다 선발 출전 밀리는 거 아니에요?”
“말 시키지 마 인마. 그렇지 않아도 심각하니까.”
“유성이 녀석 표정 봐요. 무슨 도장 깨기 하는 것도 아니고 선배들 두들겨 패놓고 얼굴색 하나 안 변하네.”
“저 정도 깡은 되니까 대표팀에 뽑힌 거지.”
“진짜 저 녀석. 물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