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06화
16. 슬기로운 국대생활(4)
2
민병규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자 테스트가 잠시 중단됐다.
“야! 괜찮아?”
1루 베이스 코치마냥 베이스 라인에 서 있었던 박준수가 가장 먼저 다가와 민병규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자 민병규가 부들부들 떨며 글러브 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잡았냐?”
“잡았겠냐?”
“하아. X발.”
“일부러 놓치지 않은 거 아니까 그만 일어나 인마. 지금 이러는 게 더 쪽팔려.”
“야! 나 죽을 뻔했어.”
민병규가 떼를 쓰는 동안 타석에 서 있던 박유성이 다가왔다.
“형. 괜찮아요?”
“안 괜찮아. 인마. 너 방금 나 죽일 뻔했어.”
“엄살은. 그거 맞는다고 안 죽거든?”
“맞아요. 형. 형이 반사신경이 얼마나 좋은데요? 방금 타구 잡히는 줄 알았어요.”
“그렇지? 나나 되니까 손이 움직인 거지?”
박유성의 격려를 받고 나서야 민병규는 등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대단한 파인 플레이라도 펼친 것처럼 박준수와 박유성의 부축을 받고 일어났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강기태 감독이 추신우 수석 코치를 보며 물었다.
“쟤들 뭐해?”
“죄송합니다. 나중에 따끔하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암튼 대표팀이 놀이터인 줄 아는 녀석들이 있다니까.”
강기태 감독이 혀를 찼다.
형님 리더십으로 유명한 그였지만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요령 피우는 선수는 딱 질색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손시현 수비 코치가 슬그머니 한마디 보탰다.
“감독님. 아무래도 1루 수비는 준수가 나을 것 같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정면으로 오는 타구를 놓치면 어쩌라는 거야?”
힘이 좋은 좌타자들이 늘어나면서 1루도 핫코너라 불리는 3루만큼 강습 타구가 많아졌다.
예전에야 포구만 잘해도 절반은 갔지만.
요즘에는 강습 타구와 베이스라인을 타고 빠져나가는 타구를 잘 처리해야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방금 전 민병규의 수비는 낙제에 가까웠다.
“병규가 한눈을 팔았나 봅니다.”
자신의 은퇴를 우승으로 장식해 줬던 민병규를 친동생처럼 여기는 추신우 수석 코치도 이번만큼은 두둔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병구 타격 코치의 생각은 달랐다.
“에이, 감독님. 방금은 유성이가 잘 친 거라고 봐야죠.”
사이드암인 나영민이 던지는 포심 패스트 볼은 흔히 말하는 뱀직구였다.
상하 무브먼트보다 좌우 무브먼트가 더 강해서 방금처럼 몸 쪽으로 들어가는 공은 방망이 중심에 맞히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투구 코스를 보고 타구를 판단하는 프로 레벨의 선수들 입장에서 1루 쪽 강습 타구를 예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
“유성이가 초구에 대응 못 했으니까 파울이 날 거라고 봤을 겁니다.”
“그렇다고 야수가 정면으로 오는 타구를 놓쳐? 올림픽 결승전 때 저래 봐. 쟤 이민 가야 해.”
“유성이 실력을 봤으니까 이제 정신 차릴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역정 내지 마세요. 혈압에 안 좋습니다.”
74년생인 이병구 타격 코치는 강기태 감독과 5살 차이였다.
80년대생인 다른 코치들에게 강기태 감독은 까마득한 선배였지만 이병구 타격 코치에게는 편하게 술잔을 나눌 수 있는 형이나 다름없었다.
이병구 타격 코치가 살살 달래자 강기태 감독도 표정을 풀었다.
“아무튼 연습 경기 때는 준수로 가. 병규는 지명으로 돌리고.”
2026년 나고야 아시안게임 우승 이후 국가대표팀의 세대교체는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때처럼 젊고 재능 있는 투수들로 마운드를 가득 채웠고.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과 실력 위주로 뽑은 타자들의 조합도 역대 국가대표팀 못지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끊이지 않은 논쟁이 하나 있으니.
국대 1루수가 누구야?
187㎝에 100㎏의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박준수는 상남고등학교 시절 리틀 박병오라 불렸다.
비록 치는 손은 정반대였지만.
듬직한 체격에 몸쪽 공 바깥쪽 공 가리지 않고 담장을 넘겨 버리는 힘은 고교 선배인 박병오를 빼닮았다.
반면 민병규는 박준수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키는 188㎝로 오히려 민병규가 1㎝ 더 컸지만 그 사실을 아는 야구팬은 거의 없었다.
몸무게가 90㎏밖에 되지 않아서 민병규가 상대적으로 작을 거라는 인식이 강했다.
배성고등학교 시절 민병규의 별명은 리틀 이승협.
힘보다는 기술적으로 공을 퍼 올리는 게 라이언 킹, 이승협과 유사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박준수와 민병규가 프로에 넘어왔을 때.
전문가들은 둘 중 박준수의 성공 가능성을 더 높이 평가했다.
장타 생산을 위해 잡아당기는 타격 스타일을 고수하는 민병규보다는 공을 받쳐놓고 때릴 줄 아는 박준수가 프로에 적응하기 수월할 거라 내다봤다.
게다가 팀 사정도 박준수 쪽이 좋았다.
창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스타즈는 박준수를 아예 5번에 1번 타자로 못 박았지만 랜더스에는 민병규를 위해 준비된 자리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랜더스 박전권 감독이 외야 겸업을 제안했을 정도.
하지만 민병규는 1루수로 뛰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고 랜더스도 어쩔 수 없이 민병규를 2군으로 보내야 했다.
그러다 시즌 중반, 주전 1루수가 손목 부상을 당하면서 기회를 잡았고.
시즌 막판까지 1루 자리를 잘 지킨 끝에 이듬해부터 랜더스의 주전 1루수로 뛰게 됐다.
루키 시즌이 끝나고 박준수와 민병규는 나란히 200퍼센트 인상된 1억 2천만 원에 도장을 찍었다.
박준수는 팀의 미래로서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연봉이 3배 올랐고.
민병규는 랜더스의 나눔 리그 첫 우승에 기여한 공로를 크게 인정받았다.
2년 차 때 박준수와 민병규는 나란히 20홈런을 넘기며 팀의 간판 타자로 급부상했다.
민병규는 3할 타율(0.311)에 23홈런, 86타점을 기록했고.
박준수는 3할을 치지 못했지만(0.294) 25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기며 100타점을 넘기는 데 성공했다.
3년 차 연봉은 나란히 2억 4천만 원.
랜더스가 민병규에게 100퍼센트 연봉 인상을 안기자 스타즈도 기다렸다는 듯이 같은 금액을 제안해 도장을 받아냈고.
이때부터 랜더스와 스타즈 팬들 간에는 누가 차기 국대 1루수인가를 두고 자존심 싸움이 시작됐다.
2026년 아시안 게임 때 시즌 성적이 조금 더 좋았던 박준수가 태극 마크를 달면서 논쟁이 끝나나 싶었지만.
작년에는 민병규가 박준수를 다시 앞서면서 재점화됐고.
LA 올림픽이 열리는 올해는 매 경기가 끝날 때마다 랜더스와 스타즈 팬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실력 위주로 뽑겠다는 당초 방침에 따라 40홈런 페이스를 달리던 박준수와 나눔 리그 타격 2위였던 민병규 모두 대표팀에 합류하게 됐지만 아직 주전 1루수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두 사람은 타격 스타일이 다른 것처럼 수비 스타일도 달랐는데.
박준수는 수비 반경이 넓지 않은 대신에 강습 타구에 강하고 포구가 좋았으며 번트 타구 대처에 강점을 가지고 있었고.
민병규는 좌우로 빠져나가는 타구를 몸을 날려 잡아내는 데 도사였다.
서로 일장일단이 있어서 누가 더 낫다고 단언하긴 어려웠지만.
강기태 감독은 조금 더 안정적인 박준수를 주전 1루수로 낙점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민병규는 제 몸을 이곳저곳 살피며 까불어댔다.
“괜찮다니까.”
“보기만 멀쩡하지 어디 한 군데 부러졌을지 어떻게 알아?”
“그랬으면 네가 퍽이나 가만있겠다.”
“야. 나 아까 머리부터 떨어지지 않았냐?”
“맞아. 머리부터 떨어졌어?”
“그렇지? 어쩐지 뒷골이 당기더라니.”
“그러니까 나와 이제. 벤치 가서 엄살이나 부리고 있어.”
“뭐래? 난 이제부터 시작이거든?”
민병규의 고집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박준수의 시선이 다시 타석으로 향했다.
나영민과의 한 타석 대결은 끝이 났지만.
박유성은 가볍게 방망이를 휘두르며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 녀석 진짜 고등학생 맞아?”
“쟤도 좀 삭았어. 뽀송뽀송한 맛이 없어.”
“얼굴 얘기 하는 거 아니거든?”
“아니면 뭐? 아, 방금 전 타격? 그게 왜? 너도 나도 저 정도는 하잖아?”
프로 야구 팬들에게 박준수는 과묵함의 대명사로 불렸다.
MVP 인터뷰를 할 때도 늘 단답형이었고.
여성 팬들이 좋다고 들러붙을 때도 무뚝뚝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반면 민병규는 말이 많기로 유명했다.
어찌나 입담이 좋은지 양신, 양준석이 주최하는 자선 야구 대회에 3년째 선수가 아닌 해설로 참여할 정도였다.
프로 야구 팬들은 둘을 합쳐서 딱 반으로 갈라야 한다고 말했지만.
실제 박준수는 민병규와 성격이 비슷한 편이었다.
게다가 후배들에 대한 평가가 박한 것도 똑같았다.
송현민이라는 큰 벽과 싸우며 선수 생활을 하다 보니 조금 잘하는 걸로 우쭐대는 후배들을 보면 코웃음만 났다.
만약 다른 때 같았다면 민병규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마지막 순간 박유성이 보여주었던 인 앤 아웃 스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방금 전 타격, 제대로 안 봤지?”
“아니거든? 제대로 봤거든?”
“설마 얻어걸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히 얻어걸린 거지. 저걸 쟤가 어떻게 때려?”
“그러면 그렇지. 네가 제대로 봤을 리 없지.”
“뭔 소리야? 아니면 뭐? 진짜 친 거라고?”
“마지막 순간에 인 앤 아웃 스윙을 하더라.”
“거짓말 치지 마.”
“진짜야. 그러니까 타구가 네 정면으로 왔지. 그냥 잡아당겼으면 무조건 파울이었어.”
민병규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1루심 노릇을 하게 됐지만 덕분에 박준수는 박유성의 타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다소 건방져 보이는 루틴부터 시작해 키킹, 스트라이드, 파워 포지션, 어프로치, 컨택트, 릴리스, 팔로우 스루에 이르는 일련의 동작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박유성의 타격을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박준수는 박유성의 타격폼이 완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금 공은 나도 제대로 공략하기 힘들어. 처음부터 노리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원 볼에서 저 공을 왜 치냐?”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방금 공도 볼 아니었냐?”
“영민 선배 몸쪽 공이 스트라이크로 들어오는 거 봤어? 거의 다 볼이지.”
“하긴. 볼인 줄 알면서도 방망이가 끌려 나가는 거지. 한복판에 걸쳐서 들어오니까.”
“아무튼 저 녀석 보통이 아니야.”
“어쩐지. 아까 밥도 곱빼기로 먹더라.”
“야이 씨.”
민병규와 박준수가 또다시 티격태격거리는 동안 나영민은 마운드 위에서 스파이크 끈을 고쳐 맸다.
마치 방금 얻어맞은 안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처럼 시위를 했다.
하지만 강기태 감독은 신고식을 과열시킬 생각이 없었다.
“영민이는 고생했고. 이번에는 태규 한번 보자.”
강기태 감독의 호명을 받기가 무섭게 임태규가 씩 웃으며 마운드로 뛰어 올라왔다.
그러고는 싫다는 나영민의 손에서 공을 빼앗아 들었다.
“내려가 인마.”
“홈런이나 맞아라.”
“응. 아니야~ 삼진 잡을 거야~”
박준수와 민병규처럼 대표팀에는 라이벌 관계인 선수들이 많았다.
나영민과 임태규도 그중 하나였다.
고교 시절 고교 최대어 자리를 두고 다투던 두 사람은 우선 지명을 통해 위즈와 다이노스에 입단했고 이번에 함께 첫 태극마크를 달게 됐다.
강기태 감독은 새로 합류한 투수들의 테스트를 겸하기 위해 임태규를 호명한 거지만.
나영민에게 지고 싶지 않았던 임태규는 초구부터 전력을 다했다.
퍼엉!
묵직한 빠른 공이 얼굴 높이로 날아들자 박유성이 씩 웃었다.
‘태규 형. 거 초구부터 너무한 거 아뇨?’
민병규만큼은 아니지만 임태규와도 제법 친한 사이였다.
다이노스 원정 3연전이 잡히면 중간에 하루는 임태규를 만나 꼭 밥을 먹을 정도였다.
그런데 전 회차의 정을 무시하고 초구부터 150㎞/h가 넘는 포심 패스트 볼을 던져대니 박유성도 그냥 있기가 미안했다.
‘형이 먼저 시작한 거야.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다시 타석으로 돌아온 박유성은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따악!
임태규의 전매특허, 백도어 슬라이더를 가볍게 밀어 쳐 좌익 선상 위에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