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05화
16. 슬기로운 국대생활(3)
추신우 수석 코치는 눈치껏 1절만 했지만.
민병규의 뻔한 연기는 끝나지 않았다.
“봤지? 너 나한테 고마워해라. 나 아니었음 너 엄청 혼났을걸?”
“밥 먹으러 가자고 한 건 형인데요?”
“같이 먹었으니까 공범이지 인마. 암튼 앞으로도 이 형이 다 커버 쳐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네. 대신 저도 형하고 소정 누나 썸타는 거 비밀로 할게요.”
“뭐? 얘기가 왜 그렇게 되냐?”
“서로 하나씩 주고받는 거 아니었어요?”
“이러면 계산이 안 맞는데.”
식사를 마치고 선배들이 연습 중인 야구장으로 향했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실력 증진을 위해 새로 지은 선수촌답게 야구장의 시설도 훌륭했다.
별도의 관중석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지만 조명과 잔디, 펜스, 불펜, 더그아웃 등 모든 시설이 프로 수준이었다.
“선배님들! 유성이 데려왔습니다!”
민병규가 크게 소리치자 한창 수비 훈련 중이던 선수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늦어서 죄송합니다!”
송기섭 과장의 조언대로 박유성은 선배들을 향해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지 대표팀 선수들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저 녀석, 이제 왔네.”
“그런데 생각보다 호리호리한데?”
“그러게. 쟤는 저 체격으로 어떻게 홈런을 치는 거야?”
“에헤이. 홈런은 체격이 아니라 배트 스피드라니까.”
“짜식이 까분다. 너 홈최몇이야?”
“두고 봐. 내년에는 형보다 무조건 하나 더 칠 테니까.”
그라운드 아래로 내려온 박유성은 선수들과 다시 한 명씩 인사를 나눴다.
“룸메 왔니?”
“네. 선배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놀다 온 것도 아닌데 뭘. 괜찮아.”
가장 먼저 인사를 받은 LA 올림픽 대표팀 최고참 김하선이 새까맣게 탄 얼굴로 웃었고.
“내가 누군 줄은 알지?”
“그럼요. 자이언츠의 날쌘돌이, 백영완 선배님이시잖아요.”
“그 별명 오랜만에 듣는다. 요즘은 날샌돌이라고들 하던데.”
자이언츠의 백영완도 자신의 전성기 시절을 언급해 주는 박유성을 기특하게 바라봤다.
“너 야구 잘하더라?”
“선배님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이 녀석 말도 잘하네?”
“제가 말했잖아요. 보통이 아닐 거라고.”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야? 넌 야구 잘하니까 괜찮아.”
“그래. 암튼 앞으로 잘 지내보자. 동기야.”
트윈스의 박찬희와 다이노스의 이종률은 박유성처럼 이번에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렇다 보니 한참 어린 박유성이 신기하면서도 반가웠다.
“네가 유성이구나?”
“네. 선배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건 내가 부탁해야지. 앞으로 잘해보자.”
마지막으로 박준수가 박유성의 손을 꼭 움켜쥐자 민병규가 냉큼 끼어들었다.
“야, 손 떼!”
“악수하는데 왜 난리야?”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고. 왜 이렇게 오래 붙들고 난리야? 너 유성이랑 친해?”
“그러는 너는 속 안 좋다고 훈련 빠지더니 어디 갔다 왔냐?”
“보면 몰라? 유성이 데리고 왔잖아.”
“포기해 인마.”
“뭘 포기해?”
“네 머릿속에 든 생각 버리라고.”
“뭐래? 유성이는 이미 나하고 형 동생 하기로 했거든?”
여느 때처럼 박준수와 민병규가 티격태격거리자 군기반장 백영완이 나섰다.
“짜식들이 또 왜 싸우냐? 힘이 남아돌아? 운동장 좀 돌아볼래?”
“아닙니다!”
“그리고 괜히 유성이 앞에서 선배랍시고 군기 잡지 마라. 나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다 대표팀 동기야. 대표팀 선수 중에 절반이 첫 국대라고.”
현 프로야구의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를 꼽으라면 대부분 박준수나 민병규를 언급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히 백영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선배이기 이전에 백영완은 올림픽 대표팀 2차 발표 시점까지 리그 수위 타자 자리를 지켰을 만큼 타격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였다.
우익수 수비밖에 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의 부름을 받은 것도 경험과 실력을 겸비한 베테랑 타자이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됐으니까 얼른 가서 밥 먹어라.”
“저는 먹고 왔는데요?”
“넌 꼴 보기 싫으니까 저리 가고.”
박준수와 민병규를 한 번에 쫓아낸 백영완은 이내 표정을 바꾸더니 슬그머니 박유성의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 유성이, 밥은 먹었니?”
“네. 방금 먹고 왔습니다.”
“어디서 먹었어?”
“선수촌 식당에서 먹었습니다.”
“거긴 어떻게 알고?”
“그게…… 병규 선배님이…….”
“하, 병규 이 자식이 아주 별짓을 다 하네.”
가볍게 혀를 차던 백영완은 박유성이 표정을 굳히자 다시 냉큼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너한테 뭐라고 한 거 아니야. 네가 무슨 잘못이겠냐. 훈련 땡땡이 치고 밥 먹자고 한 병규 녀석이 잘못이지.”
“죄송합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런데 너 생각보다 몸이 좋구나? 평소에 웨이트 좀 하니?”
“네. 틈틈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 잘하고 있어. 센스로 야구하는 시절은 지났어. 기본적으로 피지컬이 되어야 해. 그렇다고 무식하게 체격을 키우라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네. 선배님.”
“내 팔 만져봐.”
백영완이 적당히 부풀어 오른 자신의 오른 팔뚝을 내밀었다.
그러자 박유성이 장단을 맞추듯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때? 제법 쓸 만하지?”
“엄청나신데요?”
“엄청난 정도까지는 아니고. 암튼 나도 신인 때는 너보다 더 말랐었거든? 그런데 주변에서 하도 벌크업을 해대니까 나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되더라.”
“아, 네에.”
“너 운동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니?”
“목표 의식 아닐까요?”
“그래. 아주 좋은 대답이야. 목표를 가지고 달려야지. 그런데 혼자 운동하는 건 효율이 떨어져. 옆에서 같이 막 으쌰으쌰해야 효율이 잘 나오지. 그러니까 앞으로 형이랑 같이 운동하자.”
“……네?”
“자이언츠 오라고. 우리 팀이 성적이 좀 안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짠 구단은 절대 아냐. 너 자이언츠 파크 와봤니?”
“네? 아, 아니요.”
“나중에 한번 와봐라. 그 열기를 직접 느껴보면 진짜 똥꼬 털까지 바짝 설 테니까.”
점심도 거르고 박유성의 옆을 밀착 마크하는 백영완 때문에 다른 선수들은 박유성에게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영완이 형 해도 너무하네.”
“그러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이언츠 우선 지명받은 줄 알겠어.”
“말 같은 소리를 해라. 유성이는 서울인데 자이언츠가 무슨 수로 우선 지명을 해?”
“그런 착각이 들 정도라는 얘기를 하는 건데 한국말이 어렵니? 아니면 귀가 막혔어?”
“귀가 막힌 게 아니라 기가 막힌다 인마. 비유를 들어도 잘 들어야지. 어휴. 유성이가 너 같은 선배 만날까 봐 걱정이다.”
“허구한 날 술만 푸는 너보다야 나 같은 선배가 백번 낫지.”
“나 요즘 술 안 마시거든?”
“이 뱃살이나 빼고 말하세요. 민병규 씌.”
“야! 이거 배 아니고 근육이거든?”
점심시간이 끝나고.
박유성은 오전 때 옆 훈련장에서 연습을 했던 투수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야, 이렇게 보니까 애기네. 애기야.”
“애기는 무슨. 저렇게 큰 애기가 어디 있어?”
“커? 뭐가 커?”
“에휴. 생각하는 거하고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알고 한숨이야? 난 키 얘기 한 건데?”
서로 박유성을 후배 삼으려고 난리 치는 타자들과 달리 투수들은 박유성을 막냇동생처럼 대했다.
“유성아. 앞으로 잘 부탁한다.”
“넵! 선배님.”
“내가 던질 땐 평소보다 배로 뛰어야 하는 거 알지?”
“넵! 스파이크가 터지도록 뛰겠습니다!”
“좋아! 짜식이 자세가 좋네. 하하.”
그런 분위기를 인지한 강기태 감독은 오후 훈련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박유성을 호명했다.
“유성아. 잘 쉬고 왔니?”
“넵! 잘 쉬었습니다.”
“타격감은 어때?”
“좋습니다!”
“그래. 미리 말하지만 나는 너 대수비나 시키려고 뽑은 거 절대 아니다. 네가 잘하면 너 주전으로 내보낼 거야.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해. 알았지?”
“넵! 알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석에 서라. 우리 유성이 실력 좀 보자.”
강기태 감독은 뒤이어 나경석과 나영민을 불렀다.
“영민아. 유성이하고 한 타석 정도 승부할 수 있지?”
“라이브 피칭입니까?”
“그래. 봐주지 말고 실제 경기라고 생각하고 던져.”
“네. 알겠습니다.”
“경석이도 실제 경기처럼 리드하고.”
“그럼 유성이 못 칠 텐데요?”
“못 쳐도 상관없으니까 프로의 맛을 제대로 보여줘.”
나중에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강기태 감독이 정면승부를 주문했다.
그러자 다른 투수들도 하나둘씩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뭐야? 왜 몸을 풀어?”
“영민이 끝나면 나도 한번 붙어보려고.”
“유성이하고?”
“야구 월드컵 사상 첫 타격 8관왕이잖아. 선배로서 얼마나 잘하는지 확인해 봐야지.”
투수들이 자발적으로 열을 내자 야수들도 글러브를 집어 들었다.
“야! 저리 가 인마.”
“오전 훈련 땡땡이 친 놈은 빠지시지?”
“1루가 네 거야? 1루가 네 거냐고!”
“됐으니까 저리 가. 너 유성이하고 엄청 친해졌다며?”
“당연하지. 내가 유성이하고 같이 밥도 먹고 다 했어!”
“그러니까 빠지라고.”
“싫어! 못 빠져!”
1루 베이스를 두고 박준수와 민병규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박유성은 송현민이 준 배트를 가볍게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스트레칭을 할 시간을 줬다면 참 좋겠지만.
다른 선수들도 밥을 먹고 바로 그라운드로 나왔는데 새파란 후배가 딴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첫 투수가 영민이 형이라 다행이네.”
위즈의 영건 나영민은 사이드암 투수였다.
다양한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까다로운 스타일이었지만 다행히 포심 패스트 볼의 구속은 빠르지 않았다.
‘최고 구속이 140 중반 정도였지? 그럼 지금은 140 초반쯤 나오겠네.’
오전에 피칭 훈련을 했다 하더라도 연습구 몇 개로 몸을 푼 나영민이 곧바로 전력 투구를 하기란 한계가 있을 터.
‘빠른 공을 노리자. 유인구는 최대한 버텨보고.’
평소처럼 루틴을 펼치며 생각을 정리한 박유성이 방망이를 왼 어깨에 걸쳤다.
그러자 나영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다.
불펜 투구를 하는 것처럼 느슨한 느낌이었지만.
후앗!
나영민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은 자유를 얻기가 무섭게 박유성의 몸쪽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퍼엉!
묵직한 포구성과 함께 몸쪽 꽉 차게 틀어박힌 공을 보며 박유성은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프로의 공은 다르네.’
U-18 야구 월드컵에서 훨씬 빠른 공들을 상대해 왔지만.
포수 미트에 꽂힐 때까지 끝까지 뻗어오는 무브먼트는 아마추어 선수들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프로 40년 차 짬이 있는데 중간 보스한테 당할 수는 없지.’
타석 밖에서 크게 숨을 들이켠 뒤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루틴을 펼쳤다.
“야 인마. 적당히 해.”
포수 마스크를 쓴 나경석이 한마디 했지만 박유성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풍차 돌리기까지 선보이며 나영민을 자극했다.
“재밌는 놈일세.”
그 모습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던 나영민은 나경석이 미트를 들기가 무섭게 표정이 달라졌다.
그러고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팔을 휘둘렀다.
후앗!
초구보다 달려드는 게 더 빨라졌지만 박유성은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돌렸다.
점심을 먹고 제대로 소화도 시키지 않은 선배가 초구와 똑같은 코스로 공을 던져주는데 이걸 놓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초구의 궤적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빠르게 방망이를 빼낸 박유성은 히팅 존에 들어온 공을 간결하게 때려냈다.
따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총알처럼 1루 쪽으로 날아갔고.
“으악!”
박준수를 대신해 1루 베이스를 빼앗았던 민병규의 입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