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04화
16. 슬기로운 국대생활(2)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은 박유성은 민병규와 함께 선수촌 식당으로 향했다.
올림픽 메달 획득에 대비해 고된 훈련을 하는 곳이다 보니 식당에는 고칼로리 메뉴들이 넘쳐났는데 따로 먹고 싶은 요리를 선수촌 전속 요리사에게 부탁하면 즉석에서 만들어주기도 했다.
‘가끔 선수촌 밥이 생각나곤 했는데. 이렇게 빨리 먹게 될 줄은 몰랐네.’
충북 진천까지 내려와야 해서 아침을 적당히 먹었던 박유성은 식판 가득 밥을 펐다.
그러자 민병규도 질세라 갈비를 집어 들었다.
“유성아. 여기 갈비 맛집이다.”
“갈비요?”
“신성 갈비라고 서울에 유명한 갈빗집 있거든? 선수들 중에 그 집 갈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특별히 소스 공수받아서 만드는 거야.”
“오오, 어쩐지. 갈비만 양이 확실히 적네요.”
“그러니까 너도 있을 때 먹어둬. 좀 이따 선수들 몰려오면 먹고 싶어도 못 먹으니까.”
민병규를 따라 식판을 채운 박유성은 다른 선수들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어! 박유성 선수 맞죠?”
“네. 안녕하세요.”
“박유성 선수 경기 잘 봤어요. 정말 잘하던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식당에는 다른 구기 종목 선수들도 와 있었는데 다들 박유성에게 관심을 보였다.
특히나 강연경이라는 세계적인 스타를 배출한 이후로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은 여자 배구 선수들은 박유성과 민병규 쪽을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웃어댔다.
“민병규 선배님.”
“선배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나이 차이 엄청 많이 나는 거 같잖아.”
“정말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럼. 되고말고. 자, 병규 형~ 해봐.”
“병규 형.”
“잘하네. 앞으로는 형이라고 불러. 아, 물론 조금 빡센 선배들 앞에서는 선배라고 하고. 내 말 이해했지?”
“네. 형.”
“그런데 왜 불렀어?”
“저 선수들. 여자 배구 대표팀 맞죠?”
“맞아.”
“단발머리에 눈 큰 선수가 아까부터 형 바라보는 거 같은데요?”
“정말?”
국을 떠먹으려던 민병규가 냉큼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정말로 박유성이 말한 선수와 눈이 마주치자 냉큼 식판 쪽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유성아. 지금도 보고 있냐?”
“아까 그 선수요? 네.”
“하아. 이놈의 인기란. 선수촌에서도 끊이질 않네.”
민병규가 너스레를 떨었지만.
박유성은 민병구와 여자 배구 대표팀 한소정이 썸을 타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다가 6년 후 속도위반으로 결혼을 하기 때문이었다.
‘소정이 누나 눈빛이 심상치 않아서 찔러봤는데 병규 형, 딱 걸렸네.’
2회차 시절.
박유성은 아시안 게임 때 살갑게 대해준 민병규가 고마워 축의금으로 500만 원을 냈다.
나중에 축의금을 뜯어내기 위해 민병규가 일부러 더 잘해준 거라는 취중진담을 듣긴 했지만 딱히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병규 형한테 술이며 밥이며 더 뜯어먹었으니까.’
게다가 한소정도 제2의 민병규&한소정 커플을 만들겠다며 후배들을 엄청 소개시켜 줬다.
‘병규 형처럼 키 크고 팔다리 긴 여자가 이상형이었다면 배구 선수와 결혼했을지도 모르지.’
그중에 몇몇과 잠깐 만나보긴 했지만 야구와 배구는 시즌이 엇갈리는 데다가 만날 시간이 많지 않아서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데 배구 선수들 엄청 예쁘네요.”
“배구 선수들이 예뻐? 유성아. 정신 차려. 키 크고 드센 여자가 뭐가 좋다는 거야?”
“배구 선수들이 키 크고 드세요?”
“야, 장난 아냐. 보통 여자들이 장난삼아 오빵~ 하고 때리면 귀엽잖아? 그런데 배구 선수들은 아니야. 장난으로 스파이크를 갈기는데 어우야. 멍 자국이 한 달을 가더라.”
“배구 선수 만나보셨어요?”
“응?”
“꼭 만나보신 것처럼 말씀하셔서요.”
박유성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어지간하면 친해지기 전까지 선을 지키고 싶었는데 민병규 특유의 빙구미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민병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박유성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티 나냐?”
“네.”
“진짜?”
“한소정 선수가 계속 형만 바라보고 있다니까요.”
“어휴. 저 바보 멍청이. 나보고 티 내지 말라고 하고선 자기가 티 내고 있네.”
민병규가 혀를 찼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한소정과 한참 동안 깨톡을 주고받았다.
‘우리 병규 형. 뜨겁네. 뜨거워. 그러니까 속도위반을 하셨지. 어쨌거나 이번 3회차 때도 메이저는 그른 듯?’
현재 프로야구에서 송현민의 뒤를 이을 만한 타자로 꼽히는 선수는 두 명이었다.
스타즈의 간판타자 박준수.
그리고 눈앞의 민병규.
전체적인 평가는 꾸준한 박준수 쪽이 조금 더 좋았지만 인기는 민병규가 더 많았다.
민찬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야구선수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외모에 톡톡 튀는 언변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박준수와 민병규, 둘 다 메이저리그에 가지 않았다.
‘준수 형은 어머니 때문이었고 병규 형은 소정이 누나 때문이었지.’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도 얼굴 보기 힘든데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 한소정과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먼저 일본 리그에서 러브 콜을 받았던 한소정을 민병규가 뜯어말린 터라 민병규도 메이저리그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3회차 때는 결과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박유성은 민병규와 한소정이 이번에도 결혼해서 깨 볶으며 잘 살기를 바랐다.
백번 생각해 봐도 노는 거 좋아하는 민병규가 행복해지려면 한소정이 옆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형은 메이저리그 가실 거예요?”
“뭐라고?”
“메이저리그요.”
“가야지. 돈 많이 주면.”
“만약에 생각 이하면요?”
“그럼 안 가지. 돈도 못 버는데 뭐 하러 미국 가서 고생하냐?”
한소정과 깨톡을 주고받던 민병규가 코웃음을 쳤다.
메이저리그의 꿈을 안고 야구를 하는 후배들이 들었다면 민병규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졌겠지만 박유성은 그런 민병규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다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다.
야구를 업으로 삼는 야구 선수가 돈을 못 번다면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나았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저요?”
“너 윤나라 대표 만났다며? 그때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어요.”
“그 누님도 참 대단해. 그런 식으로 후린 선수가 한둘이 아니다.”
“후려요?”
“그렇다고 그 누님이 선수들하고 이러쿵저러쿵했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솔직히 윤나라 대표, 예쁘잖아? 그래서 그 누님하고 밥 먹으러 나갔다가 계약서에 도장 찍는 선수들 많아.”
“그래요?”
“계약 파기도 그만큼 많긴 하지만 뭐 그것도 수완이니까.”
“그럼 저도 연락해 볼까요?”
“짜식이 내가 방금 뭐라고 했냐? 계약 파기도 많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뜻이겠어?”
“에이전트로서는 능력이 없다는 얘기인가요?”
“없진 않은데 입으로 떠드는 것만큼 대단한 정도는 아니야. 그 누님이 원래 현민이 형 노렸잖아?”
“그랬어요?”
“그래. 대차게 물먹긴 했지만 그 누님이 100일 안에 현민이 형 도장 받아내겠다고 호언장담했어.”
송현민과 윤나라 대표의 일화에 대해서는 박유성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송현민이 동료들과 술을 먹고 있으면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 대리기사까지 자처했을 정도였다고.
‘현민이 형도 그 정성에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는데 때마침 최상규가 나타났지.’
자신보다 못한 윤나라 대표가 송현민이라는 대어를 낚는 게 못마땅했던 최상규는 메이저리그 유명 에이전시에서 일했다는 경력을 앞세워 하이재킹을 해버렸고.
윤나라 대표는 상도덕도 없는 인간이라며 최상규의 최 자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최상규를 날렸으니까 축배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네.’
그 나물에 그 밥이긴 하지만.
최상규와 윤나라 대표, 둘 중에 한 명을 고르라고 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윤나라 대표였다.
최상규는 고객의 돈과 명성을 멋대로 가져다 쓴 쓰레기 중의 쓰레기지만.
윤나라 대표는 최소한 에이전트로서의 기본은 지켰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거냐고.”
“아직 잘 모르겠어요.”
“메이저리그 갈 거면 올림픽 끝나자마자 에이전트 찾아야 해. 드래프트 할 때쯤 고민하면 늦는다?”
“형은 제가 메이저리그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세요?”
박유성이 민병규를 바라봤다. 그러자 민병규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노놉. 가지 마.”
“가지 마요?”
“너 일본 애들은 왜 프로 거쳐서 메이저리그 가는 줄 아냐?”
“문화 차이 같은 걸까요?”
“문화 차이는 개뿔. 걔들도 돈 때문이야. 일본에서 요즘 제일 밀어주는 게 스즈키 지로지?”
“네.”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연평균 500만 달러쯤 챙겨준다고 하면 스즈키 지로도 메이저리그로 가겠지. 그런데 그만큼 받을 수 있겠냐?”
“못 받죠. 현민이 형도 4년에 6천만 달러잖아요.”
“맞아. 현민이 형 작년에 진짜 미쳤었거든? 그런데 연평균 1,500만 달러야.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야구판이 크다고 해도 최고들의 수준은 비슷비슷해. 곤도 타쿠야도 연평균 1,000만 달러 계약이었잖아.”
“그것보다는 조금 더 받지 않았나요?”
“아무튼 거기도 돈이야. 돈. 너 일본 프로 선수들 최저 연봉이 얼마인 줄 알아?”
“1억 넘지 않나요?”
“1억은 진즉에 넘었고 인마. 2억도 넘은 지 오래야.”
“그렇게나 많이 받아요?”
“일본은 야구판 자체가 크잖아. 거기에 너처럼 1차로 뽑히는 애들은 계약금만 10억 넘게 챙기니까 옵션까지 다 하면 20억쯤 될걸?”
“와, 어마어마하네요.”
“그런데 차포 떼면 10억이나 될까 말까 한 돈에 인생 걸겠냐? 못 걸어. 그건 도박꾼들이나 하는 짓이고 우린 야구 선수잖아. 야구를 잘해서 실력으로 인정받고 대박 쳐야지. 안 그래?”
밥을 거의 다 비운 박유성은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민병규의 말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FA 때 좀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해 2회차 시절에 타격 스타일까지 바꿨던 터라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언은 무슨. 암튼 너라면 내 신인 계약금 충분히 깰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랜더스로 오렴.”
“……네?”
“농담이야. 농담. 하하.”
그때였다.
“민병규! 여기서 뭐 해?”
저만치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엇! 수석 코치님이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민병규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추신우 수석 코치가 민병규와 박유성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민병규. 다른 선수들 다 훈련하는데 말도 없이 밥을 먹어?”
“죄송합니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어서요.”
“그리고 박유성.”
“네. 코치님.”
“넌 이 녀석아, 왔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밥을 먹고 있어?”
“코치님. 제가 먹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혼내시려면 저를 혼내주세요.”
“자랑이다 이 녀석아. 평소에 챙기지도 않는 후배 챙긴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 싶더라니 아주 잘하는 짓이야.”
추신우 수석 코치가 우람한 팔로 민병규에게 헤드록을 걸었고.
민병규는 과장되게 허우적거리며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정작 박유성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병규 형도 참 연기 못 해. 저러니까 소정이 누나 앞에서 꼼짝을 못 하지.’
민병규의 소속 구단은 랜더스.
그리고 추신우가 국내로 복귀해 은퇴한 구단 역시 랜더스였다.
2022년, 프로 야구 최초로 와이어 투 와이어를 달성했을 만큼 전력이 탄탄하기로 유명한 랜더스에게도 약점이 있으니 바로 테이블 세터였다.
정확하게는 톱타자.
강한 2번타자론에 부합하는 선수들은 많지만 공격의 첨병 역할을 해 줄 전통적인 1번 타자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U-18 야구 월드컵 타격 8관왕에 빛나는 박유성이 다른 팀에 가는 걸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다.
“암튼 먹던 건 마저 먹고 2시까지 회의실로 와라. 유성이도 그때 인사하는 걸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