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03화
16. 슬기로운 국대생활(1)
1
“박유성 선수. 선수촌은 처음이죠?”
“네? 아, 네.”
“원래는 진천이 아니라 태릉에 선수촌이 있었어요. 태릉 선수촌이라고 들어봤어요?”
“네. 들어봤습니다.”
“태릉 선수촌이 서울에 있어서 오가기 편하고 좋았는데 문화재 복원이네 뭐네 하면서 충북 진천으로 이전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진천 선수촌이라고 하죠.”
선수촌으로 가는 길에 송기섭 과장이 이미 알고 있던 역사에 대해 알려주었다.
혹시라도 누가 물어보면 잘 대답하라는 취지였겠지만.
박유성은 이미 네 차례나 아시안게임을 치른 경험이 있었다.
1회차 때는 2034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아시안 게임을 찍고 2038년 대한민국에서 열린 대구&광주 아시안 게임에 참가했고.
2회차 때는 2030년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 합류한 뒤에 2034년 대회까지 치렀다.
‘38년 대회도 나가고 싶었는데 시즌 초반에 슬럼프가 세게 왔었지. 타격 폼을 바꾸는 게 아니었는데…….’
해마다 조금씩 떨어지는 타율을 만회하기 위해 타격 자세를 조금 교정했는데 밸런스가 무너져 버렸다.
3할 근처에서 놀던 타율이 2할 초반까지 떨어졌고.
바뀐 타격폼에 어렵사리 적응했을 때는 아시안 게임 대표팀 최종 명단이 발표된 뒤였다.
웃긴 게 38년 대구&광주 대회를 앞둔 시점에서 1회차 때와 2회차 때의 반응이 180도 달랐다.
1회차 시절에는 국가대표 테이블 세터의 부재 속에 무조건 데려가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지만.
중장거리 타자로 전향한 2회차 때는 병역 혜택이 급한 후배들에게 치여 후순위로 밀려야 했다.
그때 이중적인 여론의 태도에 치가 떨려서 이듬해 열린 프리미어12 때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해 버렸다.
‘병역 혜택 걸린 아시안게임에서는 넌씨눈이라고 욕해놓고 막상 FA 일수가 걸린 프리미어 12 때는 해결사가 필요하다고 오라는 건 뭐야?’
은퇴를 번복하라는 주변의 요청을 받을 때마다 다시는 태극 마크를 달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는데.
3회차 들어 벌써 선수촌에 입촌하게 되니까 감회가 새로웠다.
박유성이 말이 없자 운전대를 잡은 송기섭 과장이 다시 말을 붙였다.
“박유성 선수. 국대 생활 잘하는 팁 알려줄까요?”
“국대 생활 잘하는 팁이요?”
“제가 국대 생활을 해본 건 아니지만 대한민국 야구의 모든 국대 선수는 우리 협회를 거쳐 갔습니다. 당연히 사적으로 연락하고 지내는 선수들도 많고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야구 선수는 아마추어 시절을 겪는다.
그리고 그런 아마추어 선수들을 관리 감독하는 게 아마협이라 불리는 바로 한국 야구 협회였다.
“암튼 입촌하면 고참 선수들부터 차례대로 찾아가서 인사하세요. 나이 꼬이면 안 됩니다. 혹시라도 그 선수가 자리 없다면 다른 선수에게 어디 갔는지 물어보세요. 없다고 다음으로 넘어가면 그걸로 또 꼬투리 잡혀요.”
“네. 알겠습니다.”
“대표팀 선수들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하고 눈이 마주치면 무조건 인사를 해요. 프리미어 12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야 선수촌을 안 쓰니까 상관없지만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 때는 다른 종목 선수들하고도 자주 부딪치거든요. 나중에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까 그냥 눈에 보이면 인사부터 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송기섭 과장의 팁은 생각보다 쏠쏠했다.
어차피 다른 선수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했는데 현시점에서 박유성이 간과하고 있었던 걸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명심하세요. 구기 종목 선수 중에서 박유성 선수가 최연소일 겁니다. 어떻게든 막내라는 얘기죠. 그리고 막내는 막내답게 굴어야 미움을 덜 받습니다.”
박유성은 이미 네 차례 방문한 진천 선수촌이라 별 감흥이 없었던 거지만.
송기섭 과장의 눈에는 U-18 야구 월드컵 타격 8관왕에 빛나는 천재 타자의 자신만만한 모습처럼 보였다.
박유성에게 호의적인 송기섭 과장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면.
야구 대표팀 선배나 타 종목 선수들에게는 건방지거나 싸가지 없는 모습으로 비칠 터.
‘박유성. 인생 3회차인 건 잠시 접어두자. 넌 막내고 여긴 선수촌이야.’
차에서 내린 박유성은 애써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송일섭 과장이 일러준 익숙한 길을 따라 터벅터벅 올라갔다.
소집일이 이틀이나 지났으니 마중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야! 박유성!”
저만치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 병규 형이다.’
지난 2026년 나고야 아시안 게임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젊은 영건들을 대거 발탁해 자국 우승을 노리던 일본 대표팀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활약했던 김일웅과 신우현은 라이온즈의 원투 펀치로 활약 중이고 박정우(베어스), 송찬우(파이터즈), 임찬기(타이거즈), 장성찬(이글스) 도 소속 팀의 토종 에이스라 불릴 만큼 맹활약을 펼치면서 국가대표 세대교체 바람이 불었고.
그 결과 이번 LA 대표팀 국가대표 팀에도 실력과 간절함을 갖춘 새 얼굴들이 대거 들어왔다.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하면 조만간 국방부의 부름을 받아야 하는 자이언츠의 베테랑 외야수 백영완과 트윈스의 재간둥이 박찬희.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한 쇼케이스가 필요했던 다이노스의 주전 3루수 이종률과 위즈의 에이스 나영민.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나영민을 쫓아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한 임태규까지.
박유성의 국가 대표 동기들이 제법 많았다.
이들 중에 박유성이 가장 보고 싶었던 건 한솥밥을 먹은 송찬우도 박준수(스타즈)도 아니었다.
바로 민병규.
대표팀 시절에 죽이 잘 맞았던 민병규와 어떻게 다시 친해질까 고민 중이었는데 그 민병규가 자신의 마중을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얌마! 빨리빨리 안 오지?”
어울리지 않는 민병규의 호통에 박유성은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누군가 한 명은 군기를 잡으려 들 거라 예상했지만 그 대상이 사람 좋은 민병규이다 보니 도저히 몰입이 되지 않았다.
“후우. 박유성. 정신 차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안 돼.”
잠시 걸음을 멈춰 호흡을 가다듬은 뒤 박유성은 민병규가 서 있는 곳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그러자 민병규가 당황했던지 두 손을 흔들었다.
“뛰지 마. 왜 뛰고 그래?”
“네? 선배님이 빨리 오라고 하셔서…….”
“빨리 오라고 했지 뛰란 소리는 안 했잖아. 경사길인데 힘들게 왜 뛰어? 그러다 발목 삐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죄송합니다. 선배님.”
“네가 뭐가 죄송해? 암튼…… 어휴 땀 좀 봐라. 좀 씻을래? 안 되겠다. 일단 숙소에서 짐부터 풀어라.”
성격대로 민병규는 박유성의 이마에 살짝 맺힌 땀 몇 방울에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고는 선배들의 지시를 무시하고 박유성을 곧바로 숙소로 데려갔다.
“그런데 다른 선배님들은 어디 계세요?”
“선배들? 어디 있긴. 훈련 중이지. 너 인마 너 큰일 났어. 짜식이 막내가 빠져서 말이야. 누가 이틀이나 늦으래?”
“죄송합니다. 주말 리그를 한 경기도 못 뛰어서요.”
“물론 나도 이해는 해. 네가 팀의 에이스인데 네가 빠지면 타격이 크겠지. 나 때도 그랬어. 야구 월드컵 나간다니까 친구 부모님이 전화 오더라. 협회장기 중인데 꼭 청대 가야겠냐고.”
“선배님도 힘드셨겠어요.”
“힘들었지. 진짜 그때 고민 많이 했다?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암튼 인마. 너 큰일 났어. 짜식이 빠져가지고 말이야. 암튼 나 지금 너 엄청 혼내고 있는 거야. 알았냐?”
“네. 선배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네 잘못은 아니고……. 하아. 젠장할. 지금 너 데리고 뭐 하는 거냐. 암튼 대표팀 분위기가 썩 좋지는 않아. 그러니까 눈치 잘 보고 행동해야 한다. 알았지?”
“네. 선배님.”
“대답만 잘하지 말고 진짜 잘해야 해. 네가 잘못하면 내가 혼난다고.”
민병규가 우는소리를 했지만 현 대표팀에서 민병규에게 대놓고 군기를 잡을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지난 2026 아시안 게임 우승 이후로 협회는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단행했고.
기존의 대체 선수가 없다는 핑계로 자리를 지키던 고참 선수들이 대거 대표팀에서 은퇴하면서 평균 연령이 대폭 낮아진 상태였다.
게다가 민병규는 지난해 송현민과 타격왕 경쟁을 했을 만큼 실력이 뛰어났다.
지난 2026년 아시안 게임 때는 동갑내기 라이벌 박준수에게 밀려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지만.
객관적인 실력만 놓고 봤을 때 이번 LA 올림픽 핵심 전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네 방은 여기야.”
“룸메이트가 누구예요?”
“얘기 못 들었어?”
“네.”
“원래 대표팀은 막내가 최고참 수발드는 게 전통이야.”
“최고참이요? 그럼…….”
“그래. 어썸 킴 김하선 선배님. 넌 인마 영광인 줄 알아.”
지난겨울.
대한민국 야구계에는 두 개의 빅 뉴스가 있었다.
하나는 리그 MVP 송현민의 메이저리그 진출.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파드리스에서 활약하던 김하선의 국내 복귀였다.
지난 2021년 파드리스와 5년(4+1년)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김하선은 준수한 공격력과 견고한 수비를 바탕으로 단숨에 팀 내 주전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2024년 추가로 맺은 3년 계약까지 성실하게 마친 뒤에 국내 복귀를 선언했다.
작년 여름, 파드리스가 김하선의 대체 선수를 영입하면서 포지션 경쟁이 불가피해지자 메이저리그 언론들은 시즌 종료 후 김하선이 다른 구단으로 이적할 거라 예상했다.
그중에 국내 복귀 시나리오도 언급이 됐지만 그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 히어로즈 구단에서 유턴을 적극 권유한 끝에 김하선의 마음을 돌리면서 히어로즈 팬들에게 역대급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겨주었다.
‘대표팀 오길 잘했네. 하선 선배님도 만나고.’
95년생인 김하선은 만 32세.
한국 나이로 서른셋이었다.
2회차 시절 박유성이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뽑혔을 때 김하선은 대표팀을 은퇴한 뒤였다.
그래서 이번 대표팀 선수들 중에 유일하게 김하선과 접점이 없었는데 같은 방을 쓰게 되다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민병규는 그런 박유성의 반응을 제멋대로 오해했다.
“야 인마. 괜찮아. 하선이 형 사람 좋아. 생긴 건 좀…… 그렇지만 진짜 착해. 정말이야. 그냥 야구 잘하는 동네 형이야. 그러니까 어려워할 필요 없어.”
서둘러 해명하는 민병규를 보며 박유성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섬킴이라 불리던 전 메이저리그 스타 플레이어 김하선을 두고 야구 잘하는 동네 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민병규의 안내를 받으며 김하선과 함께 쓸 방 앞에 서니까 성인 대표팀에 들어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암튼 빨리 짐 풀고 좀 씻어라.”
“네. 선배님.”
“선배는 무슨. 그냥 형이라고 불러. 나 생각보다 어리다?”
“저보다 다섯 살 많으신데요?”
“하선이 형은 나보다 일곱 살 많아. 그러니까 너도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그래. 호칭은 차차 고치는 걸로 하고…… 너 밥은 먹었냐?”
“아침 먹고 왔습니다.”
“그럼 좀 출출하겠네?”
“조금이요?”
“얼른 씻고 나와. 식당 가서 밥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