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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97화 (97/412)

타자 인생 3회차! 97화

14. 성인 국대라굽쇼?(6)

아무렇지도 않게 한가함을 뽐낸(?) 나영진 기자는 아예 박유성의 집까지 찾아왔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베이스볼 패치 나영진 기자라고 합니다.”

“기자님이 이 시간에 어쩐 일로……?”

“박유성 선수 특집 기사 건으로 인터뷰하기로 했는데 박유성 선수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요. 부득이하게 집으로 찾아오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나영진 기자가 그럴듯한 핑계를 대자 이선영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박유성의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 얘기로 시끌벅적하다는 건 이선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식사는 하셨을까요? 아직 전이시면…….”

“어휴, 아닙니다. 정 신경 쓰이시면 그냥 시원한 물이나 한 잔 주시면 됩니다. 인터뷰 중에 뭐 먹으면 집중력 떨어지거든요.”

“아, 네. 잠시만요.”

넉살 좋게 냉수를 한 잔 받아 마신 뒤 나영진 기자는 자연스럽게 박유성의 방으로 들어왔다.

“기사는 자주 썼는데 이렇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 거 같네요. 악수 한 번 합시다. 나영진이에요.”

“네. 박유성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별거 없네요.”

나영진 기자가 방을 훑으며 말했다.

장래가 촉망받는 야구 선수 방이라고 하기에 박유성의 방은 너무나 단출했다.

“제가 심플한 걸 좋아해서요.”

“트로피는 어디에 뒀어요?”

“그건 안방에요.”

“그럼 사진은 못 찍겠네요.”

“나중에 찍어서 보내 드릴게요.”

“그러지 말고 다음에 한 번 더 초대해 줘요. 아직 야구 월드컵 트로피는 안 왔죠?”

“네. 그건 협회에 있을 겁니다.”

“그것까지 다 받고 난 다음에 찍어요. 그래야 그림이 살지.”

“네. 알겠습니다.”

“그보다…… 내가 이러는 거 불편하거나 하진 않죠?”

나영진 기자가 뒤늦게 박유성의 눈치를 봤다.

고교 선수들이나 대학 선수들은 얼어 있는 경향이 많아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친한 척 굴었는데 박유성의 반응이 살짝 애매했다.

딱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살짝 거리를 두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박유성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뭔가 실수한 거 같기도 하고요.”

“아니에요. 그냥…… 기자님을 이렇게 뵐 줄은 예상 못 해서요.”

“아하. 내가 집에 찾아온 게 불편하구나? 그렇죠?”

“편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이런. 미안해요. 시간을 끌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찾아온 건데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네요.”

만약 다른 기자였다면 도와주러 왔는데 고마운 줄 모른다며 화를 냈겠지만 나영진 기자는 박유성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따로 날을 잡고 가정 방문 인터뷰를 하자고 해도 신경 쓰일 판에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불쑥 찾아왔으니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나영진 기자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어, 왔네. 잠깐만 통화 좀 할게요.”

기다리던 전화가 오자 나영진 기자는 냉큼 전화를 받았다.

“어, 그래. 좀 알아봤어? 누구? 성재율? 성강대 성재율 말하는 거지? 어이가 없네. 무슨 하다 하다 성재율까지 가? 확실한 거야? 아, 그래? 오케이. 알았어. 좀 더 알아보고 뭐 나오는 거 있으면 바로 연락 줘. 어, 그래. 수고.”

박유성이 보는 앞에서 통화를 마친 나영진 기자는 길게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한결 진중해진 얼굴로 말했다.

“잠깐 앉아서 얘기할까요?”

“네. 여기 앉으세요. 제가 침대에 앉을게요.”

“그래요. 내가 박유성 선수 침대에 함부로 앉을 수는 없으니까 의자 좀 빌릴게요. 어이구. 이거 쿠션감이 좋네요. 이거 어디 거예요?”

“아버지가 사주신 거라 잘 몰라요.”

“어디 보자. 여기 어디 브랜드가 있을 텐데? 어, 여기네. 이거 비싼 거예요. 80만 원 정도 하려나?”

“그렇게나요?”

“아버님이 박유성 선수 생각을 많이 하시나 보네요. 그런데도 별말씀 안 하신 거 보면 평소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닌가 봐요?”

“아버지하고요? 네. 뭐……. 저야 야구 하느라 바쁘고 아버지는 일하시느라 바쁘셔서요.”

“그래도 이번에 MVP 받아서 좋아하시죠?”

“네. 주변 분들한테 술 사느라 정신없으세요.”

“하하. 이거 언제 한번 아버님도 따로 인터뷰를 해야겠는데요?”

나영진 기자가 씩 웃었다.

보통 드래프트 상위 픽이 가능한 선수들을 둔 부모들의 경우 자식에 대한 애착과 간섭이 심한 경우가 많았다.

어떤 부모들은 에이전트를 대신해 구단과 싸우려 들기도 했고.

어떤 부모들은 친한 기자 하나 끼고 불필요한 가십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야구야 선수가 하는 거지만.

같은 실력이더라도 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게 나오곤 하는데 박유성의 부모는 나영진 기자 기준에 상당히 이상적이었다.

‘현민이네 부모님도 이러셨지.’

나영진 기자가 눈을 들어 박유성을 바라봤다.

아직 프로에 데뷔조차 하지 않은 아마추어 선수였지만.

몇 년 후에는 송현민과 함께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박유성이라는 재목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서론이 너무 길었죠?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갈 테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으면 바로 물어봐요.”

“네. 알겠습니다.”

“민찬수 선수 하차하고 나서 국대가 한 자리 비었어요. 원래라면 23명으로 올림픽을 치러야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LA 조직위에서 추가 선수 교체를 허락했죠.”

“아마추어 선수로요.”

“먼저 회신을 받은 건 우리인데 일본 쪽에서 먼저 일을 벌였어요. 스즈키 지로 선수를 데려가겠다고 하더라고요.”

“네. 저도 기사 봤습니다.”

“알지 모르겠지만 협회는 원래 일 처리가 늦어요. 공식 발표를 하려면 회의도 몇 번 해야 하고 총재 재가도 받아야 하죠. 그래서 다들 욕심을 부리는 중이죠. 어제저녁부터 박유성 선수 관련한 기사량이 줄었는데 알고 있어요?”

“아뇨. 딱히 신경 쓰고 있지 않아서요.”

“딱히? 설마 대표팀 거절하려는 거 아니죠?”

“아무래도 제가 낄 자리는 아닌 거 같아서요. 기왕 뽑을 거면 대학 리그 선수가 나을 것 같기도 하고요.”

박유성이 적당히 핑계를 댔다. 그렇다고 앞선 회차 때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영진 기자는 박유성의 말을 달리 해석했다.

“아까 통화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요. 대체 선수를 안 뽑으면 안 뽑았지 박유성 선수가 밀릴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진짜 욕심 없어요. 이제 곧 프로에 갈 테고 열심히 하다 보면 정식으로 선발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정식으로? 아하,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등 떠밀려 가는 건 별로라는 거죠?”

“애당초 제가 후보 명단에 들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했어요. 그럼 우리 이렇게 한번 해봅시다.”

“……?”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차라리 잘됐어요. 민찬수 선수 만나고 국대 보이콧 합시다.”

“보이콧이요?”

“핑계는 지금처럼 대면 될 거 같아요. 그렇게 하면 그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박유성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어, 이 번호는?”

액정 화면에 뜬 번호를 본 나영진 기자가 냉큼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입력했다.

[010-82XX-12XX]

[윤나라]

“맞네. 윤 대표.”

“윤 대표요?”

“에이전트예요. 민찬수 선수 담당이고요. 일단 받아봐요.”

박유성은 나영진 기자가 시키는 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핸드폰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유성 선수 핸드폰 맞나요?

“네. 맞는데 누구세요?”

-저는 민찬수 선수 에이전트 윤나라라고 해요. 민찬수 선수가 계속 연락을 했는데 받지를 않는다고 해서 제가 대신 했어요.

“아……. 네에.”

-혹시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민찬수 선수가 박유성 선수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서요.

“지금이요? 지금 10시 넘었는데?”

-원래 프로 선수들은 이 시간쯤에 경기 끝나잖아요. 그리고 야구 선배가 박유성 선수를 이렇게나 보고 싶어 하는데 안 만나줄 거예요?

옆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나영진 기자가 코웃음을 쳤다.

실력 없는 선배는 선배도 아니라고 떠들던 게 민찬수인데 그의 에이전트가 선배 타령이라니.

그 선수에 그 에이전트다웠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만나자고 해요.”

나영진 기자의 코칭대로 박유성은 집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해요?”

“박유성 선수가 딱히 할 얘기는 없을 거예요. 저쪽에서 떠드는 얘기들 잘 듣고 있다가 나오면 됩니다.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면 더 좋고요.”

“호응이요?”

“분명 말도 안 되는 핑계 대면서 박유성 선수 국대 보이콧 시키려 할 겁니다. 박유성 선수는 민찬수 선수 부탁받고 국대 포기하는 거고요. 여기까지만 판을 만들어주면 그다음부터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씩 웃는 나영진 기자를 보니까 왠지 일이 시끄러워질 것 같았지만 박유성에게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무작정 국대를 거절하자니 야구팬들의 관심과 성원이 부담스럽고.

무턱대고 국대를 받자니 올림픽 성적에 따른 후폭풍이 두려웠다.

“저 기자님 믿어도 되는 거죠?”

“걱정 마요. 내가 아까부터 우리가 나눈 대화 녹취하고 있었거든요? 그거 박유성 선수한테 보내줄게요. 만약에 일이 잘못되면 그냥 그거 터뜨려요.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한 시간 후.

박유성은 약속 장소인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매장도 넓고 24시간 영업하는 곳이라 이 시간에 가면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가게 안에는 민찬수와 에이전트 윤나라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유성이구나. 반갑다.”

박유성이 다가오자 민찬수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박유성입니다.”

“그래. 이렇게 나와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전화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 현민이 형이 확인을 늦게 해줘서요.”

“그랬어? 어쩐지 그럴 거 같다 했어.”

민찬수가 사람 좋게 웃었지만 윤나라 대표는 달랐다.

“정말 확인이 늦었던 거죠? 민찬수 선수 전화 일부러 피한 거 아니죠?”

“네?”

“누님도 참. 나왔으면 됐죠. 뭘 그런 걸 따지세요.”

“그래도 따질 건 따져야죠. 어쩌면 한솥밥을 먹게 될지도 모르는데. 안 그래요?”

박유성이 드래프트 시장으로 나온다고 가정했을 때.

우선 지명권은 프로 리그 최약체인 파이터즈에게 있었다.

만약 파이터즈가 지명권 장사를 포기하고 박유성을 선택한다면 민찬수가 팀 선배가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그런 걱정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연말에 군대 가실 텐데요 뭘.’

LA 올림픽 메달 획득에 실패한 뒤 여러 선수들이 군 복무를 결정했다.

민찬수도 그중 하나였는데 내후년 아시안 게임을 노리자는 팬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현역으로 입대해 버렸고.

제대 후에는 배우를 하겠다며 야구판을 떠났다.

‘솔직히 저 정도 외모면 뭐…….’

검은색 모자를 눈썹 밑까지 눌러 썼지만 박유성이 보기에도 민찬수는 확실히 잘생겼다.

지난 결승전 때 혼쭐을 내줬던 요시다 코헤이가 순정만화 속 주인공 느낌이라면 민찬수는 배우상이었다.

게다가 연기력도 제법 나쁘지 않았다.

“누나가 그러니까 분위기 이상해지잖아요.”

“속상해서 하는 말이잖아.”

“내가 괜찮다는 데 누나가 왜 그래요? 자꾸 이럴 거면 나가 있어요.”

“너도 참. 속도 좋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 게 뻔할 텐데도 민찬수는 정말로 미안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기자님이 적극호응하라고 했으니까.’

박유성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민찬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래도 전화는 받았어야 했는데 제가 좀 당한 게 많아서요.”

“당한 게 많다니?”

“그냥 이런저런 사칭 전화를 많이 받아서요. 핸드폰 번호를 바꿔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이고. 그랬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나만 속 태우고 있었네. 암튼 그 얘기는 이제 그만 하자. 이렇게 나와줬으니까 됐다.”

민찬수가 웃으며 박유성의 손등을 잡았고.

박유성도 그 손길을 딱히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자 민찬수가 본격적인 연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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