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96화
14. 성인 국대라굽쇼?(5)
3
“아들. 너 이러다 정말 올림픽 나가는 거 아냐?”
“아버지. 또 술 드셨어요?”
“딴소리하지 말고 이 녀석아. 장 사장네 아들이 그러던데 너 안 뽑으면 난리 날 분위기라던데?”
“장 사장님 아들이 커뮤니티를 너무 봤나 보네요.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그래? 아니야?”
“그리고 이번에 못 가도 국대는 언제든 들어갈 수 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누구 아들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술이 잔뜩 취한 채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 박명철을 어머니에게 인도하고.
박유성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 핸드폰을 잡았다.
[레인저스 송 – 암튼 너 대표팀 뽑히면 무조건 나하고 같은 방 쓰는 거다. 알았지?]
[레인저스 송 – 야 인마. 왜 대답이 없어?]
[레인저스 송 – 자냐?]
[레인저스 송 – 너 설마 나하고 같은 방 쓰기 싫어서 대답 안 하는 거야?]
[레인저스 송 – 읽씹이야 뭐야?]
[레인저스 송 – 야! 박유성!]
“잠깐 사이에 많이도 보냈네.”
피식 웃은 박유성은 냉큼 답장을 보냈다.
[8T&M 박유성 – 잠깐 거실 좀 나갔다 왔어요.]
[레인저스 송 – 짜식이 그러면 말을 해주고 가야지. 한참 기다렸잖아.]
[레인저스 송 – 암튼 나하고 같은 방 쓰는 거다?]
[8T&M 박유성 - 저야 좋죠. 그런데 그게 가능해요?]
[레인저스 송 - 당연히 가능하지. 원래 국대는 메이저리그 선수들 따로 신경 써주거든. 그래서 나도 신인 때 정후 형 덕 좀 봤고.]
[8T&M 박유성 - 정후 선배님이 형하고 같은 방 써준 거예요?]
[레인저스 송 - 내가 바짝 쫄아 있으니까 정후 형이 그러더라.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 말라고.]
[8T&M 박유성 - 와, 역시 기정후 선배님. 역시 대표팀 주장답네요.]
[레인저스 송 - 야! 그때는 주장 아니었거든? 그리고 내가 방을 써주겠다는데 왜 정후 형 칭찬을 해?]
[8T&M 박유성 - 형하고 같은 방 써주셨잖아요. 그게 어디 보통 일인가요?]
[레인저스 송 - 하아. 유성아 너 안 되겠다.]
[레인저스 송 - 넌 진짜 내가 제대로 굴린다. 진짜다.]
송현민이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지만.
박유성은 성인 대표팀 생활이 딱히 겁나지 않았다.
앞서 이미 겪어봤기 때문이다.
1회차 시절에는 서른 무렵에 태극마크를 달아서 막내 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2회차 때는 달랐다.
1회차 때보다 4년 일찍 대표팀에 들어갔는데 하필이면 병역 혜택이 걸린 아시안 게임이라 선배들의 수발을 열심히 들어야 했다.
언론과 팬들은 실제 경기는 거의 뛰지도 않고 병역 혜택만 받았다며 관광 박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지만.
“관광은 무슨. 선배들 빨래하고 심부름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갔는데.”
2회차 들어 잘 관리해 왔던 손에 주부습진이 생겼을 때를 떠올리며 박유성은 쓰게 웃었다.
진짜 그때는 어렵게 들어온 대표팀이라 이를 악물고 버텼었는데.
그 대표팀에 이렇게 빨리 자리가 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예전에도 민찬수 선배가 음주 단속에 걸렸던가?”
잠시 생각을 더듬던 박유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 분명 기억하고 있을 텐데.
민찬수가 대표팀에서 하차했다는 얘기는 3회차 들어 처음 들었다.
어쩌면 연예인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생일 파티는 함께했는데 다른 차를 탔을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야구 월드컵을 보고 뿌듯해하던 경찰이 술이 취해 떡이 된 민찬수 선배를 FM대로 처리한 건지도 모르고.”
음주 운전 방조도 큰 잘못이지만.
실제 음주 운전을 하고 적발된 선수들도 몇 개월이 지나서야 언론에 보도되는 걸 감안했을 때 민찬수 사건은 조금 이례적이었다.
게다가 LA 올림픽 조직 위원회에서 딱 맞춰 아마추어 선수 대체를 허용했으니 야구의 신이 올림픽 나가라고 등 떠미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지. 아니야. 너무 설레발은 치지 말자. 이러다 또 김칫국만 마시게 될 수도 있어.”
평범한 고등학교 3학년 선수였다면 언론의 언급만으로도 어쩔 줄을 몰라 했겠지만.
프로 40년 차 베테랑인 박유성은 프로 야구 협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보나 마나 지금쯤 자기 구단 선수 데려가려고 작전 회의 중이겠지.”
청소년 대표팀 동기들은 선발이 확정되기라도 한 것처럼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박유성은 프로 야구 협회에서 공식 입장을 발표할 때까지는 엉덩이 무겁게 앉아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일찍 병역 문제를 해결하면 좋겠지만…… 이번 올림픽 때도 메달은 못 땄으니까.”
송현민이 들었으면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게 벌써부터 병역 혜택 타령이냐며 한마디 했겠지만.
인생 3회차인 박유성에게 병역 문제는 해외 진출과 직결되어 있었다.
1회차 시절에는 대표팀 선발이 늦어서 해외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해외 진출은커녕 입대 시기를 두고 장태수와 매일같이 머리를 싸매야 했을 정도였다.
“10년 차 때 포텐이 터지지 않았다면 아마 군대로 끌려갔겠지.”
대한민국 남자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건 공감하지만 한창때 군대를 다녀온다는 건 야구 선수에게 치명적이었다.
기껏 쌓아온 커리어가 끊길 뿐만 아니라 다시 옛 기량을 되찾기도 쉽지 않고 그사이 치고 올라온 후배들과 밥그릇 싸움을 해야 하며 FA 계약 때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상무나 경찰청에 입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쪽 다 만 27세까지만 선발하는데 지원하려면 커리어를 쌓아야 하고 커리어를 쌓다 보면 나이를 먹게 되니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요즘에는 괜찮은 신인들은 일찍 군대로 보내는 추세고.”
박유성도 입단 초기 파이터즈로부터 현역 입대 제안을 받았지만 1군 진입은 시간문제라는 착각 속에 당당히 거절했다.
만약 그때 구단의 말을 들었다면 1회차 인생이 달라졌을까?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 타격에 눈뜨는 데 10년이 걸렸는데.”
병역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들었다 해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까지 단축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병역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더 악착같이 방망이를 휘둘렀으니 일찍 병역 문제를 해결했다면 태극 마크 한 번 달아보지 못하고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을 것 같았다.
2회차 시절에는 1회차 때보다 4년 일찍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해외에서 별 반응이 없었지.”
데뷔 후 3년 만에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려내고.
4년 차에 20홈런을 넘겼을 때 파이터즈 팬들은 4번 타잣감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해외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2할 후반에 잘해야 20홈런쯤 치는 국내 타자에게 관심을 줄 메이저리그 구단은 없다고 봐야지. 심지어 병역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5년 차 시즌을 마치고 구단에 당당히 해외 진출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포스팅 응찰액은 형편없었다.
7년을 채우고 FA가 됐을 때도 마찬가지.
같은 값이면 해외에서 뛰고 싶어서 에이전트를 통해 슬쩍 간을 봤는데 메이저리그는커녕 일본 쪽에서도 마음에 들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심지어 그때는 아시안 게임으로 병역을 해결했는데도 말이야.”
병역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해서 해외 진출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병역에 발목이 잡히지 않는다면 예전과는 다른 상황들이 만들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번 LA 올림픽은 메달 획득 가능성이 낮았다.
“1회차 때와 2회차 때 모두 조 3위였지?”
A조와 B조로 나뉘어 진행되는 예선에서 4강에 진출하려면 조 2위를 차지해야 하는데 1회차와 2회차 모두 미국과 도미니카 공화국에게 밀려 4강 진출에 실패했다.
게다가 올림픽 당시 백업 외야수로 적잖게 활약했던 민찬수가 빠졌으니 전력은 더 약해진 셈.
“내가 들어간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거 같은데? 나이 때문에 주전으로 써주지도 않을 테고. 대수비나 대주자만 하다 오겠지 뭐.”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박유성은 손에 든 핸드폰을 저만치 내던졌다.
현실적인 고민 탓에 살짝 현타가 오기도 했고.
아직 발표도 나지 않았는데 설레발을 치는 송현민과 놀아주는 것도 지쳤다.
“이번 올림픽은 넘기고 2년 후 아시안 게임을 노리자. 차라리 그게 낫겠다.”
박유성이 나직이 주절거렸다.
괜히 민찬수의 자리에 욕심냈다가 욕받이가 되느니 우승을 차지했던 2030 아시안게임을 목표로 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송현민이 독식하던 핸드폰 위로 못 보던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누구지?”
잠시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박유성은 손가락을 움직여 통화 거절로 돌렸다.
올림픽을 포기하기로 반쯤 마음먹었는데 괜히 기자 전화라도 받았다간 골치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의 전화번호는 계속해서 핸드폰을 울렸다.
“아 씨. 누구야?”
짜증이 난 박유성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핸드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유성 선수! 끊지 마요! 나 민찬수예요.
“……누구요?”
-민찬수요. 민찬수. 파이터즈 민찬수.
“네에. 그러시겠죠.”
-장난 전화 아니고 진짜입니다. 그러니까 끊지 마요. 못 믿겠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내 번호 진짜인가 물어봐도 돼요.
상대는 그렇게 하면 박유성이 믿어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1회차와 2회차를 살면서 수많은 사기 전화를 받아왔던 박유성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그럼 현민이 형한테 물어볼게요.”
-네. 그렇게 해요.
“일단 끊겠습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박유성은 걸려 온 전화번호를 송현민에게 보냈다.
[8T&M 박유성 – 010-98XX-82XX]
[레인저스 송 - ????]
[레인저스 송 – 뭐야? 핸드폰 번호 바뀌었어?]
[8T&M 박유성 – 이거 민찬수 선배 번호 맞아요?]
[레인저스 송 – 찬수 형? 잠깐만.]
[레인저스 송 – 어 맞네. 그런데 찬수 형은 왜?]
[8T&M 박유성 – 뜬금없이 전화 왔는데요?]
[레인저스 송 – 뭐? 언제?]
[8T&M 박유성 – 지금이요.]
[레인저스 송 – 왜 전화했대?]
[8T&M 박유성 – 그건 차차 알아볼 예정?]
박유성은 상대가 민찬수인지 확인하는 게 중요했지만 송현민은 달랐다.
[레인저스 송 – 일단 다시 전화하지 말고 기다려.]
[레인저스 송 – 내가 알아볼 테니까.]
[8T&M 박유성 – 뭐 하러 그래요. 민찬수 선배가 설마 돈 빌려달라고 전화했을까 봐요?]
[레인저스 송 – 그 형 돈 잘 빌린다. 잘나가는 후배들 빌붙기 잘하고.]
[8T&M 박유성 – 헐, 진짜요?]
[레인저스 송 – 암튼 내가 빨리 알아볼 테니까 대기해.]
[8T&M 박유성 – 넵. 보스.]
잠시 끊겼던 송현민의 깨톡 메시지가 올라온 건 그로부터 10분 뒤.
[레인저스 송 – 아무래도 불안하다. 지금 찬수 형 근신 중이거든? 근데 아까 파이터즈 단장님 만나고 갔대.]
[8T&M 박유성 – 파이터즈 선수가 파이터즈 단장 만나는 게 이상한 건가요?]
[레인저스 송 – 시끄럽고 형이 시키는 대로 해. 전화 오면 받지 마. 내일 아침에 핸드폰 번호 바꾸면 더 좋고.]
[8T&M 박유성 – 상식적인 해결책은 없나요?]
[레인저스 송 – 만약에 만나자고 하면 무슨 얘기 하나 잘 녹취해 놔.]
[레인저스 송 – 아니다. 내가 아는 기자한테 연락할 테니까 그 기자하고 같이 움직여.]
[8T&M 박유성 – 이 시간에요?]
[레인저스 송 – 그 기자 야행성이라 괜찮아. 지금 할 거 없어서 엔플릭스나 보고 있을걸?]
[레인저스 송 – 암튼 내가 그 기자한테 전화해서 연결시켜 줄 테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 봐. 알았지?]
저녁 8시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도와줄 기자가 있을까 싶었는데.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못 보던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박유성 선수 핸드폰 맞죠? 베이스볼 패치 나영진이라고 합니다. 송현민 선수가 급히 전화하라고 해서 전화했는데 잠깐 통화 괜찮죠?
“네. 뭐 저야 상관없는데 기자님은 괜찮으세요?”
-나도 괜찮아요. 조금 전까지 엔플릭스 드라마 보고 있었거든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