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91화 (91/412)

타자 인생 3회차! 91화

13. 박유성은 못 말려(10)

-4구도 파울! 박유성 선수가 계속해서 파울 타구를 만들어냅니다.

-요시다 코헤이 선수가 포크 볼로 승부를 걸었습니다만 박유성 선수가 잘 커트해 냈습니다.

-볼 카운트는 여전히 박유성 선수에게 불리한 상황인데요. 한윤재 해설위원은 이 승부를 어떻게 보십니까?

-흔히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죠?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노 볼 투 스트라이크라는 볼카운트 역시 숫자에 불과하다고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일단 지금까지 상황을 한번 복기해 볼까요? 요시다 코헤이 선수는 초구에 바깥쪽으로 빠지는 빠른 공을 던졌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워낙에 잘 치니까 정면 승부를 피한 거죠.

-앞서 아슬아슬한 코스였다고 말씀하셨는데요.

-S존상으로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 2개 정도가 벗어났지만 요시다 코헤이 선수는 좌투수거든요. 오늘 구심이 바깥쪽에 후하다면 한복판에서 바깥쪽으로 흐르는 공의 궤적상 스트라이크를 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공을 박유성 선수가 먼저 걷어냈는데요.

-그렇습니다. 볼인지 스트라이크인지 확신하기 어려운 공이 박유성 선수의 파울로 스트라이크가 됐죠. 변수가 상수가 된 겁니다. 그래서 요시다 코헤이 선수는 다시 한번 바깥쪽으로 공을 던졌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초구처럼 건드려 주면 고맙고 그게 아니더라도 몸쪽 유인구를 던지기 위해 포석을 둔 건데…….

-그 공도 박유성 선수가 걷어냈죠.

-네. 맞습니다. 그렇게 투 스트라이크 노 볼이 됐죠.

-아, 말씀드리는 순간 투포수 사인 교환을 끝냈습니다. 아무래도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일단 중계가 더 중요하니까요.

-요시다 코헤이 선수가…… 이제 투구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도 몸 쪽! 하지만 박유성 선수가 또다시 걷어냅니다!

“호우~”

1루 쪽 관중석 너머로 사라지는 타구를 보며 박유성이 너스레를 떨었다.

슬라이더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포크 볼과 비슷하게 떨어지는 각도가 제법 예리했다.

“그냥 쳐버릴 걸 그랬나?”

차라리 방망이 중심에 맞혀내는 거라면 간단할 텐데.

오랜만에 보는 공을 일부러 엇박자로 때려낸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해야 해. 박유성. 저 가식적인 놈의 가면을 벗길 사람은 너밖에 없어.”

3회차씩이나 살면서 정의로운 척 구는 게 더 가식적일지도 모르겠지만.

박유성은 길게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자 요시다 코헤이도 억지로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짜증 나지? 짜증 날 거야. 네 기분 충분히 이해해.”

박유성은 요시다 코헤이가 잔뜩 열받았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일본 중계석은 요시다 코헤이의 표정을 다르게 해석했다.

-요시다 코헤이! 한국의 톱 타자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박유성이 어떻게든 출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만 요시다 코헤이의 구위를 이겨내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확실히 요시다 코헤이의 공은 다르죠?

-다릅니다. 초구와 2구 연속해서 포심을 던진 걸 제외하고 같은 공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던지는 모든 구종이 다 수준급이고요.

-볼 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트 노 볼. 요시다 코헤이가 완벽하게 앞선 상황에서 다시 공을 던집니다. 아아, 파울. 박유성이 끈질기게 따라붙습니다.

-이번에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는데요. 박유성. 급하네요. 코스가 볼이었거든요.

-저 공을 침착하게 골라냈다면 볼카운트를 조금 더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겠지만 박유성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겠죠?

-무리입니다. 지금 박유성은 삼진에 대한 두려움으로 초긴장 상태일 테니까요.

일본 중계석은 박유성이 궁지에 몰린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그라운드의 분위기는 달랐다.

6연속 파울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요시다 코헤이가 스파이크 끈을 묶겠다며 타임을 요청했고.

“어휴, 저 신발 끈 같은 놈.”

요시다 코헤이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박유성도 배트를 몇 차례 바닥에 두드려 보더니 구심에게 배트를 바꾸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지금 박유성 선수가 더그아웃으로 향하는데요? 배트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글쎄요. 그냥 제 눈에는 박유성 선수와 요시다 코헤이 선수가 서로 신경전을 펼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경전이요?

-박성구 캐스터. 투수가 투 스트라이크 노 볼이라는 볼카운트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아요?

-글쎄요. 제가 야구를 직접 해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신이 날 것 같습니다. 주도권을 잡았으니까요.

-정확합니다. 물론 상대하는 타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공 좀 던진다는 투수들은 이 타석은 무조건 잡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요시다 코헤이 선수도 3구째에 몸쪽을 파고드는 슬라이더를 찔러 넣었죠.

-커터에 가까운 무브먼트라고 하셨었는데요. 그 공도 박유성 선수가 걷어냈습니다.

-흔히들 일본 투수의 주무기 하면 포크볼이 연상되곤 하지만 요시다 코헤이 선수는 포크 볼만큼이나 슬라이더를 잘 던지기로 유명합니다. 워낙에 손재주가 좋고 영리해서 한 가지 그립으로 세 종류의 슬라이더를 던진다고 하죠.

-일본 언론에서는 삼색 슬라이더라고 부르는데요.

-앞서 한 번 설명을 했지만 커터에 가깝게 움직이는 슬라이더가 하나 있고 그보다 조금 느리지만 무브먼트가 큰 슬라이더가 하나, 그리고 종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까지 세 개입니다. 타자 입장에서는 슬라이더 그립을 보더라도 어떤 무브먼트가 나올지 몰라서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르기가 쉽지 않은데 박유성 선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커트를 해냈습니다.

-3구째는 커터성 슬라이더를 걷어냈고 방금 전 5구째는 종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걷어냈는데요.

-그래서 방금 전에 체인지업이 들어온 겁니다. 체인지업과 커브는 사실 비중이 낮은 구종이거든요.

-그러니까 요시다 코헤이 선수가 던질 공이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투 스트라이크를 잡는 순간 요시다 코헤이 선수는 이겼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를 보세요. 볼카운트만 불리할 뿐이지 공을 6개나 던졌습니다.

-요시다 코헤이 선수가 던질 수 있는 구종 중에 이제 남은 건 기본 형태의 슬라이더와 커브뿐인데요. 요시다 코헤이 선수가 공을 던집니다. 이번에는 볼! 박유성 선수가 높게 날아드는 커브를 그대로 흘려냅니다.

-요시다 코헤이 선수. 지금 웃으면서 구심에게 어필을 하는 거 같은데요. 방금 공은 빠져도 너무 빠졌습니다. 저 공을 스트라이크 잡아주려면 최형만 선수를 타석에 세워야 할 겁니다.

타석에 선 박유성도 가볍게 어필하는 요시다 코헤이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뜬금없이 커브 볼이 들어오기에 걷어낼까 하다가 너무 높게 날아와서 일부러 내버려 뒀건만.

그걸 스트라이크가 아니냐고 우겨대는 꼴을 보니까 제대로 된 참교육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형이 파울만 치니까 만만해 보였구나? 알았어. 이번에는 제대로 때려줄게.”

평소보다 간결하게 루틴을 마친 박유성이 방망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요시다 코헤이도 입가의 미소를 지우더니 이를 악물고 공을 내던졌다.

촤라라랏!

스트라이드에 이어 빠져나오는 요시다 코헤이의 팔꿈치 각도를 본 순간 박유성은 피식 웃었다.

포심을 제외하고 한 타자에게 같은 구종의 공은 연달아 던지지 않는 녀석이라 뻔한 슬라이더일까 싶었는데.

팔꿈치 위치가 딱 봐도 포크 볼이었다.

8구 승부까지 오게 되니까 요시다 코헤이도 더는 여유를 부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어딜!”

박유성은 앞쪽으로 내디딘 오른발 무릎에 힘을 주고 버텼다.

포크 볼을 제대로 때려내려면 공이 떨어지기 직전에 걷어 올려야 하는데 눈으로 좇아서는 그 타이밍을 맞출 수가 없었다.

일단 오른 무릎에 힘을 주며 버텼다가 공이 히팅 포인트에 정확하게 들어온 순간.

따아악!

힘껏 때려내면 포크 볼이 아니라 포크 볼 할아버지가 들어와도 전부 공략해 낼 수 있었다.

-아아! 큽니다! 쭉쭉 뻗어 날아갑니다!

-이거 넘어가겠는데요?

-중견수 뒤로! 중견수 뒤로! 중견수가 공을 포기합니다! 홈런! 대한민국의 심장 박유성 선수가 선제 솔로 홈런을 때려냅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볼카운트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죠?

-솔직히 유성맘이라고 불리는 한윤재 해설위원이 너무 띄워주시는 거 같아서 일부러 중립을 유지했던 건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박유성 선수의 실력을 너무 낮게 봤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하세요.

-오늘 경기를 지켜보고 계시는 대한민국의 야구팬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최고입니다. 정말 대한민국에 이런 선수가 나왔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대한민국 중계석의 호들갑에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강기태 감독도 웃음을 터뜨렸다.

“저 녀석 진짜 물건이네. 안 그래?”

강기태 감독이 고개를 돌려 옆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수석 코치로 합류한 추추트레인, 추신우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추 코치. 내 얘기 들었어?”

“네?”

“저 녀석 어떻냐고?”

“유성이요? 최곱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추신우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대한민국 타자 중에서 최고의 커리어를 쌓은 장본인이었다.

최근에 레인저스에 입단한 송현민을 비롯해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여준 선수들이 대부분 프로 출신인 반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이너리그를 밟고 올라가 정상의 반열에 선 건 추신우가 유일했다.

그래서일까.

추신우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한참 뛰어넘는 박유성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 그 정도로 마음에 들어?”

“올림픽이 아니라 아시안 게임이었다면 무조건 뽑혔을 겁니다.”

“하긴. 구색만 맞추는 아마추어 투수보다야 유성이가 낫지.”

“타격도 타격이지만 발도 빠르고 주루 센스가 프로급입니다. 수비는 외야 어느 포지션에 던져놔도 밥값은 할 것 같고요.”

“그럼 말 나온 김에 추 코치가 가서 협회 좀 설득해 봐. 유성이 데려가자고.”

“네. 알겠습니다.”

강기태 감독의 너스레에 추신우 수석 코치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강기태 감독이 됐다며 추신우 수석 코치의 엉덩이를 때렸다.

“가긴 어딜 가. 엔트리 제출 끝났는데.”

“저도 그게 아쉽습니다. 어떻게, 지금이라도 엔트리 변경 안 될까요?”

“나도 미국전 보고 유성이 데려가고 싶어서 협회에 문의해 봤거든? 그런데 안 된대.”

“하긴, 엔트리 마감 시한이 지났으니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솔직히 누굴 뺄 거야? 다들 현민이 때문에 눈이 돌았는데.”

“다른 선수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현민이는 사실 자질이 다르죠.”

“그래도 꿈은 다 똑같은 거야. 추 코치하고 현민이가 눈높이를 확 높여놨잖아. 다들 욕심나지 않겠어?”

강기태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의 꿈이 대통령인 것처럼 야구를 처음 시작한 친구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메이저리그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들 중 프로의 문턱을 넘는 건 채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이번 국가대표에 뽑힌 선수들은 프로 선수들 중에서도 상위 5퍼센트 안에 드는 인재들.

그들이 메이저리그를 바라보는 것까지 욕심이라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한 말이었다.

그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강기태 감독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발신자는 베이스볼 패치 나영진 기자.

“나 기자가 웬일이지?”

강기태 감독이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다급한 나영진 기자의 외침을 듣는 순간 강기태 감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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