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90화
13. 박유성은 못 말려(9)
프로 40년 차인 박유성은 얼굴로 야구를 하는 부류를 싫어했다.
조금 생겼다는 이유로 팬들을 거느리면서 야구는 대충 하고.
연봉 협상 때는 인기를 언급하며 실력 대비 많은 연봉을 받아가는 녀석들 때문에 대한민국 야구가 발전을 하지 못하는 거라고 한탄했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보다 더 싫은 게 잘생긴 주제에 야구까지 잘하는 녀석들이었다.
얼굴 믿고 야구 대충 하는 애들은 잠깐만 눈 감으면 2군으로 사라지거나 은퇴를 하지만 야구 잘하는 잘생긴 녀석들은 달랐다.
배우나 모델을 해야 할 외모에 야구 실력까지 좋아버리면 일평생 야구만 해온 대다수 선수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마운드에 올라온 요시다 코헤이는 비호감의 결정판이었다.
‘무슨 제약 회사 회장 손자라고 했었지?’
일단 요시다 코헤이는 태생부터 달랐다.
터무니없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남들보다 늦게 야구에 뛰어들었고.
취미로 시작한 야구로 청소년 국가대표 에이스 자리를 꿰차 버렸다.
그렇다고 야구에 전념하는 것도 아닌 게 남들 열심히 훈련할 때 화보 촬영을 하며 연예계 쪽에 한 발 걸쳐놓은 상태라고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야구를 그만두면 의학에 전념해 스포츠 의학 쪽의 권위자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까지 했으니.
‘정말정말 재수 없는 놈이지.’
물론 자격지심 때문에 요시다 코헤이가 싫은 건 결단코 아니었다.
박유성은 스스로 못생겼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배우처럼 잘생기거나 아이돌처럼 예쁜 외모는 아니지만 야구 선수치고는 나름 준수한 편이라고 자신했다.
‘태수 녀석도 배우하고 결혼했는데 뭘.’
이틀만 면도를 안 해도 범죄자가 되어버리는 장태수에 비한다면 조각 미남이라 불려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눈앞의 요시다 코헤이와는 한 앵글에 잡히고 싶지 않았다.
일단 자신보다 키가 큰데 얼굴은 작았다.
그 작은 얼굴에 눈 코 입이 다 들어가 있는 것도 역겨운데 심지어 눈은 크고 코는 높으며 피부까지 하얬다.
언론과 팬들이 괜히 요시다 코헤이에게 도쿄 왕자라는 별명을 붙인 게 아니었다.
‘내가 왜 갑자기 저 녀석 얼평을 해야 하는 거야?’
타석으로 들어서며 박유성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오늘만 보고 안 볼 사이라면 꾹 참아보겠지만.
요시다 코헤이는 10년 이상 일본 대표팀의 에이스급 투수로 활약했다.
그런 주제에 일본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러브콜을 거절했으니 숨 쉬는 것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요시다 코헤이는 박유성의 그런 속내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예의 바른 도쿄 청년이라는 별명처럼 박유성이 타석에 들어오자 모자를 벗고는 가볍게 고개까지 숙이며 박유성의 속을 더 긁어놓았다.
“얄밉게 이죽거리는 건 여전하네.”
박유성도 보란 듯이 루틴을 펼쳤다.
평소보다 타석 앞쪽을 단단히 다진 뒤에 왼 다리를 뒤쪽 라인 선상에 파묻고.
방망이를 쭉 뻗어 오른쪽 타석 앞쪽 라인을 신경질적으로 긁어낸 다음에 풍차 돌리기를 세 번 하고 어깨에 올렸다.
보통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면 열에 아홉은 표정이 달라지게 마련이지만.
요시다 코헤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빙긋 웃었다.
그 표정이 얼마나 해맑던지 꼭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럴수록 박유성은 더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속지 마. 박유성. 저 새끼 저거 사이코패스야.’
요시다 코헤이를 처음 만난 건 1회차 시절.
2039년 프리미어 12 때였다.
타격왕 경쟁에서 아쉽게 물을 먹긴 했지만 2년 연속 도루왕과 골든 글러브를 받았던 그해의 타격감은 프로 40년을 통틀어 최고라고 할 만큼 좋았다.
‘좌투수 공포증을 완벽하게 극복해 냈었지. 덕분에 다음 해 타격 4관왕도 했고.’
전년에 아시안 게임에 선발됐을 때는 병역 혜택을 받기 위해서라는 비아냥거림이 적지 않았지만.
프리미어 12 승선을 두고서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창 잘나가던 무렵 일본의 에이스로 활약 중인 요시다 코헤이를 만났고.
따악!
첫 타석에서 센터 쪽 안타를 때려내며 도쿄 돔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타격 이론상 완벽한 타이밍에 때린 완벽한 안타였어.’
생전 처음 만난 일본 대표팀의 에이스를 상대로 공을 골라가며 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눈에 들어온 빠른 공을 밀어 친다는 생각으로 때렸는데 그게 하필 요시다 코헤이의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공을 얻어맞지는 않았지만 요시다 코헤이는 그대로 주저앉았고.
구급차까지 달려오는 해프닝 끝에 다시 경기가 재개됐다.
공에 맞은 것도 고의로 타구를 날린 것도 아니었지만 박유성은 예의상 미안하다며 손을 들어주었고.
요시다 코헤이도 괜찮다고 손을 흔들며 도쿄 돔에 박수 세례까지 터져 나왔는데.
‘다 연기였지.’
무사 1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4회.
선두 타자를 2루로 보내라는 벤치의 지시를 받고 번트 자세를 취한 순간 요시다 코헤이의 빠른 공이 얼굴로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방망이를 가져다 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3회차는커녕 골로 갔을 거야.’
방망이에 맞고 튕겨 오른 타구는 정확하게 요시다 코헤이의 앞으로 향했고.
요시다 코헤이는 그 타구를 잡자마자 1루로 던져 더블 플레이를 만들어냈다.
도쿄 돔의 환호 속에서 요시다 코헤이는 주저앉은 박유성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일본어로 뭐라고 떠들어댔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네가 했던 짓 똑같이 돌려줬어라고 했던가?’
그런 줄도 모르고 요시다 코헤이가 걱정 어린 말을 해줬다고 인터뷰를 했던 박유성은 한동안 이불 킥을 해야 했다.
그래서 2회차 때 4년 일찍 다시 만났을 때.
박유성은 요시다 코헤이의 초구를 잡아당겨 도쿄 돔 담장 밖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멋쩍게 웃는 요시다 코헤이를 보며 말했다.
“뭘 쪼개. X신아.”
1회차 시절의 감정을 실어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놀랍게도 요시다 코헤이가 그 말을 알아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많은 취미 중 하나가 한국 드라마 보기라고.
처음에는 자막으로 보다가 원어 그대로 봐야 제맛이라는 주변의 말을 듣고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다던데 의대를 지망할 만큼 머리가 좋아서인지 금세 늘었다고 했다.
박유성이야 어디까지 앞선 회차의 복수를 한 셈이지만.
홈런을 얻어맞은 것으로도 모자라 X신 소리를 들은 요시다 코헤이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결국 다음 타석 때 머리 쪽으로 빈볼이 날아들었고.
벤치 클리어링으로 20분 넘게 경기가 중단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일이 커지자 일본 언론에서는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나섰고.
박유성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는 것까지 파악했다.
‘덕분에 한동안 X신좌라 불려야 했지.’
앞선 회차 때의 흑역사들을 되새기며 박유성이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 순간 요시다 코헤이가 투수판을 박차고 나왔다.
후앗!
요시다 코헤이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향한 곳은 바깥쪽.
코스상 스트라이크 존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거나 볼이 될 것 같았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굳이 쫓아갈 필요가 없는 공이었지만.
따악!
박유성은 가볍게 방망이를 휘둘러 타구를 3루 쪽 스탠드로 날려 버렸다.
-박유성 선수 초구 타격. 파울입니다.
-바깥쪽 빠른 공이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건드려 줬습니다.
-방금 공은 볼 같았는데요.
-좀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볼이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건드려 줬다는 표현을 쓴 겁니다.
-그러니까 평소의 박유성 선수였다면 치지 않았을 공이었다는 말씀이신데요.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어쩌면 일본 대표팀에서 또다시 볼넷 작전을 꺼내 들 수도 있으니까 승부를 강요하기 위해 건드려 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승부를 강요하기 위해 볼카운트를 손해 봤다는 말씀이신가요?
-너무 거창했나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많은 야구팬들이 지켜보는 생중계에서 해설위원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한윤재 해설위원은 박유성이 일부러 파울을 친 것 같은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앞서 박유성의 커트 신공에 호되게 당했던 경험이 있던 안경호는 발을 덜덜 떨었다.
“야. 뭐해?”
“뭐가?”
“유성이가 치는데 네가 왜 다리를 떨어?”
“내가? 내가 언제?”
“이거 네 다리 아니냐?”
“어, 그러네. 이게 왜 이러지?”
안경호는 발에 힘을 주어 떠는 걸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따악!
박유성이 요시다 코헤이의 2구까지 걷어내자 다시 오른발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아 쪼옴! 가만히 좀 있어라.”
“야. 이거 내가 하는 거 아니야.”
“뭐래? 이거 네 다리 아니야?”
“내 다리 맞는데……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무슨 PTSD라도 왔냐?”
“아……!”
“……?”
“맞아! 그거야! 젠장할!”
“뭔 소리야?”
“유성이 저 녀석 때문에 PTSD 왔어. 저 녀석, 나한테도 저랬다고!”
안경호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컸다면 요시다 코헤이도 들었겠지만.
결승전답게 양국의 응원단들이 적잖게 몰려온 터라 경기에 집중하기도 바빴다.
설사 안경호의 말을 들었다 해도 지금의 요시다 코헤이는 박유성과의 승부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뭐야? 엄청 까다로운 녀석이라더니. 던져주는 대로 잘만 받아먹잖아?’
새로 받은 공을 손질하며 요시다 코헤이가 피식 웃었다.
코스를 불문하고 무작정 덤벼드는 모양새가 꼭 집에서 키우는 불독 같았다.
어찌나 미련하던지 가끔 간식 없이 손을 내밀면 무의식적으로 손을 물어 잔뜩 혼을 내기도 했다.
‘사람을 개에 비교하는 건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카이 녀석하고 좀 닮은 거 같기도 하고.’
포수 미즈시마 게이의 사인을 확인한 요시다 코헤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상황에서 공을 하나 빼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결정구인 포크볼을 완벽하게 써먹으려면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른 요시다 코헤이가 다시 투구판을 박찼고.
따악!
이번에도 요란한 타격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저 녀석은 카이야.’
요시다 코헤이는 박유성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어버렸다.
이번 대회 10할 타자라는 타이틀도, 사이클링 히트나 사이클링 도루, 3연타석 홈런 같은 기록들도 다 무시했다.
‘카이. 이제 혼 날 시간이야.’
포크 볼 그립을 쥔 채로 요시다 코헤이가 미즈시마 게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미즈시마 게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몸 쪽 낮은 코스의 포크볼을 요구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요시다 코헤이는 잔뜩 몸이 달아 있을 카이, 아니, 박유성에게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후앗!
요시다 코헤이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포심 패스트 볼과 거의 다를 바 없는 피칭 터널을 지나 가라앉기 시작했고.
그 공을 따라 박유성의 방망이도 빠르게 허리를 빠져나왔다.
‘잘 가라. 카이.’
팔로우 스윙까지 마친 요시다 코헤이는 승리를 확신했다.
손가락에 제대로 걸린 포크 볼은 프로 레벨의 타자들을 상대로도 맞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박유성에게는 프로 40년 차 데이터가 있었다.
‘포크 볼!’
공이 시야 밑으로 사라지기 직전 박유성은 빠르게 방망이를 끌어당겨 히팅 포인트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방망이 안쪽에 걸린 공은 1루수 옆을 지나 파울 라인 밖으로 꺾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