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89화 (89/412)

타자 인생 3회차! 89화

13. 박유성은 못 말려(8)

나가타 유이 감독이 단호하게 말했다.

조별 예선도 아니고 전 세계 수많은 야구팬이 지켜보는 결승전에서 이미 실패한 작전을 들고나왔다가 또다시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대표팀 감독 자리를 내놓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협회 직원이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사이토 아츠키 커미셔너가 긴히 전해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이토 커미셔너가요?”

“네. 이번 결승전은 실력으로 한국을 이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커미셔너의 전언은 사실 대단할 게 없었다.

일본은 아시아 야구 종주국을 자처하는 야구 강국.

결승전이고 상대가 한국이라면 실력으로 이겨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앞서 박유성에게 고의4구에 가까운 볼넷 작전을 썼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사이토 커머셔너에게 잘 알겠다고 전해주세요.”

나가타 유이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코치들을 보며 말했다.

“들었지?”

방금 전까지 박유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떠들던 코치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박유성과의 정면승부는 도박에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사이토 아츠키 커미셔너의 뜻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가가와. 자네 생각은 어때?”

나가타 유이 감독이 배후나 다름없는 가가와 준야 수석 코치를 바라봤다.

그러자 가가와 준야 수석 코치가 냉큼 고개를 숙였다.

“사이토 커미셔너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실력으로 한국을 이기지 못하면 설사 우승을 한다고 해도 뒷말이 나올 겁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지금도 박유성 덕분에 결승에 올라갔다는 헛소리들이 나오고 있는데 또다시 박유성을 걸러봐. 그럼 뭐라고들 하겠어?”

득의양양해진 나가타 유이 감독의 말에 가가와 준야 수석 코치를 비롯한 코치들이 고개를 주억거렸고.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됐던 결승전 대책 회의는 허무하게 끝이 나버렸다.

3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캐스터 박성구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대 일본, 일본 대 대한민국의 2028 U-18 야구 월드컵 결승전을 중계해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오늘도 제 옆에는 한윤재 해설위원께서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한윤재입니다.

-앞선 조별리그에서는 대한민국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을 3 대 1로 제압했는데요.

-그 경기를 보셨던 분들도 있고 미튜브를 통해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접하신 분들도 있을 텐데요. 박유성 선수를 묶기 위해 일본 대표팀이 볼넷 작전을 썼다가 오히려 박유성 선수의 빠른 발에 당했던 경기였습니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였다는 채팅이 눈에 띄는데요.

-사실 박유성 선수는 타격만 좋은 선수가 아니거든요. 이번 대회에서 홈런을 7개나 때려낼 만큼 장타력도 있고 발도 빠릅니다. 도루가 지금 20개인가요?

-하나를 더 부르셨네요. 19개입니다.

-어차피 오늘 경기에서 하나 채우겠죠. 어쨌거나 공격과 주루에 수비까지 잘합니다. 제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눠봤는데요. 하나같이 하는 말이 어나더 레벨이었습니다.

-급이 다르다는 거죠?

-사실 다 또래의 선수들이잖아요? 박유성 선수가 엄마 배 속에서부터 야구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체격 조건이 월등한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현재 자막으로 나오는 것처럼 타격 부분을 독식하고 있습니다.

-지금 타율과 최다안타, 득점, 도루, 장타율, 출루율은 1위가 확정이고 홈런도 현재 7개로 공동 3위거든요.

-원래 선두와 1개 차이였습니다만 조금 전에 끝난 3, 4위전에서 타일러 브릭스 선수가 홈런을 추가하면서 2개 차이로 벌어졌습니다.

결승전에 앞서 펼쳐진 3, 4위전에서 쿠바 대표팀이 미국 대표팀을 7 대 2으로 제압하고 동메달을 획득했다.

조별 예선 때는 미국 대표팀이 7 대 4로 승리를 거뒀지만.

서로 에이스 카드를 뽑아 든 이번 경기에서는 타격에서 앞서는 쿠바 대표팀이 미국 대표팀을 힘으로 꺾었다.

미국 대표팀의 4번 타자 타일러 브릭스는 추격의 투런포를 쏘아 올리며 마지막 경기까지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타격 전관왕을 바라보고 있는데 박유성에 비할 수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오늘 박유성 선수가 홈런 2개를 때려내면 되니까요.

-앞서 미국과의 슈퍼 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도 박유성 선수가 두 개의 홈런을 때려낸 바 있는데요. 오늘 경기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자가 있을 때 홈런을 때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U-18 야구 월드컵 역사상 전무후무한 타격 8관왕을 달성할 테니까요.

-박유성 선수. 현재 10개의 타점을 기록 중인데요. 이번 대회 타점 부분 4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1위는 앞서 경기를 끝낸 미국의 타일리 브릭스 선수입니다.

-원래 2개 차이였던 게 4개 차이로 벌어졌지만 괜찮습니다. 박유성 선수라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채팅창에 이동엽 선수도 챙겨달라는 불만이 올라오고 있는데요.

박유성과 타일러 브릭스, 스즈키 지로에 가려졌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의 3번 타자 이동엽도 제 몫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다.

타격 5위에 최다안타 5위. 그리고 타점과 홈런은 타일러 브릭스에 이은 2위를 달리고 있었다.

단순히 순위만 놓고 봤을 때 박유성보다 이동엽이 타점과 홈런 부분 타이틀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지만 한윤재 해설위원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물론 이동엽 선수도 홈런과 타점 부분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기왕이면 타격 8관왕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번 대회를 치르면서 박유성 선수에게 푹 빠지신 것 같은데요.

-박유성 선수가 잘하는 줄은 알았지만 솔직히 이 정도까지 잘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고생한 박유성 선수가 타격 8관왕을 꼭 달성했으면 좋겠네요.

-말씀드리는 순간 양 팀의 스타팅 라인업이 나왔습니다. 먼저 선공을 맡은 일본 대표팀부터 알려 드리겠습니다. 1번 타자 모리타니 게이토. 2번 타자 다케오카 류헤이. 3번 타자 나라시와 유야. 4번 타자 스즈키 지로.

-우리나라의 박유성 선수와 비견되는 일본의 간판 타자죠.

-5번 타자 나시모토 준야. 6번 타자 미야기 히로야마. 7번 타자 사카시마 쇼타. 8번 타자 엔도 호타로. 그리고 포수 미즈시마 게이 선수가 9번 타순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9번이라고 방심해서는 안 되는 게 장타력이 있는 선수입니다. 이번 대회에서 4개의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투수는 일본 대표팀의 에이스죠. 도쿄의 왕자라 불리는 요시다 코헤이 선수입니다.

-이에 맞서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수비 위치를 알려 드립니다. 1루에 이동엽. 2루에 홍우진. 3루에 강준혁. 유격수 자리에 오대석 선수가 들어갔습니다. 외야는 차례대로 김현중과 박유성, 고우일 선수입니다.

-본래 주전 우익수로 홍상철 선수가 나왔습니다만 수비 보강을 위해 고우일 선수가 우익수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되면 중견수만 세 명이 뛰는 셈인데요.

-고우일 선수는 물론이고 김현중 선수도 수비 좀 하는 선수들이거든요. 여기에 프로급 수비 실력을 뽐내는 박유성 선수까지 나오니까 빈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선발은 대한민국의 에이스 김신우 선수. 그리고 포수 마스크는 오늘도 송산아 선수가 끼고 있습니다.

김신우와 이관우를 두고 방용택 감독은 경기 직전까지 고민했다.

안정감은 이관우보다 김신우가 한 수 위지만.

좌타자들이 많은 일본 대표팀을 상대로는 좌완인 이관우를 내보내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방용택 감독은 대표팀의 에이스인 김신우를 먼저 내보냈다.

마운드 위에서 쉽게 흥분하는 이관우보다 돌부처라 불리는 김신우가 초반을 맡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신우는 그런 방용택 감독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1번 타자 모리타니 게이토에게 기습 번트 안타를 허용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2번 타자 다케오카 류헤이와 3번 타자 나라시와 유야를 잡아낸 뒤 4번 타자 스즈키 지로를 풀카운트 승부 끝에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헛스윙 삼진 아웃! 길었던 승부에서 김신우 선수가 웃었습니다.

-바깥쪽으로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는데요. 스즈키 지로 선수가 속고 말았네요.

-느린 화면으로 다시 한번 보시죠. 3-2 풀카운트에서 유인구를 던진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절묘하게 떨어졌습니다.

-스즈키 지로 선수도 무조건 스트라이크일 거라고 생각하고 덤벼들었을 겁니다. 만약에 저 공이 빠졌다면 2사지만 1, 2루가 되니까요.

-하지만 김신우 선수. 과감한 유인구 승부로 일본 대표팀의 간판 타자인 스즈키 지로 선수를 잡아냈습니다.

중계석에서 극찬을 쏟아내는 동안 박유성도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김신우의 엉덩이를 때려주었다.

“잘했어. 에이스.”

“잘하긴. 안타 맞았는데.”

“내 생각에는 기습 번트 작전 계속 쓸 거 같거든? 그러니까 다음번에는 신경 좀 써.”

“뭐야? 잔소리하러 온 거야?”

“칭찬 반 잔소리 반?”

“공기 반 소리 반이냐?”

“그게 언제 적 드립이야? 암튼 이대로 딱 6이닝만 깔끔하게 막자. 관우는 못 믿겠다.”

이관우는 벌써부터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지만.

박유성은 최대한 김신우가 오래 버텨주길 바랐다.

정신을 차렸다 해도 이관우는 이관우.

앞선 회차에서 딱히 보여준 게 없는 이관우보다는 국가대표 에이스라 불리던 김신우를 믿고 싶었다.

그러자 김신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좋아. 6이닝. 이제 5이닝 남은 건가?”

“그래. 이대로만 가자.”

“대신에 너도 홈런 4개.”

“야. 말 같은 소리를 해라.”

“그럼 양심적으로 2개는 쳐라. 그래야 나도 마음 편히 공을 던지지.”

“나도 치고 싶다. 그런데 쟤들이 상대를 해줄지 모르겠다.”

박유성의 시선이 3루 쪽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텅 비다시피한 그라운드를 향해 일본의 야수들이 하나둘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박유성의 시야로 일본의 에이스 요시다 코헤이가 들어왔다.

“재수 없어.”

“……뭐?”

“아니야. 아무것도.”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마음의 소리를 뒤로하고 박유성은 서둘러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다른 선수들은 땀을 닦고 물을 마시며 숨을 골랐지만.

1번 타자인 박유성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박유성이 새까만 방망이를 들고 대기 타석으로 나가자 요시다 코헤이가 보란 듯이 연습구를 던지기 시작했다.

퍼엉!

묵직한 포구 소리에 이어 포수 미즈시마 게이가 탄성을 터뜨렸고.

일본 대표팀 중계진은 호들갑을 떨어댔다.

-요시다 코헤이. 연습구인데도 불구하고 155㎞/h를 찍었습니다.

-영리하네요. 1회 초 공격이 무산되어서 분위기가 한국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저 연습구를 보면 한국 타자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에 지난 조별 리그 때 하라구치 유타가 아니라 요시다 코헤이가 등판했다면 어땠을까요?

-글쎄요. 결승전 등판을 빼고 생각한다면 한국전에 요시다 코헤이를 준비시키는 게 나았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하라구치 유타보다는 요시다 코헤이가 한 수 위니까요.

잠시 마운드 위를 비추던 중계 카메라가 박유성의 얼굴을 담았다.

그러자 일본 중계석이 다시 들썩였다.

-박유성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요.

-요시다의 공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요. 만만찮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겠죠.

-박유성. 이번 대회에서 좌투수를 상대로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요시다 코헤이는 쉽지 않을 겁니다.

-최고 구속 155㎞/h의 포심 패스트 볼과 고속 슬라이더에 커브와 체인지업, 그리고 포크볼까지 구사할 수 있는 선수죠? 아마 어떤 공을 공략할지 정하는 것조차 힘이 들 겁니다.

일본 중계진들은 박유성이 긴장했다고 떠들어댔지만.

정작 박유성이 요시다 코헤이를 보며 이맛살을 찌푸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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