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81화
12. 헤이, 부라더! (7)
한윤재 해설 위원이 열심히 포장을 하는 동안.
더그아웃으로 돌아간 박유성은 전근우 수석 코치에게 불려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유성아. 방금 뭐 한 거야?”
“3루수 위치가 애매해서요. 대석이를 한 번 살려볼까 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미끼가 되어서 1루 송구를 늦추려고 했다는 거야?”
“이대로 아웃 카운트만 늘어나면 라파엘 산체스 기만 살려주게 될 것 같아서요.”
“야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3루를 가지고 도박을 해? 누가 그렇게 가르쳤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래?”
전근우 수석 코치가 두 손으로 박유성의 볼을 꼬집었다.
저만치 중계 카메라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제대로 찍으라는 듯이 과장스럽게 팔을 흔들어댔다.
물론 볼을 세게 꼬집지는 않아서 아프지 않았지만.
평소 김석률 수석 코치에게 당해왔던 게 있다 보니 박유성도 얼굴을 찌푸리며 장단을 맞췄다.
“결과는 좋아. 그런데 솔직히 과정은 칭찬하기 힘들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코치님. 다음부터는 조금 더 안전하게 플레이하겠습니다.”
“그래. 아무튼 홈 대시는 좋았다. 어떻게 바로 뛸 생각을 했어?”
적당한 훈계가 끝나자 전근우 수석 코치가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러자 박유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 녀석이 저를 안 보던데요?”
“뭐?”
“3루수요. 태그를 해야 하는데 저를 안 보더라고요. 3루 베이스만 보고 몸을 날리는데 제가 바보도 아니고 그걸 당해 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홈으로 뛴 거야?”
“보니까 포수도 홈플레이트를 비워놨더라고요. 다이빙 한 3루수가 다시 몸을 추스르고 홈으로 송구한다고 해도 제가 베이스 라인을 막고 뛰면 충분히 살수 있을 거라 여겼습니다. 최악의 경우 제가 죽더라도 대석이가 3루까지 뛸수 있을 테고요.”
“허······! 그렇게까지 생각했다고?”
전근우 수석 코치가 혀를 내둘렀다.
말은 누구나 그럴싸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기고 현실로 이뤄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3루수 알프레도 페레즈가 3루로 다이빙을 하기가 무섭게 홈플레이트를 향해내달린 박유성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볼 수가 없었다.
그저 야수들의 움직임과 심리 상태를 고려해 홈 대시를 선택한 건데 모든 게 박유성의 말대로 이루어졌다.
무턱대고 텅 빈 3루에 몸을 날렸던 알프레도 페레즈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다가 공을 떨어뜨렸고.
뒤늦게 공을 쥐고 홈으로 던졌을 때는 이미 박유성 특유의 레그 벤트 슬라이 딩이 시작된 뒤였다.
홈플레이트를 단단히 지키고 있어도 막을까말까였던 포수 말론 알론소는 알프레도 페레즈의 악송구를 잡느라 홈을 버려야 했고.
그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타자 주자 오대석은 2루를 지나 3루까지 파고들었다.
마지막 순간에 텅 빈 3루에 슬라이딩을 한 건 옥의 티였지만.
어쨌거나 모든 게 박유성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간 것이다.
‘대체 이 녀석은 몇 수 앞을 내다본 거야?’
만약 이닝이 끝난 다음에 혼을 냈던 거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상황을 전달받고 끼워맞춘 거라 의심했겠지만.
더그아웃에 들어와 하이 파이브를 나누던 박유성을 구석으로 끌고 갔으니 그럴 일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 하나.
‘진짜 타고난 거야. 용택이 형 말대로 야구 천재였어.’
헛웃음을 흘리던 전근우 수석 코치가 박유성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유성아. 너만 믿는다. 알았지?”
비록 형식적인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박유성의 신들린 플레이 덕분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반면 쿠바 대표팀 선수들의 얼굴은 패배의 그림자로 뒤덮여 있었다.
“젠장할! 지금 뭐 하는 거야?”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라파엘 산체스는 알프레도 페레즈를 향해 악을 써댔고.
라파엘 산체스가 시키는 대로 박유성을 노렸던 알프레도 페레즈도 억울하다며 언성을 높였다.
“네가 저 녀석을 잡으라고 했잖아! 아니야?”
“그럼 잡았어야지! 거기서 멍청하게 다이빙을 왜 한 거야?”
“아무것도 모르면 닥치고 있어. 애당초 네가 3루타를 얻어맞지 않았으면 됐잖아!”
“워워, 진정해! 아직 경기 끝난 거 아냐.”
“그래. 우리끼리 이러면 안 돼. 사람들이 보고 있다고.”
이런 상황이면 벤치에서 움직여야 했지만 도라 마르티네스 감독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에이스인 라파엘 산체스를 강판시키면 오늘 경기를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공수의 핵심인 알프레도 페레즈를 빼기도 어려웠다.
라파엘 산체스가 3루를 가리키며 악을 쓰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봤는데 3루를 지킬 유일한 선수에게 책임을 묻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도라 마르티네스 감독이 방관하는 사이.
구심이 마운드 쪽으로 올라와서 선수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다혈질이라는 단어의 대명사로 불리는 북중미 선수들이 고작 구심의 말 몇 마디에 흥분을 가라앉힐 리 없었다.
-쳤습니다! 좌익수 앞에 안타! 3루 주자 오대석 선수가 여유롭게 홈을 밟습니다!
-거의 한복판에 들어오는 빠른 공이었는데요. 이동엽 선수가 이 공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라파엘 산체스 선수.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이번에는 뭐가 문제일까요.
-글쎄요. 사인이 맞지 않았던 것 같은데 침착해야 합니다. 라파엘 산체스 선수가 쿠바 대표팀의 에이스거든요. 에이스가 이렇게 무너지면 오늘 경기를 이길 수가 없어요!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 지금 웃고 계시는데요.
-아닙니다. 전 철저하게 중립적으로 해설 중입니다.
-지금 채팅창에 웃는 얼굴이 눈에 선하다는 채팅이 올라왔는데요. 시청자 여러분들이 목소리만 들어도 아시는 것 같습니다.
-크흠.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우리 선수들이 잘 하고 있는데 좀 웃을 수도 있죠. 어차피 중계 화면으로는 안 나가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짓궂은 PD가 중계석을 비출지도 모릅니다.
-아아. 안 돼요. 제 얼굴 내보내면 저 남은 중계 보이콧 할 겁니다. 진짭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눈여겨보던 라파엘 산체스는 2이닝을 버티지 못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강준혁과 홍상철, 홍우진을 연속 범타로 돌려세울 때 까지만 해도 정신을 차리나 싶었지만.
2회 1사 이후 김현중에게 기습 번트 안타를 허용하면서 흔들리더니 9번 타자 고우일을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내보내고 위기를 자초했다.
-1사 주자 1,2루 상황에서 이제 박유성 선수의 두 번째 타석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박유성 선수가 꼭 3번 타자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방용택 감독이 박유성 선수의 공격력을 활용하기 위해 하위 타순에 테이블세터를 배치시켰는데 경기 초반에 바로 찬스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대한민국 대표팀 입장에서는 최고의 상황이 만들어졌고 반대로 쿠바 대표팀은 최악의 상황을 만나게 됐는데요.
-라파엘 산체스 선수가 박유성 선수와 승부를 할까요?
-글쎄요. 앞서 박유성 선수에게 얻어 맞은 3루타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승부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1루와 2루가 채워진 상태니까요.
한윤재 해설 위원의 예상대로 도라 마르티네스 감독은 맞서 싸우라고 지시했고.
라파엘 산체스는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박유성의 몸쪽을 향해 빠른 공을 꽂아 넣었다.
-초구는 볼. 156km/h의 빠른 공이 몸 쪽 깊숙이 꽂힙니다.
-여전히 구속은 살아 있네요.
-지금까지 투구수가 40구 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구속이 떨어질 시점은 아닌 거 같습니다.
-하지만 제구는 여전히 들쑥날쑥입니다. 제 아무리 공이 빨라도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면 무용지물이거든요.
-말씀드리는 순간 라파엘 산체스. 2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도 몸 쪽! 초구와 거의 비슷한 코스로 공이 들어왔습니다만 구심은 물론이고 박유성 선수도 꿈 쩍을 하지 않습니다.
2구에 이어 3구까지 볼 판정을 받자 포수 말론 알론소는 4구 째 바깥 쪽 사인을 냈다.
하지만 라파엘 산체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기어코 몸쪽 커터 사인을 끌어냈다.
“포심은 너무 빨라서 칠 엄두가 안 나? 그렇다면 좋아. 아까처럼 커터를 던져 주지. 이번에도 이 공을 때려낸다면······ 널 인정해 주겠어.”
그립을 고쳐 쥐며 라파엘 산체스가 억지로 입가를 찢어 올렸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이 사달이 났으니 박유성을 잡아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뜸을 들이는 라파엘 산체스를 보며 박유성은 이번에도 커터를 예상했다.
그리고는
따악!
초구보다 조금 더 몸쪽으로 꺾여 들어오는 공을 가볍게 잡아당겨 다시 한 번 1루 베이스 옆을 꿰뚫었다.
-2루 주자 김현중이 3루를 돌아 홈으로! 1루 주자 고우일도 3루까지 내달립니다!
-홈으로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고우일! 홈으로 달립니다! 홈에서······ 홈에서 아웃! 말론 알론소 선수의 태그가 빨랐습니다!
3루 베이스 코치의 멈춤지시를 무시하고 홈으로 내달렸던 고우일은 한 뼘 차이로 죽고 말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기 분위기는 식지 않았다.
그 틈을 노려 박유성이 또 다시 3루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지?”
안타를 맞은 순간부터 마운드 위에 멍하니 서서 박유성만 지켜봤던 라파엘 산 체스는 그저 헛웃음이 났다.
아시아 출신 선수라고 해서 우습게 봤는데.
폭발적인 스피드로 베이스를 질주하는 모습이 꼭 자국 톱 클레스 선수를 보는 것 같았다.
형편 없는 타자에게 연거푸 당했다면 자존심이 상했을 텐데.
자신의 두 눈으로 실력을 확인하고 나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헤이! 브로!”
“······?”
“너 말이야 너!”
“나?”
“그래. 너 잘한다?”
라파엘 산체스가 서툰 영어로 박유성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박유성도 화답하듯 엄지를 가볍게 들어 주었다.
-아, 지금 라파엘 산체스 선수가 3루 베이스 쪽으로 가서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요?
-박유성 선수의 반응을 보니까 칭찬을 한 것 같습니다.
-칭찬이요?
-이번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은 대부분 동년배들이잖아요. 국적은 달라도 박유성 선수가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걸 느낀 거겠죠.
-독심술이라도 익히셨습니까?
-정말이라니까요? 못 믿겠으면 나중에 라파엘 산체스 선수한테 물어보세요.
-인터뷰를 안할 줄 알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담당 PD님. 듣고 계시죠?
-에헤이. 다음 경기 중계하기도 바쁜데 무슨 인터뷰까지 하고 그래요? 자, 자. 우리 경기에 집중합시다.
-하하. 담당 PD님도 알겠다고 하시네요.
방송 중 해프닝으로 끝날 뻔 했던 진실은 경기 직후 베이스볼 패치 공윤경 기자를 통해 밝혀졌다.
-오늘 박유성 선수에게 두 개의 3루타를 허용했는데요?
-썬은 확실히 좋은 타자입니다. 몸 쪽으로 붙인 커터를 너무도 쉽게 때려냈어요.
-일부 언론에서는 실투였다고 하던데요?
-실투요? 글쎄요. 저는 최선을 다해 던졌습니다. 코스가 조금 몰렸을지 몰라도 공략하기 쉬운 공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박유성 선수도 라파엘 산체스 선수의 공이 너무 좋아서 타이밍을 맞추기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그래요? 썬이 그런 얘기를 했다니까 기분 좋은데요?
-오늘 경기에서 패배하면서 쿠바 대표팀은 결승 진출 가능성이 낮아졌습니다.
반면 대한민국은 결승 진출이 유력해졌고요. 아마 두 선수가 다시 만날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박유성 선수에게 하고 싶은 말있나요?
-헤이, 썬! 이번 대회 꼭 우승해! 그리고 메이저리그에서 만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