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80화 (80/412)

타자 인생 3회차! 80화

12. 헤이, 부라더! (6)

빅마켓 구단의 팬들은 대부분 극성맞지만.

다저스 팬들은 그중에서도 극성맞기로 유명했다.

지난 몇 년간 지구 라이벌인 자이언츠에게 밀려 별 재미를 보지 못한 탓에 괜찮은 타자가 나왔다 싶으면 팬들이 먼저 메이저리그로 올려야 한다고 울부짖었다.

비록 아직 더 가다듬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지만.

빌리 게스파노는 박유성의 마이너리그 생활이 그리 길지 않을 거라 단언했다.

레이즈의 수석 스카우트 앤드류 톰슨은 한 술 더 떴다.

“봤어? 방금 썬의 타격?”

“네. 봤습니다. 까다로운 공을 잘 받아 쳤던 것 같습니다.”

“그냥 받아 친 정도가 아니야. 커터가 들어 올 거라 예상하고 친 거라고.”

“커터를 예상했다고요?”

“방금 전 라파엘 산체스가 어떤 바보같은 짓을 했는지 기억해?”

“글쎄요. 초구보다 뜸을 들인 것 빼고는 잘 모르겠는데요.”

“바로 그거야.”

“······네?”

“라파엘 산체스는 기본적으로 포심 그립을 쥔다고. 그런데 뜸을 들였어.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립을 고쳤다?”

“그래. 베테랑 투수들도 한 번에 그립을 고쳐 쥐지는 못해. 제대로 공을 낚아채려면 글러브 안에서 제대로 고쳐야 한다고.”

“그런가요?”

“그런가요라니? 머리가 좋은 투수들이 괜히 같은 그립으로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줄 알아? 공을 쥔 순간부터 타자와의 신경전은 시작된 거라고. 거기서 밀리면 타자를 이길 수가 없어!”

수석 스카우트인 앤드류 톰슨의 지론을 전부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데이비드킴은 일단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야 이 설교를 받는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라파엘 산체스는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저질렀어. 그립을 고치기 위해 뜸을 들였고. 범타를 유도하기 위해 스트라이크 존으로 공을 던졌지. 만약에 몸 쪽 볼을 던졌다면 최소한 3루타를 얻어맞는 일은 없었을 거야.”

앤드류 톰슨이 고개를 돌려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3루 베이스 위에 한 발을 걸친 채로 장갑을 고쳐 끼는 박유성의 모습이 꼭 개선문 입성을 코앞에 둔 개선장군처럼 느껴졌다.

반면 라파엘 산체스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다른 구종도 아니고 가장 자신있어하는 커터를 얻어맞은 게 충격인 모양이었다.

“레이즈에는 썬 같은 타자가 필요해. 단숨에 경기 분위기를 바꿔 줄 수 있는 타자 말이야.”

앤드류 톰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데이비드 킴이 놀란 얼굴로 앤드류 톰슨을 바라봤다.

방금 박유성의 타격은 자신도 놀라웠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승격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앤드류 톰슨의 생각은 달랐다.

“우린 스몰 마켓 구단이야. 빅마켓이 아니라고. 값싸고 재능 있는 선수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성적을 내야 해.”

흔히들 성적에 대한 압박은 빅마켓 구단에게만 적용된다고 착각하는데 실상은 달랐다.

빅마켓 스몰마켓 할 것 없이 모든 프로 스포츠 구단은 성적을 내야 했다.

근본적으로 팬들은 승리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페이 투 윈.

말 그대로 승리를 위해 돈을 써야 하는 시대에 빅마켓 구단과 스몰 마켓 구단의 목표는 다를 수 있었다.

10년 만에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더라도 양키즈나 다저스 같은 빅마켓은 굴욕의 시간을 견뎌냈다고 묘사되는 반면 레이즈 같은 스몰 마켓은 기적을 써냈다며 축하를 받는다.

빅마켓 구단에는 당연한 게 스몰마켓 구단에는 당연하지 않게 적용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스몰마켓이라는 이유만으로 패배와 성적 부진이 정당화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지난 2020시즌.

다저스와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었을 때만 해도 레이즈 팬들은 두 손 모아 우승을 기원했다.

전반적인 팀 전력과 구단의 재정 규모, 인기, 팬덤 등 모든 게 뒤졌지만 그래도 다저스를 꺾고 생애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길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결과는 4대 2 패배.

레이즈로서는 최선을 다 했지만 바로 눈앞에서 월드 시리즈 우승을 놓친 레이 즈 팬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이듬해 다시 지구 우승을 차지한 뒤 디비전 시리즈에서 레드삭스에게 발목이 잡혔을 때도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이는 팬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대로는 안 돼. 변화가 필요해! @Captain Rays

-우리 레이즈는 충분히 강하다고. 봐! 2년 연속 지구 우승을 해냈어! @Bretti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이 완벽한 팀이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Pretty guy -다들 현실을 좀 봐. 우리 구단의 페이롤은 꼴등 수준이야.

우리보다 훨씬 많은 돈을 쓰는 구단을 이기긴 힘들어. @James E -제발 그런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빅마켓이 더 많은 돈을 쓰는 건 실력이 검증된 선수들을 비싼 값에 사들이기 때문이야.

우리 선수들은 비록 젊지만 빅마켓 선수들에 못지 않는 실력을 갖췄다고! 정규 시즌 성적이 증명하잖아! @Vamwkl -올해가 우승의 적기였어.

이제 주전 선수들이 팔려 나가고 팀에 남은 선수들이 나이를 먹고 나면 다시 승리자판기 노릇이나 해야 할 거야.

@Will77-단장을 갈아치워야 해! 새 단장이 필요하다고! @Captain Rays -맞아. 단장이 문제야. 팀을 우승시킬 의지가 전혀 없잖아! @Weden -단장 아웃! 꺼져버려! @Justin TQ

-꺼져버려! @brbuers1

결국 팬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한 피터 앤더슨 단장은 2022년 시즌을 끝으로 사임했고.

부단장이던 에릭 린드로가 단장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5년 간.

레이즈는 리빌딩을 핑계로 암흑기를 걷는 중이었다.

레이즈의 수석 스카우트로서 좋은 선수들을 찾아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앤드류 톰슨은 레이즈가 이대로 수렁 속에 빠지길 원치 않았다.

2020년에 운 좋게 월드 시리즈에 올라가기까지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또다시 그 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썬을 데려와야 해.”

앤드류 톰슨이 다짐하듯 다시 중얼거렸다.

그때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2번 타자 오대석의 타구가 3루수 정면으로 굴렀고

“엇!”

데이비드 킴의 입에서 다급성이 터졌다.

스킵 동작을 크게 가져간 박유성이 시야에 걸린 것이다.

앤드류 톰슨도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지켜봤다.

무사 3루 상황에서 쿠바 벤치는 내야를 당겼고.

3루수 알프레도 페레즈도 3루 베이스보다 1미터 정도 앞쪽으로 들어왔다.

게다가 수비 위치도 베이스라인이 아니라 유격수 쪽으로 옮겼다.

오른손 타자를 상대로 주로 바깥 쪽 승부를 즐기는 라파엘 산체스의 스타일을 고려해 수비 시프트를 건 것이다.

그 예상대로 오대석은 라파엘 산체스의 바깥쪽 커터를 무리하게 잡아당겨 3유간으로 굴렸다.

만약 내야수들이 정수비를 하고 있었다면 3루수가 대시 타이밍을 놓치면서 3유간을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가는 행운의 안타라도 기대해 볼 만 했지만.

3루수가 수비 위치를 옮기면서 3루수 정면으로 가는 타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박유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플레이는 재빨리 3루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제 아무리 발이 빠른 타자라 해도 3루수가 공을 잡았는데 홈으로 뛰어드는 건 자살 행위.

그렇다면 일단 3루로 되돌아온 다음에 3번 타자 이동엽의 방망이에 기대를 거는 게 정답이었다.

그런데

“······?”

3루수 앞으로 타구가 구르는 걸 지켜 봤음에도 불구하고 박유성은 3루로 몸을 돌리지 않았다.

스킵 동작을 멈추고 3루 쪽으로 한 발 되돌아가긴 했지만 여전히 몸은 홈플레이트를 향해 있었다.

“뭐야? 설마 홈 대시라도 하겠다는 거야?”

스카우트들 중 누군가가 떠드는 소리가 들리자 앤드류 톰슨은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

만약 여기서 홈으로 뛰다가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기껏 만들어놓은 분위기를 망치는 건 물론이고 오늘 경기를 쿠바에 내주게 될지 몰랐다.

앤드류 톰슨은 다시 3루수 쪽으로 눈을 움직였다.

알프레도 페레즈가 어떤 대응을 하느냐에 따라 박유성의 생사가 갈릴 것 같았다.

만약 이대로 1루에 송구를 한다면 박유성은 3루에서 살 테고.

억지로 3루 베이스를 향해 내달리면 런다운 플레이로 이어질 것 같았다.

“타자의 발이 빠른가?”

“아뇨. 원래 6번을 치던 타자입니다. 일종의 클린업이죠.”

“그럼 썬이 시간을 벌어줘도 3루까지 오진 못하겠네.”

“2루도 힘들 겁니다. 서로 죽겠다는 각오로 움직여야 하니까요.”

정황상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최선은 박유성이 3루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박유성을 희생시켜 오대석을 3루까지 밀어 넣는다 해도 주자로서의 위협감은 박유성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 때 마운드 아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라파엘 산체스가 알프레도 페레즈를 향해 소리쳤다.

“저 빌어먹을 놈을 잡아!”

1루 송구와 박유성을 두고 고민하던 알프레도 페레즈는 뒤늦게 3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박유성의 걸음이 빠르긴 하지만 리드 폭이 넓은 만큼 자신이 몸을 날린다면 귀루하는 박유성을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여겼다.

자신이 액션을 취하자 박유성도 뒤늦게 3루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어림 없어!”

박유성이 슬라이딩을 할 거라 확신한 알프레도 페레즈는 3루 베이스를 향해 거구의 몸을 날렸다.

3루 베이스 앞쪽에 글러브를 밀어 넣기만 한다면 귀루하려는 박유성을 자동태그 아웃 시킬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박유성은 이대로 3루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자신의 움직임은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다이빙을 감행한 알프레도 페레즈를 뒤로한 채 박유성은 홈을 향해 내달렸고.

경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아아, 박유성 선수가 홈으로 뜁니다! 홈으로! 홈으로! 홈에서 세이프! 박유성 선수가 여기서 한 점을 만들어냅니다.

-허어. 이거 제가 뭘 본 건가요?

-지금 한윤재 해설위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요. 그만큼 박유성 선수가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여 줬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건 본 해드 플레이거든요. 저 상황이라면 무조건 3루로 돌아와야 해요. 저러다 죽기라도 하면 좋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거나 다름 없어요.

-하지만 박유성 선수가 영리한 플레이로 홈을 파고들었는데요.

-이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벤치의 작전이 있었던 건지 박유성 선수의 판단 미스였던 건지 파악이 안 됩니다.

-지금 느린 화면으로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오대석 선수가 친 공이 3루수 정면으로 굴렀을 때 박유성 선수가 분명 3루 쪽으로 움직였거든요? 그런데 왜 리드를 유지했을까요?

-일단 선택권은 3루수에게 있었으니까요. 3루수가 자신을 무시하고 1루로 송구하면 편하게 3루로 돌아올 수 있는 거고 반대로 자신을 잡겠다고 달려들어도 3루로 살아 돌아갈 자신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거리 상으로는 조금 아슬아슬한 것 같은데요?

-대신에 3루수는 역동작으로 움직여야 하니까요. 박유성 선수는 베이스 라인에서 방향만 틀고 뛰면 되지만 3루수는 지금 1루 송구를 위해 무게 중심이 움직였기 때문에 곧바로 3루로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심지어 사선으로 뛰어야 했고요.

-보통 이럴 때는 런다운을 의식해 유격수가 3루 베이스 커버에 들어와야 하지 않나요?

-유격수가 거의 2루 베이스 쪽으로 가 있었거든요. 2루수는 1,2루 간을 지켰고요. 만약에 유격수가 제때 움직였다면 박유성 선수도 이런 도박을 걸지는 않았을 겁니다.

-결국 3루수 알프레도 페레즈 선수는 1루 송구 대신 박유성 선수를 잡는 걸 선택했는데요. 여기서 왜 다이빙을 한 걸까요?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직선타로 잡은 것도 아니고 태그 플레이를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느린 화면으로 다시 보니까······ 왠지 박유성 선수에게 낚인 거 같습니다.

-낚여요?

-박유성 선수가 일본 전에서 홈스틸을 기록했잖아요. 어쩌면 3루수 알프레도 페레즈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