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79화
12. 헤이, 부라더! (5)
앞서 앤드류 톰슨이 언급한 것처럼 비슷한 실력이면 미국 출신 선수가 먼저였다.
그다음이 북중미 선수.
그리고 마지막이 아시아 권 선수다.
물론 계약금을 많이 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호리호리한 체격에 장타력이 부족한 박유성에게 100만 달러 이상을 쓸 구단은 없을 것 같았다.
쿠바 대표팀의 도라 마르티네스 감독도 박유성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저 녀석. 키가 얼마나 되지?”
“프로필 상으로는 183cm입니다.”
“183이라. 작은 건가, 큰 건가?”
“아시아 쪽에서는 평균 키일 겁니다. 메이저리그 기준으로 보자면 좀 작고요.”
“그렇지? 확실히 파워는 부족해 보이지?”
“홈런을 4개 때려내긴 했지만 구장이 작은 편이니까요. 조금 더 큰 구장이었다면 그 중에 3개는 2루타가 됐을 겁니다.”
산체스 케임브라 수석 코치가 장단을 맞췄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12개국 청소년 대표팀 가운데 홈런 1위는 도미니카 공화국이었다.
그 다음이 쿠바.
3위인 대한민국 대표팀보다 5개를 더 때려냈으니 장타 쪽으로는 한 수 위라고 주장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 여긴 좀 좁지. 하하.”
그동안 선보였던 시원시원한 장타쇼를 떠올리며 도라 마르티네스 감독이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미뉴엘 로드리게스 투수 코치를 바라봤다.
“미뉴엘. 라파엘은 어때?”
“컨디션은 좋아 보입니다.”
“손톱은? 체크했어?”
“네. 잘 다듬어 놨으니까 지난 경기때처럼 손톱이 깨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외적으로는 시차에 따른 컨디션 난조로 알려졌지만.
라파엘 산체스가 호주와의 경기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피칭을 했던 건 손톱때문이었다.
2회 초 투구에서 손톱 끝에 실밥이 걸리면서 검지 손톱이 살짝 깨졌는데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컨트롤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다행히 상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강판을 시켰으니 망정이지 계획대로 7회까지 끌고 갔다면 오늘 경기 등판가 어려웠을 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매 이닝마다 체크하라고.”
“알겠습니다. 감독님.”
도라 마르티네스 감독의 시선이 다시 마운드로 향했다.
마운드 위에서는 라파엘 산체스가 술렁술렁 연습구를 던지고 있었다.
-지금 보시는 선수가 쿠바 대표팀의 에이스, 라파엘 산체스 선수입니다.
-라파엘 산체스 선수. 이름이 낯설지가 않네요.
-왠지 우리나라에서 몇 년 용병 생활을 했을 것 같은 이름인데요.
-또 모르죠. 십 년쯤 후에 우리나라에서 뛰게 될지도요.
-일단 프로필 상으로는 키가 상당히 큽니다. 192cm나 되는데요.
-대한민국 대표팀에도 이관우 선수가 190cm가 넘는 걸로 알려졌는데 이관우선수에 비해서는 살짝 왜소한 느낌입니다.
-쿠바의 에이스 답게 빠른 공에 강점이 있는 선수인데요. 패스트 볼 구속이 158km/h까지 나옵니다.
-포심도 포심이지만 커터가 일품인 선수입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이 선수를 데려가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다고 하고요.
-추가로 커브와 체인지업을 구사한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두 구종의 구사 비율은 채 10퍼센트가 되지 않습니다.
-빠른 공 위주의 투 피치 투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네요.
그때 카메라가 타석 쪽으로 돌면서 박유성이 잡혔다.
-이에 맞서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두 타자는 박유성 선수입니다.
-지금 자막으로 박유성 선수의 성적이 나오고 있는데요. 자막 오류 아닙니다.
지금까지 8타수 8안타로 타율이 10할입니다.
-추가로 4개의 홈런과 12개의 도루를 기록 중인데요. 타율과 도루, 득점은 이번 대회에 참가한 타자들 중에 1위입니다.
-출루율도 1위겠죠? 지금까지 100퍼센트 출루니까요. 생각해보니까 장타율도 1위일 것 같고요.
-U-18 야구 월드컵 개인 타이틀이 프로 야구와 같다면 타격 8관왕도 노려볼수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중계석에서 거창하게 소개를 해 주는 동안 박유성은 여느 때처럼 루틴을 실행했다.
오른발로 타석 앞쪽을 쓸고 다진 다음 왼 발을 비비며 지면에 살짝 파묻고.
방망이를 쭉 내밀어 오른 쪽 타석 안쪽 라인을 살짝 긁은 뒤에 풍차처럼 방망이를 가볍게 돌리고 나서 왼쪽 어깨에 가볍게 내려놓고 나니까 라파엘 산체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어이구.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네. 설마 고작 이 정도로 흥분해서 덤벼드는거 아니지?”
화룡점정을 찍듯 박유성이 입가까지 비틀어 올리자 공을 움켜 쥔 라파엘 산체스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야, 저 자식은.”
쿠바에서 태어나 메이저리그 하나만 보고 자라 온 라파엘 산체스에게 한국은 아시아 어딘가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이번 대회가 아니었다면 평생 와볼 일이 없었을 터.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일본 다음으로 야구를 잘 하는 나라라고 하지만 일본 대표팀도 안중에 없는 라파엘 산체스가 대한민국 대표팀을 신경 쓸 리 없었다.
“예선전만 보고 날 만만하게 봤나 본데, 어디 이 공을 보고도 이죽거릴 수 있나 보자.”
바깥쪽 빠른 공을 요구하는 포수 말론 알론소에게 고개를 가로저은 라파엘 산 체스는 몸쪽 하이 패스트 볼 사인이 나오자 냉큼 투구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는 기합을 내지르며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퍼엉!
괴성과 함께 날아든 새하얀 공이 팔꿈치 쪽으로 날아들자 박유성은 가볍게 상체를 들며 타격을 포기했다.
투 스트라이크를 먹은 것도 아니고 노리는 공도 아니어서 초구에 건드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라파엘 산체스의 눈에는 허겁지겁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어때? 내 패스트 볼 맛이?”
앞선 웃음에 복수라도 하듯 라파엘 산체스가 한껏 입가를 비틀어 올렸고.
그런 라파엘 산체스를 보며 박유성도 피식 웃었다.
“어리다. 어려. 하긴. 아직 다 미성년자들이지.”
나직이 중얼거린 박유성이 다시 보란 듯이 루틴을 펼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라 마르티네스 감독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 녀석. 배짱이 제법인데?”
“한국의 키 플레이어이지 않습니까. 주장이기도 하고요.”
“주장? 저 녀석이 주장이야?”
“네. 아마 그래서 더 저러는 것 같습니다.”
박유성은 프로 40년 간의 습관대로 루틴을 실행하는 것 뿐이었지만.
그 행위를 해석하는 건 제각각이었다.
쿠바 벤치는 박유성이 억지로 라파엘 산체스를 도발한다고 여겼다.
“기 싸움에서 질 수야 없지.”
도라 마르티네스 감독은 직접 포수 말론 알론소에게 사인을 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말론 알론소는 몸쪽으로 붙이는 커터를 주문했다.
긴 팔을 채찍처럼 휘두르는 라파엘 산체스의 커터는 초고속 슬라이더라 불릴만큼 빠르고 크게 꺾였다.
우타자들의 눈에는 갑자기 공이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고.
좌타자들은 제 타이밍에 스윙을 해도 방망이 안쪽에 걸려버리는.
아주 고약한 공이었다.
말론 알론소의 사인을 확인한 라파엘 산체스가 애써 웃음을 삼켰다.
앞서 몸 쪽에 붙인 몸 쪽 빠른 공에 화들짝 놀란 박유성이 이번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도 피하는 건 아니겠지?’
포심 패스트 볼 그립을 살짝 비틀면서 라파엘 산체스는 생각을 바꾸었다.
본래 사인은 몸쪽 깊숙이 파고드는 커터지만.
박유성을 덤벼들게 만들려면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게 던져야 할 것 같았다.
“후우······.”
초구 때와 달리 길게 숨을 고른 라파엘 산체스가 이내 왼발을 차올렸다.
그리고는 거의 한복판을 향해 있는 힘껏 팔을 내던졌다.
후앗!
총알처럼 빠져나온 새하얀 공이 바깥쪽에서 한가운데로, 다시 몸쪽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일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최고 구속 97mile/h(≒156.1km/h)에 달한다는.
라파엘 산체스의 커터가 벌써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박유성이 방망이를 내밀자 라파엘 산체스를 지켜봐 온 스카우트들은 하나같이 1루 쪽 땅볼을 예상했다.
하지만 평소보다 반 템포 빨리 방망이를 끌어낸 박유성은 방망이 안쪽, 스윗스폿의 경계선에 가까스로 공을 얹었고.
따악!
제대로 힘이 실린 타구는 1루 베이스라인을 텅 비워놓았던 앤드 프리에토의 오른쪽 공간을 뚫고 사라졌다.
-쳤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1루수 베이스 옆을 꿰뚫습니다!
-이거 3루까지 가겠는데요?
-박유성 선수 1루를 지나 2루로! 2루에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3루로 내달립니다!
-이건 넉넉하게 살 것 같은데요?
-박유성 3루로! 3루로! 3루에서 세이프! 대한민국 대표팀의 리드 오프 박유성선수가 경기 시작 1분 만에 포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역시 박유성 선수네요. 그동안 계속 볼넷으로만 걸어 나가서 타격감이 걱정스러웠는데 기우였습니다. 역시 대한민국의 심장 답네요.
대한민국 중계석에서 극찬을 쏟아내는 동안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도 놀람을 토해냈다.
“뭐야?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못 봤어? 썬이 쳤어. 몸 쪽 커터를 쳤다고.”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 대체 어떻게 친 거야?”
“포심 패스트 볼 타이밍에 휘둘렀는데 운 좋게 얻어 걸린 게 아닐까?”
“그럴 가능성이 높지. 솔직히 한국에 저 정도 레벨의 커터를 던지는 투수는 없잖아.”
“한국야구를 무시하지 마. 오늘 선발 등판하는 킴부터 시작해 한국에도 좋은 투수들이 많다고.”
“하지만 산체스처럼 큰 키에 원숭이처럼 팔도 긴 투수는 없을 걸?”
“원숭이? 지금 썬을 모욕한 거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산체스가 원숭이라고!”
“그것도 인종차별적 발언이잖아!”
“아니 내 말은······.”
스카우트들 중 누군가가 내뱉은 원숭이라는 단어 때문에 잠시 소란이 일긴 했지만.
박유성을 잘 알지 못하는 스카우트들은 운이 따랐다고 결론을 내렸다.
“빌리. 어떻게 생각해요?”
“······.”
“빌리?”
“잠깐. 말 시키지 마. 방금 전 타격을 음미하는 중이니까.”
“음미요?”
“이 친구야. 원래 맛있는 음식은 혀로 한 번 느끼고 그 감각을 되새기며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야.”
“그러니까 빌리는 방금 전 타격이 우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우연? 어떤 X신 같은 놈이 그딴 소리를 해? 저건 완벽한 타이밍에 받아 친거야. 공이 다소 몰리긴 했지만 결코 쉽지 않은 타격이었다고!”
“진정해요, 빌리. 주변에 X신 같은 놈들 투성이라고요.”
빌리 게스파노가 흥분하자 조나단 짐머맨이 다급히 말렸다.
말괄량이 미셸 라슨을 다른 경기장으로 보내고 전 사수이자 베테랑인 빌리 게 스파노와 함께 경기를 볼 수 있어서 즐겁긴 하지만.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지 않는 성격은 늘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하지만 빌리 게스파노는 주변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잘 들어, 조나단. 방금 전 타구는 1루 베이스 안쪽으로 휘어져 들어왔다가 페어가 됐다고. 저런 타구를 만들려면 말이야······.”
“저도 압니다. 완벽한 타이밍에 때려야 한다는 거.”
“그래. 방금 썬의 타격은 완벽 그 자체였어. 마치 메이저리그 10년 차 베테랑 타자를 보는 기분이었다고.”
“그 정도였어요?”
“이런, 내 설명이 부족했던 거야?”
“아뇨. 충분해요. 단지 썬의 타격 기술에 대한 평가가 타당한지가 궁금했을 뿐이에요.”
조나단 짐머맨이 한 발 물러나며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빌리 게스파노와 공개적인 자리에서 언쟁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자 빌리 게스파노가 씩 웃으며 말했다.
“타당하냐고? 당연하지. 썬은 트리플 에이에 가져다 놔도 잘 할거야. 2년. 아니 1년만 있어도 팬들이 난리를 칠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