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76화
12. 헤이, 부라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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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적 일본을 3대 1로 잡아낸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팀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이탈리아를 가볍게 제압하고 A조 1위로 슈퍼 라운드에 진출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에서는 선발 경쟁에서 밀린 김영진(선인 고등학교)이 탈삼진 쇼(10탈삼진)를 선보이는 동안 타자들이 17안타를 때려내며 15대 0, 5회콜드 게임 승리를 따냈고.
이탈리아 전에서는 나해준(선인 고등학교)이 무피안타 8탈삼진 퍼펙트 피칭으로 이탈리아 타선을 제압하는 동안 클린업이 폭발하면서 또 다시 15대 0, 5회콜드 게임 승리를 거두었다.
이 두 경기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건 다름 아닌 박유성.
앞선 세 경기의 활약상을 지켜 본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이탈리아는 박유성과의 승부를 철저하게 피했고.
부상 방지 차원에서 방용택 감독이 도루를 금지하면서 안타 없이 8득점만 챙겼다.
언론에서는 선인 고등학교 원투 펀치를 비롯해 대표팀 선수들의 고른 활약상을 높이 평가했지만.
“어우, 재미없어.”
정작 박유성은 집중 견제를 받는 현실이 못마땅하기만 했다.
더 짜증나는 건 아직 야구를 잘 모르는 박유신의 깨톡이었다.
박유신 - 형아. 오늘도 안타 못 쳤어?
박유성 - 형이 너무 잘 해서 투수들이 상대를 안 해 줬어.
박유신 - 형아. 어제도 그 소리 했어.
박유성 - 진짜야, 인마. 근데 너 프로필 사진 뭐야?
박유신 - 흥밍이 형아야.
박유성 - 네 형아는 나 하나 뿐이라고 했지? 빨리 사진 안 내려?
박유신 - 싫어어어. 형아 안타 못 치잖아.
박유성 - 그런 게 아니라니까!
박유성 - 너 설마 나 없다고 쓸 데 없이 송흔민 영상 보고 그러는 거 아니지?
박유성 - 야! 대답 안 해?
박유신 - 엄마가 핸드폰 그만하래
박유성 - 웃기고 있네.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본다?
박유신 - 진짜야. 엄마가 숙제하래.
박유성 - 이게 어디 벌써부터 엄마를 팔아?
대만전에서 3연타석 홈런을 때려냈을 때만 해도 박유신의 깨톡 사진은 자신이었는데.
고작 두 경기 안타를 못 쳤다고 깨톡 사진을 바꾸다니.
집에 가서 꿀밤을 한 대 먹이고 싶었다.
그래서 박유성은 애꿎은 박유선에게 화풀이를 했다.
박유성 - 야. 유신이 관리 안 하냐?
박유신 - 왜 또 나한테 성질이야?
빅유성 - 유신이 깨톡 프로필 안 봤어?
박유신 - 봤어. 그거 내가 바꿔줬는데?
박유성 - 뭐? 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너 지금 한국 야구의 미래를 망치고 있어. 알아?
박유신 - 뭐래. 그리고 나한테 깨톡할 시간 있으면 아빠한테 전화 좀 해.
박유성 - 전화 했는데?
박유신 - 언제?
박유성 - 수요일에?
박유신 - 오늘 월요일이거든요?
박유성 - 야. 원래 부자간에는 전화같은 거 자주 안 해.
박유신 - 그럼 엄마한테라도 하던가.
박유성 - 엄마한테 전화했는데?
박유신 - 언제?
박유성 - 금요일인가?
박유신 - 말을 말자. 그냥.
“아니 타국에서 경기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 있는데 무슨 전화를 하라는 거야?”
회차 불문 여전히 뾰족한 박유선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박유성은 마지못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박명철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무시나?”
박유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려고 통화 목록을 뒤지는데 갑자기 박명철에게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뭐야? 잘못 누르셨나?”
박유성은 대수롭지 않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박명철이 실수로 건 전화가 부재중으로 찍히곤 하니까 이번에도 그런 거라 여겼다. 그런데
-아들! 잠깐만!
박명철의 잔뜩 들뜬 목소리에 이어 얼굴이 빨개진 아저씨들이 단체로 화면에 등장했다.
“뭐예요? 술 드세요?”
-이놈아. 아저씨들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안녕하세요.”
박유성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화면 너머로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어디에요?”
-어디긴 어디야. 아들 잘 둔 덕분에 한턱내고 있지. 이놈아 너 때문에 지금 얼마나 깨진 줄이나 알아?
“횟집 가셨어요?”
화면 속으로 비치는 테이블을 보며 박유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야구 잘 하는 아들 자랑하려고 기분 내는 것 까지는 좋은데.
얼추 보이는 인원과 테이블에 쌓인 회접시를 보니까 집에 가서 제대로 바가지를 긁힐 것 같았다.
“아버지. 이번까지만 쏘고 다음에는 쏘지 마세요.”
-이놈이 별소리를 다 해. 내가 좋아서 사는 거야. 내가.
“그러니까요. 이러다 우리 집 파산하겠어요.”
-이놈아. 파산해도 내가 파산하니까 넌 지금처럼만 해라. 알았지?
고집불통 아버지를 어떻게든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주변이 시끌벅적한데다가 술에 취해서 소용없을 것 같았다.
“알았으니까 적당히 드세요.”
-알았다 이놈아.
“삼촌들! 저희 아버지 술 많이 못 드시게 하세요!”
-하하. 그래.
-유성아! 파이팅이다!
시끌벅적한 영상 통화를 끝내고.
박유성은 바로 어머니 이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 유성아.
여느 때처럼 이선영은 통화 연결음이 울리기가 무섭게 전화를 받아 주었다.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죄송은. 시합하느라 정신 없잖아.
“역시. 저 알아주는 건 어머니밖에 없어요.”
-그보다 밥은 먹었니?
“네. 여기 호텔 뷔페라 잘 먹고 있어요.”
-다행이네. 제대로 못 챙겨줘서 미안했는데.
“왜 또 얘기가 그쪽으로 가요? 저는 늘 잘 먹고 다니니까 걱정 마세요.”
박유성의 생모 송연주는 박유성이 7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아내가 어린 아들만 두고 사라지자 박명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런 박명철을 대신해 박유성을 챙긴 게 새어머니 이선영이었다.
송연주의 고향 후배이자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배우던 경리였는데 친언니처럼 따르던 송연주가 사고를 당하면서 집이고 회사고 전부 망하게 생길 것 같으니까 두 팔 벌여 나섰고.
그러다 박유성과 박명철을 구제하게 된 것이다.
만약 이선영이 없었다면 야구는커녕 이만큼 건강하게 자라지도 못했을 터.
-그래도. 아빠 핑계로 잘 못 챙겨 주니까 미안해서 그러지.
“저도 야구한다는 핑계로 유선이하고 유신이하고 못 놀아주는데요 뭘. 그리고 어머니가 아버지 챙기는 게 당연한 거죠.”
-이해해줘서 고마워 유성아. 그나저나 우리 유성이가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됐지?
이선영이 대견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어린 시절 박유성은 이선영에게 괜히 심술 맞게 굴었다.
아버지가 새어머니와 바람이 났고 그걸 알게 된 어머니가 사고를 당한 거라는 친척들의 말에 혹하기도 했고.
박유선에 박유신까지 태어나고 나니까 자신만 남의 식구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집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나마 야구라도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으니 망정이지 야구가 없었다면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경찰서나 들락거렸을 터.
“어머니. 우리 예전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그래. 알았어. 안 할게. 그리고 엄마는 다 이해해.
“이해하지 말고 잊어주시면 안 될까요?”
-괜찮아. 어렸을 때는 다 그런거지 뭘.
말하기 부끄럽지만 1회차 시절에는 철이 드는 게 좀 늦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사망보험금은 한 푼도 쓰지 않은 채 자신의 힘으로 박유선과 박유신을 키우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새어머니를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서로 얼굴을 보며 웃고 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회차가 시작됐을 때는 새어머니에게 먼저 다가갔고.
2회차를 살면서 쌓인 정으로 이번 3회차 때는 더 살갑게 굴 수 있었다.
“그런데 유선이 무슨 일 있어요?”
-유신이 말고 유선이?
“네. 깨톡에 감정이 실려 있는데요?”
-유선이도 이제 사춘기잖아. 여자 형제가 없어서 그런거니까 유성이가 이해 좀 해 줘.
“아뇨. 그런 거 말고요. 어머니한테 무슨 얘기 안 해요?”
-무슨 얘기?
“예전에 배구에 관심 있어 하는 거 같던데요.”
-아······. 무슨 얘기 들었니?
“저한테는 제대로 말 안 해서요.”
-그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배구를 하고 싶다고 해서 걱정이야.
2회차 시절 아버지가 황망하게 돌아가신 이후.
박유성은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노릇을 도맡았다.
이선영이 고생하지 않도록 작은 커피숍을 하나 차려주고 생활비를 지원했으며.
1회차 시절 축구 유망주 소리를 듣다가 집안 사정으로 운동을 포기한 박유신을 야구 천재로 만들었고.
반대로 1회차 시절 배구를 하다 발목이 다쳐 두고두고 고생했던 박유선은 평범하게 살도록 이끌었다.
모름지기 2회차라면 수백억 기부는 못 해도 가족들에게는 베풀고 살아야 할것 같아서 행한 일인데 나중에 박유선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다.
“오빠. 나 어렸을 때 진짜 배구 하고 싶었던 거 모르지?”
“야. 배구하면 몸 상해. 비실비실한 게 무슨 배구야?”
“유신이는 어렸을 때 나보다 더 비실비실했거든? 그리고 오빠하고 유신이도 운동하는데 나는 왜 안 돼?”
“그야······ 운동이 힘들기도 하고 그러다 다치면 평생 고생하니까 그렇지.”
“암튼 나는 다시 태어나면 꼭 배구 할 거야. 연경이 언니가 내 롤 모델이라고.”
“유선아. 아무리 그래도 강연경은 너무 갔어. 그 누님은 어나더레벨이라고.”
“뭐래? 내가 롤모델이라고 했지 연경 언니를 넘겠다고 했어?”
“그게 그거 아니야?”
“······오빠는 책 좀 읽어야겠다.”
“야! 나 예전에 받아쓰기 만점 받았어!”
“어휴. 그 소리 왜 안나오나 했다.”
형제 중에서 가장 속이 깊고 불평불만이 없던 박유선이라 몸 건강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랐는데.
막상 자신 때문에 꿈을 잃었다고 하니까 괜히 미안해졌다.
그래서 이번 3회차 때는 박유선이 살고 싶어하는 인생을 살도록 최대한 도와주리라 마음먹었다.
“어머니. 유선이 배구 시키세요.”
-아니야. 너희 아버지 벌써부터 축구 교실 알아보는데 유선이까지 운동 시키는 건 무리야.
“저 내년이면 프로 가는 거 아시죠? 계약금 두둑히 받을 거니까 돈 걱정은 마시고요. 유선이 하고 싶은 거 시켜 주세요. 그래야 나중에 원망 안 듣죠.”
-그래야 하나?
“대신에 아버지는 좀 뜯어 말려 주세요. 축구는 무슨 축구에요. 유신이는 야구가 딱이에요.”
-아버지는 축구가 딱이라던데?
“아버지 예전에 저한테도 축구 시키려고 하셨어요. 그리고 공도 못 차는 분이 왜 자꾸 조기 축구회는 나가는 건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엊그제 또 발목을 삐셨어.
“어휴. 아버지 몸이 허약해서 안 되겠어요. 한달간 곰국만 끓여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마트 가서 사골뼈 왕창 사왔어.
“역시 아버지 챙기는 건 어머니밖에 없어요.”
아버지 박명철이 들었다면 혈압이 올라 뒷목을 잡을 이야기였지만.
박명철의 똥고집을 꺾을 수 있는 건 이선영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통화 오래 해도 괜찮아?
“네. 괜찮아요. 훈련 끝나고 쉬는 중이에요.”
-그럼 푹 쉬어. 다음 경기는 모레지?
“어떻게 아셨어요?”
-유선이가 말해 줬어. 엄마야 잘 모르지. 아무튼 다음 경기도 잘 해. 엄마가 응원할게!
“네. 잘할게요. 그리고 경기할 때 유신이 꼭 TV 앞에 앉혀 놓으세요. 다음 경기는 꼭 안타 칠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