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73화 (73/412)

타자 인생 3회차! 73화

11. 원더 보이 (8)

오늘 선발로 나온 안경호는 4이닝 동안 1안타 1볼넷만 허용하고 일본 타선을 꽁꽁 틀어막고 있었다.

그 중 안타를 친 게 바로 4번 타자 스즈키 지로.

투구폼이 까다로운 안경호의 공을 때려 자신의 앞에 톡 떨어뜨리고는 유유히 1루 베이스를 밟는 모습은 얄미우리만치 멋졌다.

“우리 시절에는 최고의 동양인 타자로 불렸으니까.”

타석으로 들어오는 스즈키 지로는 박유성 또래의 타자들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하필이면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다저스에 입단해 메이 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리드오프로 활약한 탓에 비슷한 유형의 타자들은 아무리 잘해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유신이를 키운 것도 저 녀석 때문이지.”

물론 자신을 뛰어넘는 박유신의 야구 재능과 야구를 하고 싶어 하는 기본적인 의지가 기본 바탕이 됐지만.

스즈키 지로라는 이름을 지우기 위해 박유신을 호타준족으로 이끈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4년만 늦게 회귀했어도 유신이가 스즈키 지로를 잡았을 텐데. 그걸 못 봐서 아쉽네.”

스즈키 지로는 다저스에서 9년을 뛰다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 야구 팬들은 스즈키 이치이로의 기록을 스즈키 지로가 갈아치워주길 바랐지만.

스즈키 이치이로의 말년을 기억하고 있던 스즈키 지로는 에이징 커브가 오기 전에 메이저리그에서 은퇴하겠다는 다짐을 지켰다.

스즈키 지로가 일본으로 떠난 이후 1년간 수많은 후보들을 테스트 한 다저스구단은 박유신에게 눈을 돌렸고.

박유신을 어렵게 영입한 끝에 스즈키 지로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웠다.

비록 활약한 기간이 짧아서 박유신이 스즈키 지로를 넘어섰다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똑같이 9시즌을 소화했다면?

“무조건 유신이지.”

박유성은 자신의 모든 걸 물려받은 박유신이 스즈키 지로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을 거라 확신했다.

스즈키 지로도 삼촌인 스즈키 이치이로처럼 장타력에 대해 박한 평가를 받은 반면 박유신은 회귀 시즌에 33개의 홈런을 때려냈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3회차 때도 2회차 시절의 퍼포먼스가 그대로 적용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박유신을 위해서라도 스즈키 지로의 싹을 미리 밟아놓고 싶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죽어줘야겠다.”

오늘 경기 안경호의 포심 패스트 볼 구속은 150km/h 정도.

최고 구속에 다소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코너워크가 좋은 만큼 정타를 때려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앞선 타석에서 스즈키 지로는 몸쪽 꽉 찬 공을 센터 쪽으로 때려냈다.

“건방지게 말이야. 어디 내 앞에다 타구를 굴려?”

스즈키 지로의 타격감과 안경호의 투구수를 고려해 박유성은 우익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우익수 홍상철이 박유성을 바라봤다.

“라인에 붙을까?”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 대신에 내가 다이빙을 하면 내 뒤는 네가 커버해야 해.”

“그 정도는 나도 알지.”

언론에서는 수비 구멍이라 평가하지만 홍상철은 나름 견고한 수비수였다.

프로에 가서도 은퇴할 때 까지 우익수 자리를 지켰으니 말 다한 셈.

걸음이 느리고 수비 범위가 좁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기에 내보내기 불안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박유성이 정위치에서 오른 쪽으로 이동하자 좌익수로 들어간 김현중도 박유성의 빈자리를 채우듯 중견수 방면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전근우 수석 코치가 감탄을 터트렸다.

“진짜 저래서 유성이가 좋다니까요.”

“왜? 또 뭔데?”

“지금 유성이 수비 위치 보세요.”

“수비 위치? 흠······. 저기가 맞나? 살짝 움직인 거 같기도 하고.”

“우익수 쪽으로 붙었어요. 전 타석에서 스즈키 지로가 센터 쪽 안타를 쳤잖아요.”

“이번에는 좀 더 타이밍이 맞을 거라는 거지?”

“한 번 안타를 친 투수는 원래 자신감이 생기잖아요.”

전근우 수석 코치와 방용택 감독은 철저하게 타자의 시선에서 박유성의 의도를 해석했다.

반면 이동헌 투수 코치와 박재혁 불펜 코치의 생각은 달랐다.

“박 코치님. 지금 경호 투구수가 몇 개죠?”

“조금 많은 편입니다. 70구 다 되어 갑니다.”

“힘이 떨어질 때가 됐네요.”

“게다가 오늘은 커터를 많이 던졌습니다. 이번 타석을 조심해야 합니다.”

안경호는 100구는 물론이고 120구도 자신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코칭스테프가 판단한 안경호의 한계 투구수는 80구 정도였다.

50구가 넘어간 시점부터 구속 감소가 시작되고 80구 이상이 넘어가면 무브먼트까지 눈에 띠게 줄어든다.

전국 대회를 치르는 거라면 몰라도 숙적 일본을 상대로 두점 차 앞서가는 상황이라면 불펜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

그래도 이번 5회까지 맡겨서 승리투수 요건을 채우도록 만들고 싶은 게 이동헌 투수 코치와 박재혁 불펜 코치의 생각이었는데 박유성이 자발적으로 수비를 리드해주니 이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었다.

송영학 배터리 코치는 송산아에게 몸쪽 승부를 주문했다.

스즈키 지로의 타격 스타일상 바깥쪽 공은 무리하지 않고 밀어 칠 터.

힘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타자라면 그물을 쳐 놓고 걸려들길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만약 스즈키 지로가 경험이 풍부했다면 박유성과 김현중의 움직임을 역이용하려 들었겠지만.

첫 타석에서 팀의 유일한 안타를 때려 낸 스즈키 지로는 고양감에 차 있었다.

게다가 팀이 2대 0으로 리드를 당하고 있는 상태.

“내가 해내야 해.”

스즈키 지로는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다 초구에 벨트 높이의 빠른 공이 날아들자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경쾌한 파열음이 경기장에 울려 퍼진 순간.

일본 선수들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만 들어도 방망이 중심에 제대로 걸렸다고 판단한 것이다.

심지어 코스도 좋았다.

우익수와 중견수 사이.

걸음이 느린 우익수가 잡기는 불가능하고.

넓은 지역을 커버해야 하는 중견수도 따라가는 것조차 벅찬.

그 절묘한 방향으로 타구를 날려 냈는데······.

“뭐야?”

펜스까지 굴러가야 할 새하얀 공이 갑자기 사라졌다.

-스즈키 지로가 초구를 받아칩니다. 이 타구를 박유성 선수가 쫓습니다.

-어어, 이거 잡을 거 같은데요?

-박유성! 박유성! 박유성! 박유성! 박유서어어어엉! 잡았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머리 뒤로 넘어가는 타구를 잡아냅니다!

-제가 말 했죠? 잡을 거 같았다고. 박유성 선수가 타구 판단 능력이 예술이거든요. 이거 빠지면 한 점 그냥 헌납하는 거였는데 박유성 선수가 수비에서도한 건 해냅니다.

-아까 박유성 선수를 가리켜 에이스라고 하셨는데요. 저는 이제부터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의 심장! 그게 바로 이 선수입니다!

가까스로 타구를 잡아 낸 박유성이 뒤쫓아 온 홍상철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생각보다 타구가 뻗어서 이를 악물고 달렸지만.

카메라가 잡고 있을 게 뻔한 상황에서 숨을 헐떡거리고 싶지 않았다.

박유성의 글러브 속에서 새하얀 공이 빠져나오는 걸 확인한 스즈키 지로는 고개를 숙인 채 1루 쪽 더그아웃으로 몸을 돌렸고.

조마조마한 얼굴로 외야를 바라보던 안경호는 주먹을 높이 추켜들며 박유성을 향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만 까불어. 그러다 안타 맞는다.”

안경호를 향해 엄지를 한 번 들어 올려준 뒤 박유성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다.

경기가 끝나려면 아직 14개의 아웃 카운트를 더 잡아내야 했다.

경기 후반도 아니고 중반에 나온 호수비 가지고 호들갑을 떨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박유성의 호수비는 일본 대표팀에게 뼈아픈 결과로 이어졌다.

따악!

5번 타자 나시모토 준야가 안경호의 3구를 잡아당겨 홈런을 때려 낸 것이다.

물론 스즈키 지로가 루상에 있었다면 나시모토 준야와의 승부가 달라졌겠지만.

나시모토 준야가 홈런이 아니라 안타만 때려줘도 분위기는 일본 대표팀 쪽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무사에 주자를 남겨놓고 연타를 얻어맞은 안경호를 몰아붙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즈키 지로의 잘 맞은 타구가 잡히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괜찮습니다. 아직 대한민국 대표팀이 한 점 앞서고 있습니다.

-오히려 약간 뻘쭘한 타이밍에 홈런이 나온 느낌입니다.

-엇박자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흔히들 뒷북 친다고 하는데 이런 홈런은 승부에 큰 영향을 못끼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대한민국 중계진은 여유를 부렸고.

“젠장. 몰렸나?”

홈런을 허용한 안경호도 뒷머리를 한 번 긁적거리고는 5회를 끝까지 책임졌다.

-이제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팀의 두 번째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경성 고등학교 강우석 선수죠?

-경성 고등학교 하면 현 고교 야구 최고의 팀으로 꼽히고 있는데요. 그런 경성 고등학교에서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는 선수입니다.

-신장 185cm에 86kg으로 다소 호리호리한 느낌이지만 공은 상당히 묵직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강우석 선수에 이어 강준기 선수와 최현준 선수까지 전부 등판할 것 같은데요.

-한 점 차이인 만큼 전력을 다 해야죠. 오늘 경기를 잡아내야 목표인 결승까지 쉽게 갈 수 있습니다.

-이제 일본도 슬슬 불펜을 가동할 시점이 왔는데요.

-제 생각에는 다음 번 박유성 선수 타석 전에 투수를 바꿀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번 대회 처음으로 마운드에 오른 강우석은 선두타자 엔도 호타로에게 안타를 허용했다.

한복판에 몰리듯 들어간 슬라이더를 엔도 호타로가 힘껏 잡아당겼는데 좌중간으로 빠질 뻔한 타구를 박유성이 빠르게 쫓아가 건져내면서 단타로 막을 수 있었다.

“야! 미쳤냐?”

고생한 박유성을 대신해 김현중이 크게 소리쳤다.

평소에도 경기 중에 얼빠진 짓을 종종 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일본과의 경기에서까지 저럴 줄은 미처 몰랐다.

이제 곧 팀을 옮길 예정인 민병욱 코치도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강우석! 정신 안 차릴래?”

그 호통이 통했던지 강우석은 9번 타자 미즈시마 게이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1번 타자 모리타니 게이토를 2루수 앞 땅볼로 유도하며 자신이 싼 똥을 치웠다.

-2루수 홍우진이 공을 잡아 2루로! 2루에서 다시 1루로! 4-6-3 더블플레이가 나왔습니다.

-좋아요. 강우석 선수. 이대로 한 이닝 더 막아봅시다!

일본 대표팀도 7회 초에 투수를 바꿨다.

하라구치 유타가 8번 타자 송산아와 9번 타자 채준영을 잡아 내자 곧바로 나타 유이 감독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다.

-하라구치 유타 선수는 여기까지인 거 같습니다.

-1회 초에 2실점 한 걸 빼고는 잘 던졌는데요. 정말로 박유성 선수 타석 때 강판을 당했습니다.

-하라구치 유타 선수. 6.2이닝 동안 안타 2개와 볼넷 4개를 허용하며 2실점했습니다. 탈삼진은 9개. 이번 타석까지 투구수는 113구입니다.

하라구치 유타를 대신해 마운드에 오른 건 좌완 사이드암 사사키 고지.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발인 안경호처럼 독특한 투구폼을 자랑하는 투수였다.

“어떻게 할까요? 거를까요?”

“아니. 몸쪽으로 승부 해.”

경기 후반에 박유성을 날뛰게 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나가타 유이 감독은 칼을 뽑아 들었다.

몸 쪽 공을 잘 던지는 사사키 고지의 장점을 활용하기 위해 외야 수비수들까지 극단적으로 오른쪽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아, 지금 일본에서 수비 시프트를 가동하는데요. 좌측이 완전히 비었습니다.

-박유성 선수.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요즘 메이저리그에서도 수비 시프트는 거의 사용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평소처럼 하면 됩니다.

한윤재 해설 위원은 박유성이 시원시원한 장타로 수비 시프트를 깨부수길 바랐다.

하지만 박유성의 눈에는 텅 빈 좌측 공간이 너무 잘 들어왔다.

“일본 좌익수가 걸음이 빠른 편은 아닐 텐데? 무슨 자신감이지?”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은 초구 몸쪽 높은 코스의 포심 패스트 볼을 가볍게 피했다.

뒤이어 몸쪽 낮게 파고드는 체인지업까지 참아 내니까 사사키 고지가 던질 공이 없어졌다.

‘일단 바깥쪽으로 하나 빼자.’

미즈시마 게이의 사인을 받은 사사키 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기합성을 내지르며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간 나머지 바깥 쪽으로 꺾여 나가야 할 슬라이더가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듯 들어왔다.

그리고 박유성은

따악!

그 공을 텅 빈 좌측 공간으로 힘껏 밀어냈다.

0